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을 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명상은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스트레스나 부정적인 영향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더 집중해야 되지 않을까요?"

(Meditation is a way to deal with stress and negative feelings. That is important, but shouldn't we focus more on removing those stressors and negative influences from our lives?")

 

, 그렇습니다. 있는 병은 치료하고, 병이 들지 않도록 예방해야 합니다. 그처럼 수행은 있는 괴로움은 없애고 다시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면 우리 마음속에 이미 쌓인 트라우마나 스트레스를 없애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명상을 하면서 느낌이나 마음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면 다시는 화나 짜증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한번 분석해 보세요. 첫째, 욕망입니다. 무엇을 하고 싶다, 하기 싫다는 욕구에 사로잡힐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둘째, 기분이 좋다, 나쁘다, 누군가가 좋다, 밉다, 기쁘다, 슬프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히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셋째,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는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킬 때 괴로움이 생겨요. 이 욕망, 감정, 시비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괴로움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괴로움이 일어났다면 이 세 가지 중에 하나일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 감정, 시비가 일어나는 마음에 늘 깨어 있다면 우리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알아차림을 통해서 존재의 성질까지 발견해야 합니다.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지는구나!’ 하는 무상의 도리를 알아야 해요. 또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도리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식이나 생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실제로 관찰을 해서 경험으로 알아차리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하는 대상이 무상하고 무아인 걸 알아 집착할 바가 없음을 깨달으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호흡을 배로 느끼면 안 되나요?

"호흡을 코끝에서만 느껴야 하는 건지요? 저는 명상할 때 호흡의 흐름과 느낌을 배에서 관찰하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럽습니다. "

 

"Does it have to be the breathing sensation at the tip of the nose? As for me, it's easier and more natural to observe the flow of the breath and its sensations in my stomach area when I meditate."

 

, 호흡은 코끝에서 느낄 수도 있고, 기관지나 배에서도 느낄 수가 있어요. 어쩌면 배로 호흡을 제일 쉽게 느낀다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숨이 들어오면 배가 부풀어 오르고 내쉬면 꺼지잖아요. 횡격막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는 동작이 가장 크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호흡을 배에서 관찰하도록 가르치는 곳도 있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을 목표로 한다면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의 목표는 호흡 알아차리기를 통해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호흡은 점점 부드러워집니다. 콧구멍 주위에서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리면 미세한 느낌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요. 물론 호흡을 통해서 알아차리는 미세한 감각은 촉각인데, 감각은 촉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미각도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감각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느낌이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생각할 때는 반드시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다. 또 그 느낌이 일어나면 뒤따라서 마음이 일어나요.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는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들의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인데, 집착의 원인은 욕망이나 감정, 시비심이에요. 그래서 느낌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수단으로 호흡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다른 곳보다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는 것이 감각이나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데 비교적 유용합니다. 그래서 콧구멍 끝에서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려라!’ 이렇게 거듭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걸으면서 수행할 수 있고, 서서나 누워서도 할 수 있는데, 앉아서 할 때 제일 집중도가 높습니다. 물론 충분히 연습했다면 움직일 때도 알아차림이 가능하지만 앉아서 할 때가 비교적 집중이 잘 되기 때문에 좌선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기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콧구멍 끝에서 호흡 알아차리기를 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세 가지 방법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째,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대한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집착합니다. 만약 이 욕구에 집착을 하지 않는다면 그냥 무엇이든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조금만 먹으면 됩니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몸을 가리기 위해 옷을 입고, 잠시 정신적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을 잡니다. 이렇게 가볍게 생각한다면 사실 평생을 헐떡거리면서 살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고 '먹지 마라’, ‘입지 마라’, ‘자지 마라' 이런 뜻이 아니에요. 그저 형편 되는 대로 하면 되지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안 되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아예 다 버려버리라고 하신 거예요. 밥은 얻어먹고, 옷은 얻어 입고, 잠은 나무 밑에서 자는 식으로 아예 탁 끊어버리면 더욱 편안해집니다. 재가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굳이 먹고 입고 자는 것을 갖고 시비할 필요가 없어요. 이렇게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둘째,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是非)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네가 그르다 하는 온갖 시비로 인해 미움이 생기고 좌절과 절망이 생깁니다. 이기면 우쭐함과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기고, 지면 기가 죽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너무 따지는 시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번뇌의 대부분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직장생활이든 가정생활이든 가족관계든 동료관계든 옳다 그르다하는 시비를 내려놓는 자세를 가져 보세요. 여러분들은 그래도 시비를 따져야 하지 않냐생각하겠지만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사실 별 거 아니에요. 꼭 그걸 따져서 이긴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옳고 그름이란 그때뿐이지 지나 놓고 보면 별 거 아닙니다. 시비를 내려놓으라고 부처님이 간곡하게 말씀하셨잖아요.

 

셋째, 자기의 감정에 너무 놀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괴롭다, 즐겁다 등 감정에 너무 매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해요. 이것만 여러분들이 일상에서 잘 관리해 내면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참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고 집착하지 않으면 누구나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정진하는 이유도 일상에서 이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침 정진만 한다고 모든 게 저절로 되는 게 아니에요. 일상에서 직접 연습해보고, 안 되는 것은 돌이키고 살펴서 다시 다짐하는 것이 아침 정진입니다.”

 

오늘은 불기 2565년 부처님이 열반하신 날입니다. 열반하신 날을 맞아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같이 살펴보면 좋겠어요.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

부처님께서는 사라나무 숲에 들어가셔서 그 숲 속에 자리를 깔고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리라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경전에는 그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사라나무는 때가 아닌데도 꽃을 피웠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서 아난존자가 이게 도대체 어떤 일입니까?’ 하고 부처님께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저 하늘의 신들이 여래에게 마지막으로 올리는 공양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서 올리는 제1의 공양이 아니다. 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걸 꼭 우리가 명심해야 됩니다. 어떤 신비한 현상도 수행 정진하는 것에 비교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저녁에 여래가 열반에 드니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여래를 마지막으로 친견(親見)할 사람이 있으면 하라고 해라.’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 아쉬워하지 말고 그전에 보고 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난다가 마을에 가서 얘기를 하고 돌아오는데, 아난다는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25년이나 모셨고 늘 함께 했던 위대한 스승이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드신다고 하니 아무리 수행자라 하더라도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숲 속에 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옆에 있는 수행자에게 아난다를 불러오게 합니다. 그리고 아난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난다는 참으로 지난 25년 동안 나를 위해서 시봉(侍奉)을 잘했다. 입안의 혀처럼 잘했다. 잔소리할 것 없이 딱 때를 알아서 가까이 있어야 할 때는 가까이 있고, 떨어져 있어야 할 때는 떨어져 있고,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는 맞이하게 하고, 여래가 정진을 할 때는 만나지 않을 수 있게 거절을 하고, 그렇게 시봉을 아주 잘했다.

 

그러나 아난다여, 생겨난 것은 다 소멸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이치이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늘 그것을 너에게 가르치지 않았느냐?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지금 너희 곁을 떠나지만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희 곁에 남아 있으리라. 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마라. 내가 없는 동안에 나의 가르침인 경과 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모두 불러 모아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열반에 들 텐데 지금 물을 게 있으면 물어라. 여래가 열반에 든 뒤에 '그때 물어볼 걸' 하고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러니 물을 게 있으면 지금 물어라.’

 

아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벗이 벗에게 묻 듯이 부담 갖지 말고 물어라.’

 

또 대답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을 얘기해도 아무도 묻지 않으니 아난다가 말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무런 의문이 없습니다. 그러니 편안하게 열반에 드십시오.’

 

이렇게 해서 대중들이 밖으로 나오자 부처님께서는 선정(禪定)에 들어서 편안하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위대한 스승이 남기고 간 것 세 가지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육신은 그 명을 다했지만, 이 세상에는 그분의 말씀이 경()으로 남았고, 행은 율()로 남았고, 마음은 선()으로 남았습니다. 선불교는 이심전심이라 해서 말과 행동보다는 마음을 중요시합니다. 남방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경을 중요시합니다. 율종은 부처님의 행을 중요시합니다. , 부처님이 살아가신 모습, 실천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들은 각각 나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마음, 부처님의 말씀, 부처님의 행위 이 세 가지 모두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장님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 만지고 이렇다주장하듯이 부처님이 살아가신 삶의 흔적을 한 부분만 갖고 주장하기보다는 그분의 마음, 말씀, 행위를 총체적으로 본받아서 행해 나가야 합니다. 선정만 닦을 것이 아니라 계행(戒行)도 철저히 지켜야 하고, 계행만 닦을 것이 아니라 말씀도 잘 알아서 지혜를 증득해야 됩니다. 계정혜 삼학을 다 함께 닦아 나가야 합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가 수행자입니다.”

 

법문을 끝마칠 무렵 스님은 8일 동안 꾸준히 정진을 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나서 이제 8일 출가열반 특별정진도 법당이 아닌 각자 자기 방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하는 것이 수행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수행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한결같이 해야 합니다. 법당이 있으면 법당에서 하고, 법당이 없으면 집에서 하고, 집도 없으면 밖에서 하고, 숲에 가면 숲에서 하고, 나무 밑에 가면 나무 밑에서 하고, 교회에 가게 되면 교회에서 하고, 외국에 나가 있으면 성당에서 하면 됩니다.

 

 

'마음이 청정하면 수행자요. 수행자가 머무르는 곳이 도량이요. 이것이 불교다.'

 

이것이 정토회의 모토입니다. 그러니 각자 자신의 개인 법당에서도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딱 정착이 돼야 정토회가 확산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흐지부지 되면 정토회는 축소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그렇게 수행을 강조했는데도 이렇게 평가가 될 겁니다.

 

결국 정토회도 신앙에 불과했구나. 법당이 있고 불상이 있을 때는 수행을 좀 하는 것 같더니 집에서 수행하라고 하니까 흐지부지 되는구나

 

정진을 안 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요? ‘집에서 무언가를 빈다고 해서 복이 오나이런 마음이 들어서 정진을 안 하는 거예요? 우리는 복을 비는 자가 아니라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속 가능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수행자입니다. 열반의 마지막 모습에서 부처님이 시종일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명상은 자신만 살피는 이기적인 행동 아닌가요?

“명상은 주로 자신만 살피는 이기적인 노력이 아닌가요? 명상보다 남을 도와주거나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Is meditation primarily a selfish endeavor? Would the time spent in meditation be better spent helping others and doing good actions?)

 

선행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남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일입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면 자기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명상을 하는 이유는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해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기 때문에 인생이 힘들면 주로 남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신이나 다른 존재에게까지 빕니다. 수행은 자기의 힘으로 괴롭지 않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데 사용하지 않게 되면 그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어요. 질문자가 말한 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비유를 들어볼게요.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어깨에 무거운 짐을 메고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길을 간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다른 곳을 쳐다볼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무거운 짐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항상 누군가가 내 짐을 좀 들어줬으면’, ‘나를 좀 도와줬으면하는 마음으로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게 되면 나는 길을 가볍게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를 살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간다면 나누어 들어줄 수도 있습니다.

 

내 짐이 무거우면 다른 사람의 짐이 무거운 지 알 수도 없고, 설령 알게 되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내 짐이 너무 무거워서 도와줄 여력이 없어요. 그러나 내 짐이 가벼워지면 주위를 살필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남을 도우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자기 짐이 가벼워지면 저절로 남을 돕게 됩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면, 아직도 자기 짐이 무겁다는 뜻이에요. 괴로워하면서 남을 돕는 것은 남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자기 인생에는 의미가 없어요. 수행은 자리이타(自利利他)’입니다. 나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고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지나간 일은 다 망상입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도 다 망상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들숨과 날숨만이 현재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기로 했으면 호흡만이 현재 집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감각을 알아차리기로 했으면 감각만이 현재 집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화두에 집중하기로 했으면 화두만이 현재 집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호흡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들숨을 들숨인 줄 알고, 날숨은 날숨인 줄 아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은 다 망상입니다.

 

모든 긴장을 풉니다. 잘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안 된다고 실망하고 포기하지도 말고, 되면 계속하고 안 되면 다시 합니다. 다만 꾸준히 할 뿐입니다. ‘잘 된다’, ‘안 된다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자전거에서 넘어지는 것이 곧 탈 수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고 했지만 긴장한 사람이 있을 겁니다. 애쓰지 말라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애쓴 사람도 있을 거예요. 집중이 안 되어도 실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실망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과거 기억이 떠올라도 의미부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과거를 계속 회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따라가지 말라고 했지만 계속 미래를 구상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호흡만 또렷이 알아차리라고 했지만 집중이 안 되고 자꾸 생각이 다른 데로 간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럼 가르친 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명상을 잘못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명상을 하는 과정입니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타는 사람이 자전거 타는 연습을 할 때 계속 넘어지는 것과 같아요. 처음에는 누구나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몇 차례 넘어지다 보면 조금씩 탈 수 있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어도 완전히 잘 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지는 횟수가 적어질 뿐이에요. 이렇게 점점 자전거에 익숙해져 가는 겁니다.

 

그것처럼 여러분들도 지금 명상을 연습하는 중이에요. 명상을 하는 과정에 많은 장애가 생겨나지만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 나가야 합니다. 너무 애를 쓰면 지쳐서 포기하게 되니까 한가하고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지치지 않아야 계속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하다 보면 점점 나아집니다.

 

 

일상을 명상처럼

여러 방해 요소가 있는 가운데 호흡 알아차림이 유지된다는 것은 누가 비난을 할 때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빙긋이 웃을 수 있을 정도로 나의 일상이 변해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옛날에는 실망했는데, 명상을 통해 이런 연습을 자꾸 해나가면 안 되면 다시 하면 되지!’ 하면서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하는 힘이 생깁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명상을 할 때처럼 내가 원하지 않는 방해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가 편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명상입니다.

 

때로는 내가 상황에 적응하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주어진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 내가 능동적으로 대응을 해나가야 합니다. 안 된다고 괴로워하지도 않고, 원하는 것이 된다고 들뜨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주어진 조건들을 내가 감당해 나가는 겁니다. 앉아서 명상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에요. 명상을 통해서 일상을 명상할 때처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릎이 아파서 108배를 하기 힘들어요

(제가 무릎이 좀 안 좋아서 108배와 바닥에 앉아서 하는 명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명상은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으로 조정을 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은지 묻고 싶어요. 그리고 108배는 서서 반배하는 것으로 108배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괴로움이 없는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떤 철학적 논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믿자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천당을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다음 생에 부자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아무런 번뇌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가볍게 살 수 있느냐는 것이 목적입니다. 지나간 어제 얘기도 아니고, 다가올 내일 얘기도 아니고, 지금 내가 어떠냐가 중심입니다.

상대가 나를 비난할 때도 내가 편안한가? 겨울인데도 내가 편안한가? 여름인데도 편안한가? 오늘 먹을 음식이 없어도 편안한가? 누가 위협을 해도 두려움이 없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편안하게 사물을 대할 수 있는가? 내가 늙어도 편안한가? 내가 병이 들어도 편안한가?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이할 때도 편안한가?

어떠한 경우에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나머지는 거기에 가기 위한 수단들입니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큰 장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장애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장애는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하는 우리들의 욕망입니다. 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해야 될 상황인데 하기 싫다고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들의 욕망이라는 것은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이 두 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해도 될 때가 있고, 하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욕망과 바깥 상황을 결합시키면 네 가지 경우의 수가 나옵니다. 내가 하고 싶고, 상황도 해도 괜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습니다. 하기 싫은데, 상황도 하지 말아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이때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특별하게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는 하게 되면 손실이 따릅니다. 반대로 하기 싫은데 해야 될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 하기 싫다고 안 하게 되면 손실이 따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겁니다.

비만에 걸린 사람은 먹고 싶은 대로 음식을 먹으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그래서 먹고 싶더라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음식에 독성이 있다면 그걸 먹게 되면 건강을 해칩니다. 즉 먹고 싶다고 먹으면 손실이 생깁니다.

앞에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진 남자가 있습니다. 그와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걸 하게 되면 성추행이 됩니다. 그 결과 비난을 받거나 감옥에 가게 됩니다. 그때는 포옹하고 싶더라도, 손을 만지고 싶더라도, 만져서는 안 됩니다.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에요. 하고 싶지만 손실을 가져오는 것은 멈추는 게 나한테 이익이라는 겁니다. 욕망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욕망을 무조건 따라갔을 때 큰 손해를 초래한다는 거예요.

어리석은 사람은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를 해치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인을 기준으로 볼 때는 나쁜 행동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불교는 주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보기 때문에 자기에게 해가 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고 표현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이 좋아 보이고, 하고 싶지만, 손해를 가져오는 과보를 미리 알기 때문에 하고 싶지만 그것을 멈춥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첫째, 나에게도 해를 끼치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도 있습니다. 둘째, 타인에게 해를 안 끼치고 나만 해를 끼치는 것이 있습니다. 비만인데도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에요. 나만 해칩니다. 그러나 다른 이를 껴안는 것은 나에게도 손해이고, 타인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이에요. 즉,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은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세요?”

“그러면 나에게도 나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신가요?”

“나에게 하는 행동은 나쁜 행동이라고 하지 않고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손해 끼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에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행동에 들어가지만, 나를 죽이는 자살은 어리석은 행동에 들어갑니다. 나를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은 행동 안에 남에게도 손해가 되는 나쁜 행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쁜 행동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기를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은 아무리 하고 싶어도 멈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멈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손해를 보는 거예요. 그것을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설령 참아서 행동을 멈추면 멈췄다 하더라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한테 손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버리면 행동을 멈출 때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비록 하기 싫어도 이익이 된다면 하기 싫은 것도 능히 할 줄 알아야 됩니다. 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손실이 따르고, 하기 싫지만 행하면 이익이 된다면, 하기 싫음에 구애받지 않고 능히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욕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저절로 해결되지만,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욕망에 끌려가서는 안 됩니다.

아침에 5시에 일어나서 매일 기도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막상 일어나기 싫다면, 그때는 일어나는 게 수행입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그때는 일어나는 게 수행입니다. 절을 하기로 했는데 절하기가 싫다면, 그때는 절을 하는 게 수행입니다. 절이 핵심이 아니라 하기 싫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수행의 핵심입니다.

몸이 건강하고 다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단지 하기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절을 안 하면 수행이 아닙니다. 절을 한다고 해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사실은 육체적으로 따져도 절을 하는 것은 운동이 되기 때문에 하면 좋은 일입니다. 그럴 때는 싫어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다리를 다친 것이라면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절을 하게 되면 다리를 더 다치게 되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럴 때는 절을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몸을 다쳐서 안 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명상을 한다, 절을 한다, 염불을 한다, 이렇게 어떤 특정한 형식을 갖고 수행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수행이란 하고 싶거나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해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느냐. 어떻게 어리석음을 깨우치느냐. 그래서 두려움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느냐. 거기에 도움이 되면 수행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수행이 아닙니다.

다만 다리가 아픈 정도가 의학적으로 봤을 때 절을 하면 안 되는 상태인지, 오히려 천천히 절을 함으로 해서 재활치료 효과가 나서 도움이 되는지, 이것이 정확하게 규명이 되어야 해요. 명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다 처음 가부좌를 하면 다리가 아프고, 허리도 아픕니다. 그 통증을 이겨냄으로 해서 자세가 오히려 더 교정이 되고 좋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정말 허리를 다쳐서 그렇게 하면 몸 자체에 잘못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요. 이것이 정확하게 규명이 되어야 ‘의자에 앉아서 하세요’, ‘절을 하지 마세요’ 이렇게 답변을 해줄 수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절을 하거나 앉아서 명상하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이가 57세이고, 지난 5년 동안은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무릎이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데, 물리치료를 받고 나면 괜찮아졌다가 다시 안 좋아지고를 반복합니다. 아마 제 나이 때문에 관절염이 있는 것 같아요.”


“절을 하거나 가부좌를 꼭 해야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얘기하는 거예요. 반대로 다리가 조금 아프다고 해서 ‘의자에 앉아서 하겠다’, ‘절을 하지 않겠다’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제가 10년 전에 LA에서 명상을 지도할 때였습니다. 60대 넘은 남자분이 수련에 참가했는데, 자기는 허리를 다쳐서 땅바닥에 앉지 못한다고 해요.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는데 그때 허리를 다친 이후로 한 번도 땅바닥에 앉아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자에 앉아서 명상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하루만 바닥에 앉아서 해 보고, 도저히 안 되면 그때 의자에 앉도록 해줄 테니까 오늘 첫날은 바닥에 앉아서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통증 때문에 너무 아프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가부좌를 풀고 있어도 계속 아파요?’
‘가부좌를 풀고 나면 조금 덜 아픕니다.’

그래서 하루만 더 해보자고 했습니다. 이튿날은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일어나도 계속 아파요?’
‘일어나면 조금 덜 아픕니다.’

그래서 하루만 더 해보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호소하면서 5일 명상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끝날 때 이렇게 말했어요.

‘지난 30년 동안 한 번도 바닥에 안 앉아봤는데 이제는 바닥에 앉아도 되겠어요’


이분은 재활치료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어요. 처음에는 엄청나게 저를 미워하다가 갈 때는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했습니다. 고통은 멈춰야 할 게 있고, 이겨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먼저 진단을 받아야 해요. 관절이 닳았다든지, 엉덩이뼈가 어긋났다든지, 이런 구체적인 진단이 나오면 그에 맞게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절하는 속도를 늦추든지, 방석을 조금 높이든지, 약간의 조정만 하면 됩니다.

절이나 명상 자세가 핵심이 아니에요. 질문자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핵심입니다. 앞으로도 극복해야 될 것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자꾸 피해 가면 결국은 열반에 이르기까지 가기가 어려워집니다.

몸에 문제가 있으면 절을 안 해도 돼요. 서서 반배하는 그런 형식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행이란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을 하는 대신 다른 수행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천천히 절을 한다든지, 방석을 하나 더 놓는다든지 했을 때 괜찮다면, 조금 통증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절을 해야 한다고 집착해도 안 되고, 절이 수행이냐며 절을 안 해도 안 됩니다. 몸이 다쳤는데 절을 해야 된다고 집착하면, 그것은 절을 해도 수행이 아니에요. 몸이 괜찮은데 조금 통증이 있다고 해서 절을 안 하겠다면 그것 또한 수행이 아닙니다. 만약 티베트 식으로 절을 했을 때 무릎이 괜찮다면, 티베트 식으로 절을 하셔도 됩니다.


얘기가 좀 길어졌네요. 이 분의 질문을 통해서 수행이 무엇인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중도, Middle way입니다. 수행하는 목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이 법을 이해하고 실천해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먼저 약을 먹고 나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픈 사람을 보면 내가 이 약을 먹고 나았으니 당신도 한번 먹어 보라고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쉽고 명확합니다. 이 길이 굉장히 멀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여러분이 자기가 가진 습관, 욕망을 딱 움켜쥐고 안 내려놓으려 하기 때문이에요. 아침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어제 몇 시에 잤든지 따지지 말고 싹 일어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싫은 것도 능히 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것도 딱 멈출 줄 알아야 합니다. 근데 좋고 싫음에 매여서 ‘싫은데 어떻게 해. 좋은데 어떻게 그만둬.’하고 전전긍긍하면 아무리 불교를 많이 알아도 해탈은 못 합니다. 자기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훨씬 가볍고 밝아집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날입니다. 출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부처님의 출가를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출가의 의미

출가라는 말은 집을 나왔다는 뜻입니다. 초기 경전에는 집 있는 곳에서 집 없는 곳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이런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이 무엇을 뜻할까요? 집 안에 있으면 안온합니다. 집 밖으로 나가면 보호받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난 사람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집은 비를 막아주고 햇빛을 막아주고 바람을 막아주고 냉기를 막아주고, 외부의 조건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곳입니다. 집을 떠나면 외롭고 쓸쓸해집니다. 그래서 집은 안온하고 보호받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집은 굴레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 부모로부터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자꾸 집을 나가려는 겁니다. 집을 나간 사람들은 집이 속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은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통을 가져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집 없는 곳으로 나아갔다하는 이 말은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온한 집을 추구하지만, 그 집으로 인해서 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여러분들은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는 동시에 속박을 받습니다. 결혼을 하면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보호를 받는 동시에 속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집을 나오게 됩니다.

 

가출과 출가의 차이

그러면 가출출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가출은 이 집이 마음에 안 들어서 더 좋은 집을 찾아 집을 나오는 것을 뜻합니다. 속박이 있는 집을 뛰쳐나와서 속박이 없는 집을 찾아다니는 거죠.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집은 없으니까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가출은 반복이 됩니다. 집을 나가면 외롭고, 다시 집에 들어오면 답답하고, 그래서 들락날락하게 돼요.

 

출가란 집이 안온함도 있지만 속박의 근원임을 직시하는 겁니다. 마치 욕망이 충족되면 즐겁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롭고, 그래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것과 같습니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사실은 괴로움입니다. 욕망이 충족되어 즐거운 것도 더 크게 보면 그것조차 괴로움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출가입니다. 집은 안온함과 속박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갖고 있는데, 어리석은 중생은 속박은 없애고 안온함만 가지려고 합니다. 속박이 싫어서 집을 나갔다가 안온함을 찾아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집이 속박임을 알고 집을 불태워버립니다. 더 나은 집을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고 집 자체를 버려버립니다. 그래서 모든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더 이상 새로운 집을 찾지 않는 것이 출가입니다. 집에서 뛰쳐나왔다고 해서 무조건 출가가 아니에요. 그건 가출입니다. 출가란 안온함이 곧 속박이라는 것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자석에서 S극을 갖고 싶지 않아서 반으로 자르면, S극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N극에서 다시 S극이 생깁니다. 그것처럼 고와 락을 나누면 락에서 또 고가 생깁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락이 곧 고라는 것을 꿰뚫어 아셨습니다.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즐거움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안온함과 속박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갖고 있는 집을 완전히 떠난다는 것은, 속박을 버릴 때 안온함도 같이 버린다는 뜻입니다. 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천당도 같이 버려야 합니다.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래서 집을 버리기 위해서는 집이 굴레라는 것을 정확히 꿰뚫어 알아야 해요. 다른 집을 찾는 것이 아니고 집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과 같은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돈에 의지하면서 돈에 속박을 받습니다. 권력에 의지하면서 권력에 속박받습니다. 명예에 의지하면 명예에 속박받습니다. 남편과 아내에게 의지하면서 남편과 아내에게 속박받습니다. 부모에게 의지하면서 부모에게 속박받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속박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의지처를 버려야 합니다. 오직 의지할 만한 것은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부처님의 법입니다. 나머지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할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에 의지해야지 법이 아닌 것에는 의지하지 말아라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설령 법이라 해도 그것은 마치 뗏목과 같다. 강을 건널 때는 뗏목을 이용하지만,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고 가야지 뗏목을 메고 가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비록 부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본질적 의미를 꿰뚫어 알았으면 그 말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법도 버려야 할지언정 법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 금강경의 요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박의 근원이 되는 것에 늘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순간적인 안온함을 찾지만 결국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출가입니다. 비단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거의 관습, 윤리, 도덕, 계율, 이런 정신적인 것들도 모두 우리를 속박하는 요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내 마음대로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속박의 뿌리는 욕망입니다

왜 집이 속박이 될까요? 집이라는 건물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더 깊이 들어가면 속박의 뿌리는 욕망입니다. 속박의 뿌리는 부모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거기에 묶여 있게 만드는 나의 욕망입니다. 돈에 대한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인기에 대한 욕망, 음식에 대한 욕망, 그런 욕망들에 묶여 있기 때문에 속박을 받게 되는 거예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집에 있어도 구애받지 않게 되고, 가족이 있어도 구애받지 않게 되고, 재물이 있어도 구애받지 않게 되고, 권력이 있어도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출가는 해탈로 나아가는 첫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법문을 듣고 탁 깨쳐서 돈과 명예, 직장을 다 던져버리고,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결단을 하는 사람만 수행자라고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결단을 한 사람을 출가수행자라고 말했고, 그중에 남자는 비구’, 여자는 비구니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세속에 몸을 두고, 장사도 하고, 가족과 함께 살면서도 욕망을 버린 사람을 재가 수행자라고 말했습니다. 그중에 남자는 우바새’, 여자는 우바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바새와 우바이 중에서도 성인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모두 다 그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집을 안 나오더라도 집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합니다. 자식을 두더라도 자식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더라도 직장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출가일을 기념하는 방법

집착을 버리는 방법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이 법문을 듣는 즉시 조용히 집 없는 곳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집이 있고 없고, 가족이 있고 없고, 이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내가 앉은 이 자리가 바로 법당이라고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정진을 하셔도 됩니다. 지금까지는 온갖 욕망과 집착의 공간이 집이었다면, 앞으로는 집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수행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남편이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이 되고, 부모도, 자식도, 직장동료들도 모두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 결단을 오늘 출가일을 맞이해 한 번 내려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정도의 결단은 내려야 출가일을 기념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너무 많은 요구를 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서 정토회에 모였지 다른 목적으로 모인 건 아니잖아요. 그런 관점에서 출가일부터 열반일까지 8일 동안 용맹정진을 해봅니다. 8일 동안 완전히 환골탈태해서 열반일에는 제가 법문 할 것이 없어서 죽비만 세 번 치고 법회를 끝낼 수 있도록 그렇게 정진해 보시기 바랍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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