고창 갈촌 선산에 들려서 군청에 들려 일을보고 아산 풍천 장어를 사서 해남으로 귀촌한 신재동 형님댁 방문을 하려갔다

목포대교를 건너 해남 영호리에 도착하니 오후 4시30분쯤 됐다. 이곳 고향에 작년에 새집을 짓고 사는 형님이다.

                                           아담하게 집을지어 부부가 실고 있다

노력도에서 출발하는 도선에 차를 실고 간다.

 

     30분후 금당도 섬에 도착했다.

       ☆ 여행지도

'일반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도여행(고흥-팔영대교-여수)  (0) 2021.08.08
남해안여행(섬100리길)2  (0) 2021.08.08
화천삼일계곡(화학산)  (0) 2021.07.26
30년 무사고 안전상 받음  (0) 2020.08.26
봉선사의 연꽃  (0) 2020.07.19

    오랜만에 우리가족 나들이를 했다

    화천 화학산 삼일계곡에서 송어회로 점심을 하고 이동으로해서 돌아왔다.

 

'일반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안여행(섬100리길)2  (0) 2021.08.08
남해안 여행(섬100리길)  (0) 2021.08.08
30년 무사고 안전상 받음  (0) 2020.08.26
봉선사의 연꽃  (0) 2020.07.19
안면도 여행(1)  (0) 2020.03.26
행복학교를 세계적인 명품으로
앞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행복학교를 어떻게 운영하는지 공부해서 자기 나라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시대가 올 겁니다. 이렇게 창조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학교는 앞으로 전 세계적인 명품이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면 전 세계 사람들이 행복학교 프로그램을 배우고 벤치마킹해서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맞게끔 적용하는 시대가 올 거예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또 업그레이드를 해나가게 될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서 수출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세계 문명의 선도자, 앞서가는 사람의 위치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한 시민이었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우리나라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행복학교라는 좋은 모델을 만들게 되면, 전 세계가 이런 방향의 마음공부를 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 스스로 ‘한 발 앞서가는 사람이다’ 하고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그에 비해 가방을 뭘 들었는지, 화장품은 뭘 쓰는지, 귀걸이는 뭘 걸었는지, 옷은 뭘 입었는지, 이런 건 별로 안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스님에게는 옷을 뭘 입었는지, 음식을 뭘 먹었는지가 별로 안 중요합니다. 그것보다 이런 행복학교를 창조하고 세상에 확산시키고, 또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이 혜택을 입는 것에 더 중요한 의미를 둡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을 한 번 바꿔보면 어떨까요? 행복학교 마음편을 공부한 사람은 관계편으로 넘어가고, 관계편을 공부한 사람은 심화과정으로 넘어가고, 심화과정을 공부한 사람은 행복시민이 되고, 행복시민이 된 사람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고, 평화가 더 정착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실천을 해보면 어떨까요? 이런 제안을 드리면서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참나가 없다면 불성도 없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비록 어리석어서 괴로움에 빠져 있지만 미혹과 무명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佛性)이 있어서 그걸 발견하면 부처가 되고, 그런 불성은 영롱한 무언가라고 생각하면 이는 힌두교 사상이 됩니다.


모든 사물에는 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가령, 자동차는 움직이기도 하고, 불도 밝히고, 소리도 냅니다. 그런 자동차를 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동차에 어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차를 분해하고 나면 자동차에는 어떠한 실체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품을 다 모아서 정교하게 조립한 자동차는 움직이기도 하고, 불도 밝히고, 소리도 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마치 그런 작용을 하는 주체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지(無智)입니다. 그렇게 착각해서 이 차는 A차, 저 차는 B차 이렇게 실체가 있는 것처럼 분류하지만, 실제로 분해해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부품들이 정교하게 조립되어서 거기에 움직이는 작용, 불을 밝히는 작용, 소리를 내는 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무아(無我)는 ‘자동차가 없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자동차는 존재합니다. 그런 것처럼 나에게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때 실체가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견(斷見)이고, 작용이 있으니까 여기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견(常見)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닌, 다만 작용이 있고 신의 분신인 ‘아’라는 작용의 주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확연히 깨달으면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교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후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고 원리를 풀어놓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설명은 주로 대화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로 언어를 고정화시키고, 언어로 표현된 것에 실체가 있다는 방식으로 사고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법(佛法)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어떻게 부처가 되는가? 불성을 발견하면 된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마치 우리의 마음속에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어떤 불변적 실체 같은 게 있다는 방향으로 사고가 흘러가버립니다. 지금의 나는 허상이고 진짜 나는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힌두교 방식의 믿음입니다.

‘불성’에 대한 질문자의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에요.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에서는 이러한 해석이 가능하고, 이 역시 하나의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불성이 있다’ 하는 말을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견주어서 해석하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하는 뜻입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열반과 해탈에 이르는 것입니다. 열반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뜻하고, 해탈은 자유로운 상태를 뜻합니다.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은 한국 사람도, 일본 사람도, 미국 사람도, 팔이 하나 없는 사람도, 어릴 때 성추행당한 사람도, 어릴 때 가난하게 자란 사람도 지금, 여기, 사실에 깨어 있으면 괴로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남을 위한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
자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알고서
자기가 할 일에 전념해야 한다.”

스님이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남을 위한 일’이란 남을 돕거나 남을 칭찬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런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가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가 할 일’이란 일상적인 일을 말하는 게 아니라 수행을 뜻합니다. 즉, 자신의 수행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
수행자에게는 자기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남을 돕지 말라거나 칭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그런 이유로 자기 정진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자로서 봉사활동을 해야 하고, 수행자로서 남을 도와야 한다’

제가 평소에도 늘 이렇게 강조하잖아요. 수행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남을 돕기만 하는 사람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가 괴롭다면 수행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그런 일을 괴로움 없이 해나가는 사람입니다. 괴롭더라도 자기를 돌이켜가며 괴로움을 줄여나가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남을 돕지 않지만 자기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 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은 범부중생입니다. 범부중생은 남에게 도움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남을 돕는 사람은 이보다는 나은 사람인데, 남을 도우면서 괴로워하거나 남에게 의지한다면 좋은 사람이라 불릴지는 몰라도 수행자는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항상 잘 단속하는 가운데 남을 위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소승(小乘)은 남이 수행을 안 하더라도 자기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이고, 대승(大乘)은 자기 수행에만 그치지 않고 남도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구제하는 정성이 얼마나 큰 지를 설명할 때 ‘내 수행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을 돕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내 수행을 안 하면서 남을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을 돕는 것이 내 수행에 지장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돕겠다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대승이 갖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남을 돕는 일을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괴로워한다면 수행자의 자세를 제대로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면서 괴로워하거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괴로워하거나, 도를 닦으면서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밖으로 백만의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가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장부이다.’

그러니 남을 위하는 일이 아무리 대단해도 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자기 일’은 집안일이나 일상적인 업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수행’을 의미합니다.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수행의 관점을 놓친 것입니다. 항상 어떤 일을 할 때는 그 일을 하는 목표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수행자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해탈과 열반이 목표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놓쳐가면서까지 무언가를 한다면 주객이 바뀐 겁니다. 즉 목적과 수단이 바뀐 상황입니다.

수행이란 절하고, 참선하고, 명상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괴롭지 않도록, 헐떡거리지 않도록, 들뜨지 않도록, 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 수행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렇게 마음 관리가 되는 전제 위에서 다른 활동으로 폭을 점차 넓혀가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세 단계
오늘 읽은 경전에 나온 표현인 ‘자기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바로 자기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의미합니다. 먼저 자기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이 행복은 마음의 들뜸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자기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가꾸는 일에 가장 큰 중심을 두고, 그런 후 다른 일에 의미 부여를 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세 가지 단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밥을 굶는 것보다는 밥을 먹는 게 낫고, 집이 없는 것보다는 집이 있는 게 낫고, 옷이 없는 것보다는 옷이 있는 게 낫고, 가족에게 되도록 사고가 안 나는 게 낫고, 몸은 되도록 건강한 게 낫습니다. 이렇게 안정된 생활이 불안정한 생활보다 낫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지금 내가 밥 먹고, 잠자고, 옷 입고, 건강하고, 사람들과 원만하게 살아간다고 끝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나중에 밥을 굶는 일이 생기거나, 옷이 없는 일이 생기거나, 집이 없는 일이 생기거나, 건강을 해치는 일이 생기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좋은데 오히려 지금이 원인이 되어 미래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그건 잘못된 삶입니다.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도 좋음을 가져오는 삶이 되어야지,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 불이익을 가져오는 좋음이라면 이 좋음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선 지금이 좋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다음에 지옥 가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됩니다. 즉, 나중도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모두 유루복(有漏福)에 해당됩니다. 유루복은 언젠가 복이 다해서 바닥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 두 가지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 더 충족되어야 합니다.

셋째,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지고한 복이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끄덕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끄덕 없고, 잘 집이 없어도 끄덕 없고, 설령 건강이 안 좋아도 끄덕 없고, 가족 중 누군가 죽는다고 해도 끄덕 없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앞에 있는 1단계와 2단계는 이 세상에서 두루 원만한 삶입니다. 속세에서의 편안한 삶입니다. 지금이 좋은 줄 알고, 또 지금의 좋음이 다음에도 좋음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의 현명한 자입니다. 3단계는 출세간(出世間)의 삶입니다. 이건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삶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뛰어넘는 삶을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뛰어넘는 길을 가는 지혜로운 자가 바로 수행자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