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나를 찿아라

이송장 끌고다니는 이것이 뭐고?

죽은 뒤에 이 몸뚱이 내버리고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게 참말로 큰일이다.
발심해라.
인간은 늙을수록 천해진다.
가죽 속에 힘 있을 때 한번 좀 닦아보지
왜 늙기를 기다리는가?
병들기 전에 늙기 전에 한바탕해라.
나한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광음...
그 옥 같은 광음을 허송하지마라
금생에 생사해탈 못하면 언제 깨달을 것인가?
인생답게 살아봐야겠다. 그 무슨 도리냐?
나를 깨닫는 참선법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해라

"이 뭣고 (화두) 한번 찾아보란말여”

이 몸뚱이 내버릴 그 시간을 누가 아느냔 말여 일향간에 있다.
숨 한번 들이 쉬고 내쉬는 가운데 있다.
이 소소영영한 주인공은 똥을 아무리 묻힐래야 묻지도 않는다.
이렇게 껌껌해 가지고 오늘 살면 뭣하고 내일 살면 뭣혀. 내가 나를 깨달아야지.
우리는 도둑질한 죄수보다 더한 감옥에 갇힌 거여 죽으러 가는 소가 자욱 자욱 사지인 것과 같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하자 이러지 말어.
광음을 진실로 아껴라.
오늘 이 목숨을 내버릴런지 내일 죽을런지 알지 못한다.
어린 손자가 물가에 놀다가 물에 빠질까
걱정이 돼서 쫓아 들어가 건져내듯이 간절할 절(切)자 뿐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진리가 있을 것인데
본래 생사가 없는 본래면목 근본면목
내가 나를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인디
죄만 퍼짓는 내가 나 깨달을 줄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어 육도윤회에 들어 어리석어
나를 깨달을 줄 모르는 것을 중생이라고해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부처를 안고 일어난다.
부처님 가신 곳을 알고자 할진데 이 말과 소리가 이것이니라.“
내 마음 밖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삼라만상이 내 마음에서 난 것이다.
두두물물이 다 내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다.
내가 하늘이고 내가 우주만물을 만들어낸 주인공이여!
발심을 해가지고 들어오면 어디 가서 남의 시비가 보일 것이냐
죽을 일을 생각해 보지 어찌 안할 것인가?
공부에 要한 것이 그 마음을 잘 써라.
이 뭣고를 잘 챙기는 것이다.

참으로 참다운 신심을 발해라.
신심을 발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해태 마구니가 잽히고
번뇌 마구니가 잽히고 일체 마구니에
그놈한테 가서 그만 입에 물려가지고서
밤낮 그만 도로 煩惱妄想 도로 해태심 도로 그런 마음 이렇다.

한번 신심을 내라
어찌 안 믿을 수가 있나
내가 나 찾는 법을 어째 안 믿어?
밤새도록 자고 있어?
몇 시간씩 자고 있어?
잠 안 잔다고 병 안나.
화두만 없어지면 즐겁다 좋다 망념이 들어올 것이니까.
숨 내쉴 때에도 알 수 없는 화두요
숨을 들이쉴 때에도 알 수 없는 화두가 되게 하라.
넘 안한다고 나도 안할 것인가?

공부하는데
의심은 왜 이렇게 안날까 하시겠지만
그렇게 안되는 법이여
그래도 그렇게 안 될수록에 안되는 곳을 보면 망상이 화두 뿌럭지에 가서 솜 얼키듯이 얽혔어 전생의 숙습이기 때문에 화두는 겉으로 들어지고 속에는 망상이 끼었어 그 여러 가지 망상 번뇌가 뿌럭데기가 없기 때문에 곧 죽어버려
"이뭣고(화두)"만 하면 곧 없어져...
알 수 없는 의심하나 그놈이 본 주인이기 때문에 천 가지 만 가지 망상이 다 무찔러지는 것이여
망상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 말라.
싸울수록 더 일어나니 의심하나만 둬라.

-전강스님의 발심 법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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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태어나기전 어떤것이 참나더고?]

나는언제 부터인가 내 전생이 궁금했었다
인터넷 법문을 찿아 해매다가 참나를 찿아 참되게 살라는 글귀를 우연히보고
그럼 "어떤것이 참나일까 ?" 하는의문이 마음에 꽂쳤다
반야심경에 이몸이 사대(지수화풍)오온(색수상행식)
으로 되여있고 그것이 본래 공하다
그러면 진짜 참나는(본래면목) 뭘까?
자성.진성.본성.불성,성품 이라고
불러지는 이것이 어떤것일까?

마음을 알면 성품을알고 성품을 알면 부처를 보는 것이다 (식심견성)
그런데 아직 마음이 뭔지 알지 못하고
성품을 알지 못하니 부처를 알리가 없다

"이 뮛고?"

이것을 아는 것만이 부처를 아는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이 날때마다
난 이것(화두)을 나에게 되묻는다
어느땐 순일하게 잘 될때도 있지만 거의
잊어버리고 놓치고 지낼때가 더많다

이래가지고 언제 공부를 할까 .
오매일여 숙면일여 몽중일여 까지 갈수있을까?
화두를 놓을래야 놀을수없을 정도로
딱 의문이 고리와 연결이돼 물이 흐르듯 흘러야 된다는데 난 늘 놓치고 산다

百尺竿頭 進一步(백척간두 진일보)
말과생각이 끊어져 은산철벽을 넘어야
화두 타파가 된다고 했는데
마음 찿는공부가 이렇게 어렵다면
늘 깨여있어서 항시 화두를 들고
그러다 순간 놓치면 알아차리고
참회하고 다시 화두를 들고를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해야만 될것이다

"이 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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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이제부터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의 본격적인 법문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장난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나 반야경의 핵심만을 뽑아 놓은‘심경(心經)’에서 말이지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의‘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空)하다는 무상(無常)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無我)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논리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화엄의‘사법계(四法界)’를 잠시 빌린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因)과 연(緣)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계, 책상, 혹은 내 사랑하는 연인 등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과 연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인연생이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色)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바로 공이라는 것은, 시계가 공(空)이고, 책상이 공이고,
애인이 공이라는 것이기에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다르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젠가는 공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색이란 우리의 사량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에서는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며,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이법계(理法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이사무애법계’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텐데, 다시 한번‘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色),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空)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 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반야라는 지혜의 안목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자니
우리 범부 중생의 사량으로 어려운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다음에‘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무아(無我)란 ?

“‘내가 있는데 왜? 무아(無我)’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물의 실체가 있습니까? ‘이게 물이다 ’ 라고 하는 근본 알갱이가 있는지 한번 생각해봅시다. 물의 실체, 즉 물의 근본 알갱이를 조사하려면 물을 한 방울 떠서 쪼개보면 되겠죠. 쪼개고 또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의 알갱이가 수없이 결합해서 물이 된다고
할 때 그 알갱이를 물 분자라고 부릅니다.

이건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것도 쪼갤 수 있는 방법이 나와서 쪼개보니 더 이상은 물이 아닌게 되어 버렸어요.
물 분자의 분자식은 H₂O인데 그걸 한 번 더 쪼개버리면 H₂와 O₂가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물이 아니에요. 물은 아무리 분해해도 물이어야 할 텐데, 물 아닌 것으로부터 물이 된 겁니다. 이럴 때 우리가 ‘물의 실체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의 작용은 있지만 물의 실체는 없어요.

물은 있지만 물의 실체는 없고, 산소는 있지만 산소의 실체는 없어요. 산소라는 원자가 단독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속에는 양성자가 있고 중성자가 있고 전자가 있었습니다 그걸 더 파고들면 소립자가 결합한 것이에요. 소립자가 지금은 이런 형태로 결합해 있지만 달리 결합해버리면 있던 양성자가 몇 개 밖으로 떨어져 나오거나 몇 개가 더 붙어서 다른 원자가 됩니다. 그것을 실험으로 증명한 게 원자량이 제일 많은 92번 우라늄을 붕괴시킨 거예요. 이게 원자탄에 쓰이는 핵분열입니다. 또 제일 작은 중수소 두 개를 융합시켜버린 게 수소폭탄에 쓰이는 핵융합에요.

고정불변한 원자가 결합하는 것은 화학법칙인데, 이 화학법칙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합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 배수 비례의 법칙, 일정 성분비의 법칙 이런 거 기억나요? (청중 웃음)

그런데 이 핵의 변화에서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고 질량 감소가 일어납니다. 물리변화나 화학변화와는 차원이 달라요. 그 감소된 질량은 에너지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E=mc²’이라는 에너지-질량 등가 공식이에요. ‘작용은 하지만 그 안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은 물질계에서는 이미 증명이 다 되었어요.

그걸 무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용은 하지만 실체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작용을 하니까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걸 정신세계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결혼해 아이가 있는 여성이 아이와 있을 때는 엄마라 불리고, 남편과 있을 때는 아내라 불리고, 부모님을 만나면 딸이라고 불리고, 절에 오면 신도라고 불리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 불립니다. 인연에 따라 이리도 불리고 저리도 불려요. 엄마의 작용, 딸의 작용, 아내의 작용, 손님의 작용, 신도의 작용은 있지만 그 사람이 그 중 하나인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데 내가 엄마 역할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엄마라고만 생각하고, 아내 역할을 오래 하다 보면 내가 아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나는 더 이상 아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내 역할을 한 30년 하다가 남편이 죽으면 내가 계속 아내라고 생각합니다.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재혼해도 되는데, 자기가 아내라고 생각하니 결혼을 못 하는 거예요. 아내니 딸이니 하는 것은 모두 관계맺음에 의해서 불리는 이름입니다. 역할만 있지 ‘아내’라고 하는 실체는 없어요.

인도에서는 이런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 하늘에는 브라만(Brahman)이라는 신이 있고 내 속에는 아트만(Atman)이라는 작은 신이 있어서 이 둘이 만나 결합하는 것, 즉 범아일여(梵我一如)가 곧 해탈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에게 그런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고 했어요. ‘아트만’에 ‘un’을 붙여서 ‘UnAtman’이라고 한 걸 한자로 옮긴 게 ‘무아(無我)’입니다.

질문자가 방안에 앉아서 ‘내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뭐가 있습니까? (청중 웃음) 몸뚱이가 있다고 대답하겠지만, 그 몸뚱이가 나입니까? 몸은 ‘내 몸’이라고 하지 ‘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 역시 ‘내 생각’이라고 하지 ‘나’라고 하지 않아요. 용어를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물건’ 이렇게 쓰니까 ‘나’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여겨요. ‘나’라는 것이 있고 나서 그것의 몸, 그것의 생각, 그것의 느낌, 그것의 소유라고 해야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뭐예요?”

“모르겠어요.” (청중 웃음)

“그게 뭔지 연구해보세요. 그래서 유명한 선문답에 ‘Who are you?’라는 것이 있습니다.

‘너 누구냐?’
‘아무개입니다.’
‘아무개가 너냐, 너의 이름이냐?’
‘이름입니다.’
‘이름을 물은 게 아니다. 너는 누구냐?’
‘딸입니다.’
‘딸은 네 엄마와의 관계다. 너는 누구냐?’
‘선생님입니다.’
‘그것은 너의 직업이다. 너는 누구냐?’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서 남편이되고 아들이되고 아빠가되고 손님이되고 기사가되고 일꾼이되고 사장이되고 고모부가되고 조카가되고 사원이되고 직업인이되고 엿장수가되고 할아버지가되고 친구가되고 이렇게 조건에 따라 무엇이든 가능하게 될수있는데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외 다른것이 될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도 연기 무아 공이라고 한다.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중생을 구제한다는 마음을 어떻게 내죠?

“금강경 전체에서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마음을 먼저 먹어야 한다’라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 법문을 들을 때는 알 것 같다가도, 다시 돌아서면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다른 중생을 먼저 구원할 수 있을까? 내가 제일 먼저 구제되어야 하는 중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자꾸 돌아갑니다.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앞에 꽃이 있죠? 꽃이 지금 예뻐요, 미워요?”

 

예뻐요.”

 

 

다시 물어볼게요. ‘그 꽃 참 예쁘다이러면 꽃이 기분 좋아요, 내가 기분 좋아요?”

 

제가 기분 좋아요.”

 

 

다시 물어볼게요. ‘꽃이 뭐 이렇게 생겼어?’ 이렇게 짜증을 내면 꽃이 기분 나쁠까요, 내가 기분 나쁠까요?”

 

제가 기분 나빠요.”

 

이게 마음의 원리입니다. 내가 꽃을 미워하면 내가 기분이 나쁘고, 내가 꽃을 좋아하면 내가 기분이 좋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분 좋으려면 꽃을 예뻐하라는 겁니다. 그게 뭐가 어려워요?

 

네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행복하니까 남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남을 사랑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우리 아이 너무 좋다’, ‘우리 남편 너무 좋아!’ 이러면 남편이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

 

 

질문자는 그러면 남편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죠?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남편을 두고 바람이나 피우는 저게 사람이야?’ 이러면 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싶으면 남편을 미워하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기분이 좋고 싶으면 남편을 사랑하면 됩니다. ‘제가 행복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하니까 남을 사랑해라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쉽게 비유하면 이런 뜻입니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해가 안 돼!’ 이러면 내 마음이 답답해요, 시원해요?”

 

답답해요.”

 

그게 아니라 ,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면 누구 마음이 시원해져요?”

 

제 마음이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남이 나를 사랑해야 내가 행복하다이렇게 거꾸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사랑 안 해준다고 늘 괴로워합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면 내가 행복할 텐데.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행복하지 못하다는 거예요.

 

부처님, 어떻게 하면 제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묻지만 사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이 나를 사랑해 줄까요?’ 이런 질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대답은 그 반대입니다. ‘이러저러하게 하면 남편이 너를 사랑해줘서 네가 행복할 거야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네가 남편을 사랑하면 네가 행복하단다이렇게 대답한 겁니다.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이해하고,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이해하고, 이웃집을 사랑하고, 이웃집 사람을 이해하면, 상대의 괴로움이 아니라 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이것은 마음작용의 이치이자 과학이에요. 실제로 해보면 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데 부처님이며 하느님이 왜 필요해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냥 남편을 사랑하고 이해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나를 사랑해달라고 해도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니까, 부처님이며 하느님한테 저 인간 나 좀 사랑하게 해 주세요’, ‘아이가 공부 좀 하게 해주세요이렇게 빌어야 하는 거예요. 남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까 힘 있는 자에게 빌어야 하는 겁니다.

 

반면에 내가 먼저 사랑하는 건 내가 그냥 하면 되니까 남에게 빌 일이 없어요. 내가 사랑하면 내가 행복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싫으면 미워하면 돼요. 부처님은 사랑해라’, ‘미워하지 마라이렇게 윤리를 가르치지 않아요. ‘네가 행복하고 싶으면 사랑해라라고 할 뿐입니다. 괴롭고 싶으면 미워하라는 거예요. ‘미워하면 나쁘다’, ‘사랑하면 좋다이런 윤리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지금 괴롭습니다.’

 

왜 괴로울까? 네가 남을 미워하니까 괴롭잖아.’

 

안 괴로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미움을 버려라.’

 

불덩어리를 쥐고서는 아이고, 뜨겁습니다!’ 하고 있으니까 놓아라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따끈따끈하니 좋은데요이렇게 말하는데 왜 놓으라고 하겠어요? 뜨겁다고 아우성을 치니까 놓아라하고 말하는 거예요.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남을 사랑하고, 남을 도와주고, 남을 이해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나에게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어요. 여러분이 지금 괴로운 건 사랑을 못 받아서 괴로운 거예요. 사랑을 받고 싶은데 안 해주니까 괴롭고, 도움을 받고 싶은데 못 받으니까 괴로운 겁니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상대를 내가 원하는 대로 강제로라도 끼워 맞추면 될까요? 내 힘으로 안 되니까 부처님, 도와주세요이렇게 빌지만 그건 부처님도 해줄 수가 없어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놓아버리면 됩니다.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거꾸로 내가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내면 됩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벗어나 내가 먼저 사랑해주면 됩니다. 이해해 달라고 하던 마음에서 벗어나 내가 이해해 주면 괴로움이 싹 사라져 버립니다. 얼마나 쉬워요?

 

그런데도 질문자가 거꾸로 생각하는 이유는 오랜 습관 때문이에요.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에게는 담배 피우는 것보다 안 피우는 게 쉽습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게 더 쉽습니다. 원래는 안 피우는 게 피우는 것보다 훨씬 쉬운 거잖아요. 안 피우는 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요. 돈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담배를 피우는 건 돈도 있어야 하고, 담배도 사 와야 하고, 빼 물어야 하고, 불 붙여야 하고, 빨아야 해요. 재떨이에 재도 털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담배를 안 피우는 게 훨씬 쉽고, 건강에도 좋아요. 그런데도 담배에 중독이 되면 담배 피우는 게 더 쉬워요. 담배 피우는 것이 습관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중독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마찬가지로 화내는 게 쉬울까요? 화를 안 내는 게 쉬울까요? 화를 안 내는 게 쉬워요. 그런데도 화내는 게 쉬운 건 화내는 것에 중독이 돼서 그래요.

 

행복하기가 쉬울까요? 괴로운 게 쉬울까요? 행복하기가 훨씬 쉬워요. 내가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하면 돼요. 사랑하고 이해하면 행복해지니까요. 행복해지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상대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태어나서 그렇게밖에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아이고, 나는 담배 안 피우면 못 사는데요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요.

 

 

부처님 법은 굉장히 쉬워요. 사실 딱히 무엇을 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다 어려워하는 이유는 담배 중독 환자나 아편 중독 환자처럼 탐, , 치 삼독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담배 피우면 네 건강에 나쁘다이렇게 자비롭게 얘기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담배 피우면 여러 모로 좋지 않다.’

 

그래도 피우고 싶은데요.’

 

그래? 그럼 담배 피우고 일찍 죽어라.’

 

피우고 싶으면 피우라는 거예요. 본인이 피우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여러분은 스님이 말을 왜 저렇게 하나하지만, 본인이 하겠다는데 제가 어떡하겠어요? 담배 안 피우면 건강에도 좋고 돈도 안 들고 방도 깨끗하고 다 좋은데도 죽어라고 피우겠다는데, 그걸 어떡해요? 억지로 못 피우게 하면 인권침해라고 하거나 사생활 간섭이라고까지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인권을 존중해서 그래, 피우고 죽어라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웃음)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불경을 읽어봐도 사실은 모두 상식적인 얘기예요. 담배를 너무 피워서 목이 따갑다고 하면 담배 끊으라고 말하고, 밥을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되어 힘들다고 하면 앞으로는 조금 먹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전을 읽어보면 다 이런 얘기들이에요. 그런데도 담배를 못 끊겠다고 하는 겁니다.

 

담배를 끊는 게 좋다.’

 

조금만 피우면 안 될까요?’

 

조금만 피우는 것도 나쁘다.’

 

그래도 조금만 피우면 안 될까요?’

 

그래도 건강에 나쁘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자꾸 길어지는 거예요. 원래는 금강경도 1장에 모든 내용이 다 담겨 있는데, 이해를 못해서 계속 설명을 하느라 32장까지 간 거예요. 이해가 됐어요?”

 

.”

 

 

일체 중생을 구제할 마음을 내라는 말은 도움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려는 마음을 내라는 뜻이에요. 그러지 않고 남편이 나를 이해 안 해주네!’ 이러니까 괴로운 거예요. 내가 남편을 이해하면 됩니다. ‘꽃이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을까이러지 말고 내가 꽃을 예뻐해 주면 돼요. 내가 바다를 보고 바다 참 좋다!’ 이러면 내가 기분이 좋지 바다가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산 좋다!’ 이러면 내가 좋지 산이 좋을 게 뭐가 있어요?

 

우리 남편 훌륭하다이러면 내가 좋아요. 훌륭한 사람하고 같이 사니 다른 사람도 나를 존중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 남편은 짐승보다 못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보게 돼요.

 

웃기네. 그럼 저 여자는 짐승보다도 못한 남자와 한 집에 같이 사는 걸 보니 짐승보다 못한 것보다도 못한 존재네.’

 

이런 게 자기 얼굴에 침 뱉기예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훨씬 더 적나라하게 얘기해줄 수 있는데, 그러면 여러분이 다 도망가 버릴까 싶어서 그래도 조금 조심스럽게 얘기해 주는 거예요. 오늘은 질문자가 먼저 물었으니까 제가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부처님은 딱 직설적으로 얘기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습니까?’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 주겠다는 마음을 내라.’

 

부처님한테 구제해 주세요하지 말고 본인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는 말이에요. 구제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도와주라는 뜻이에요. 남편을 이해하고, 아내를 이해하고, 아이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움을 주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을 지금 여러분이 내보세요. 그러면 괴로울 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사랑 안 해줘서’, ‘이해 못 받아서’, ‘도움 못 받아서이런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고 괴로워하면서 살아요. 사실은 누군가에게 빌 일도 없어요. 한 생각 딱 바꾸면 끝이에요. 부처님이 금강경 1장에서 말없는 일상으로 이것을 보여주신 거예요.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까 수보리가 말로 표현해서 질문을 한 거죠. 부처님은 딱 한 마디로 얘기했어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다시 두 마디를 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요. 그래도 못 알아들으니까 또 두 마디를 하고요. 이렇게 해서 금강경이 점점 길어진 거예요.

 

 

다시 질문해 보겠습니다. 내가 꽃을 좋아하면 꽃이 좋을까요, 내가 좋을까요?”

 

제가 좋습니다.”

 

 

그래요. ‘부처님, 제가 좋으려면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물으니까 부처님이 꽃을 보고 예뻐해 줘라이렇게 답하신 거예요. 이게 틀린 말이에요, 맞는 말이에요?”

 

“맞는 말입니다.”

 

어려운 얘기예요, 쉬운 얘기예요?”

 

“쉬운 얘깁니다.”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이게 사실이에요?”

 

“사실입니다.”

 

직접 해보면 바로 체험할 수 있어요, ‘, 꽃 예쁘네!’ 이러면 내 기분이 좋잖아요. 바로 체험되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나의 가르침은 눈 있는 자라면 누구나 와서 볼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눈만 뜨면 알 수 있는 것이지, 부처님 손에 숨겨진 어떤 비밀 같은 건 없어요. 본인이 눈을 감아서 못 볼뿐입니다. 눈만 딱 뜨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해보면 잘 안 되죠? 왜 그럴까요? 어려워서 잘 안 되는 걸까요, 담배처럼 중독이 돼서 잘 안 되는 걸까요?”

 

중독이 돼서요.”

 

그래요, 중독된 상태라서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 잘 안 되더라도 안 되는 자기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자기를 보면 돼요.

 

내가 담배에 중독이 됐구나.’

 

내가 미워하는 게 습관이 됐구나.’

 

내가 화를 내는 게 습관이 됐구나.’

 

습관이 돼서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나도 모르게 화를 내고, 나도 모르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습관이 돼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습관은 좀 버려야겠죠. 몸에 해로운 줄 알았으면 아무리 좋은 음식도 안 먹어야 해요.

 

 

이런 중독된 삶에서 벗어나세요. 여러분은 지금 중독된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음식에 중독돼, 옷에 중독돼, 명품에 중독돼, 향수에 중독돼, 술에 중독돼, 담배에 중독돼, 차에 중독돼, 집에 중독돼, 사람에 중독돼, 얼굴 모양에 중독돼, 이렇게 중독된 상태에서 미쳐서 살아가기 때문에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중독된 것을 한 번 놓아보라는 겁니다. 놓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 좀 차려라이렇게 얘기해도 여러분은 스님은 세상 물정을 모른다. 혼자 사니까 저런 소리를 하지이런 얘기나 하죠. 그래서 저도 물어보는 것만 대답하지 일체 간섭을 안 해요. 여러분이 물어보면 그때만 얘기해요. 오늘도 물으니까 할 수 없이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멍청한 물음이 법문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 주위에 똑똑한 사람만 있었으면 부처님이 설법할 일이 없었겠죠. 다 못 알아들으니까 또 묻고, 그래도 못 알아들어서 또 물으니까 금강경이라는 경전도 나올 수 있었던 거예요. 부처님이 첫번째 장에서 보여주신 행동을 보고 바로 알아차려 버렸으면 경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질문자가 그렇게 물어준 덕분에 오늘 많은 사람이 법문을 듣는 거예요.”

 

 

명상을 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명상은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요?"

(Meditation is a way to deal with stress and negative feelings. That is important, but shouldn't we focus more on removing those stressors and negative influences from our lives?")

 

, 그렇습니다. 있는 병은 치료하고, 병이 들지 않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그처럼 수행은 있는 괴로움은 없애고 다시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면 우리 마음속에 이미 쌓인 트라우마나 스트레스를 없애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명상을 하면서 느낌이나 마음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면 다시는 화나 짜증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한번 분석해 보세요. 첫째, 욕망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욕구에 사로잡힐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둘째, 기분이 좋다, 나쁘다, 누군가가 좋다, 밉다, 기쁘다, 슬프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셋째,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는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괴로움이 생겨요. 이 욕망, 감정, 시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괴로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괴로움이 일어났다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 감정, 시비가 일어나는 마음에 늘 깨어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알아차림을 통해서 존재의 성질까지 발견해야 합니다.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지는구나!’ 하는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해요. 또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도리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식이나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관찰을 해서 경험으로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하는 대상이 무상하고 무아인 걸 알아 집착할 바가 없음을 깨달으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호흡을 배로 느끼면 안 되나요?

"호흡을 코끝에서만 느껴야 하는 건지요? 저는 명상할 때 호흡의 흐름과 느낌을 배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

 

"Does it have to be the breathing sensation at the tip of the nose? As for me, it's easier and more natural to observe the flow of the breath and its sensations in my stomach area when I meditate."

 

, 호흡은 코끝에서 느낄 수도 있고, 기관지나 배에서도 느낄 수가 있어요. 어쩌면 배로 호흡을 제일 쉽게 느낀다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숨이 들어오면 배가 부풀어 오르고 내쉬면 꺼지잖아요. 횡격막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동작이 가장 크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호흡을 배에서 관찰하도록 가르치는 곳도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의 목표는 호흡 알아차리기를 통해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호흡은 점점 부드러워집니다. 콧구멍 주위에서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면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요. 물론 호흡을 통해서 알아차리는 미세한 감각은 촉각인데, 감각은 촉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미각도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감각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느낌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할 때는 반드시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다. 또 그 느낌이 일어나면 뒤따라서 마음이 일어나요.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는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들의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인데, 집착의 원인은 욕망이나 감정, 시비심이에요. 그래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수단으로 호흡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다른 곳보다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는 것이 감각이나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 비교적 유용합니다. 그래서 콧구멍 끝에서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려라!’ 이렇게 거듭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걸으면서 수행할 수 있고, 서서나 누워서도 할 수 있는데, 앉아서 할 때 제일 집중도가 높습니다. 물론 충분히 연습했다면 움직일 때도 알아차림이 가능하지만 앉아서 할 때가 비교적 집중이 잘 되기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기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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