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시작한 지 8주가 되었으니까 56일이 지났네요. 백일 중 절반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3일이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56일간 꾸준히 수행을 하셨으니 장한 일이에요.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내 마음의 습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한국에는 콩으로 만든 된장이라는 게 있는데요. 한국 사람은 보통 이 된장 냄새를 맡으면 바로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된장 냄새를 맡으면 역겨워서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된장 그 자체가 역겨운 게 아니라 살아온 습관에 의해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냄새가 역겨워도 몸에 좋으니까 먹어야 한다또는 너무 먹고 싶지만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건 생각이에요. 이때 의지가 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먹지 않거나, 먹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먹습니다. 그러나 의지로 마음을 억누르면 사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의지가 꺾입니다. 그래서 각오하고 결심해서 시작했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도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절을 하면 좋다고 하니까 시작을 했지만 과거에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저항이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수행이란 절을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에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에 종속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 습관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하면 몸에 밴 습관이든, 생각의 습관이든, 마음의 습관이든, 나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은 능히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을 무조건 참고 의지로 억누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계까지 가야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습관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동으로 늘 좋고 싫은 감정, 하고 싶고 하기 싫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감정과 욕구에 매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감정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 다음 생에 태어나서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괴로우냐, 안 괴로우냐가 핵심 과제예요. 지금 내가 괴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중요해요.

 

 

지금 괴롭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괴롭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는 내생이 있든지 없든지 윤회를 하든지 안 하든지 지옥 가든지 천당 가든지 이런 것이 도무지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생이나 윤회는 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나온 관념들입니다. 수행을 하면 인생에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과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음의 실체가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무슨 뜻인가요?

“스님을 뵙고 저는 불교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공사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수행문에도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에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나요? 저와 같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서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로 가는 길

예를 들어 시카고를 간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시카고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질문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실 겁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쪽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하실 거예요. 질문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방향이 다 다릅니다. ‘그럼 시카고로 가는 방향은 도대체 어느 방향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는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정해지려면 질문자의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면 방향이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있다면 서쪽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질문자의 위치에 따라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질문자의 대화를 모아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어떤 경전에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 동쪽, 어떤 경전에는 서쪽, 어떤 경전에는 북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전을 두고 어느 방향이 맞는지 논쟁을 하거나 어느 방향이 더 좋은지 논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대에 많은 학파와 종파가 나누어진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 질문하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냐를 고려하지 않고 시카고로 가는 절대적인 하나의 방향을 자꾸 주장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는 언제나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든 부처님은 그 질문자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길을 인도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면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입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다면 방향은 동쪽으로 정해집니다. 애틀랜타에서 출발한다면 북쪽으로 정해집니다. 방향은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그것일 뿐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컵과 컵 받침대를 보십시오. 제가 있고, 컵이 있고, 컵 받침대가 있습니다.

 

 

컵은 받침대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컵은 법륜스님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Nothing.”(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 컵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질문을 바꿔서 이 컵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이 컵은 비쌉니까? 쌉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를 하면 이 컵은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하기도 하고, 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크다 작다, 비씨다 싸다, 가볍다 무겁다는 성질은 컵에 있는 거예요? 내가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 인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을 한 건데, 컵 자체가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했다고 보고 컵이 작은 게 사실이라고 객관화시켜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 옳고 그른 시비 분별은 다 내가 일으킨 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컵을 작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이 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는구나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누구는 시카고 가는 길이 동쪽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쪽이라고 하면 어느 게 맞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서쪽이라고 하면 , 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고 동쪽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보스턴에 살고 있구나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는데 이해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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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

 

기도 잘하셨습니까? 요즘 우리는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Sutta Nipāta)를 독송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주로 분노와 탐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집착하고 내 것에 집착합니다. 내 견해에도 집착합니다. 내 견해가 옳다고 집착하면 분노가 일어나고, 내 것에 집착하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에게 집착하면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경전에는 이런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이 생기는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자기 견해를 고집할 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라고 집착하는 거죠. 종교 간 분쟁도 믿음에 대한 집착이 근본 원인입니다. 둘째, ‘생각입니다. 자기가 사유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거예요. 학문적 논쟁이나 정파적 갈등은 생각에 대한 집착이 근본 원입니다. 셋째, 좋고 싫은 자신의 감정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견해에 집착을 하면 논쟁을 하고, 상대를 비난하고 화를 냅니다. 논쟁에서 이기면 교만해지고, 논쟁에서 지면 기가 죽어요. 자기 견해에 집착을 하면 이렇게 여러 가지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특히 자기가 경험하고 믿고 아는 것만이 옳다는 집착이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부처님 살아계신 당시에도 육사외도, 62견해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기의 주장은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틀렸다고 논쟁을 했습니다. 심지어 상대를 비난하고 해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부처님도 모함을 많이 받으셨어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다른 학파의 사람들이 부처님을 시기 질투해서 음모를 꾸미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잘못된 견해에 대해 법문을 하신 적이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기

진리는 스스로 체험해서 검증해야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교리, 경전, 윤리, 도덕, 관습, 습관에 의해서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생겼다면, 먼저 현재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지 알고, 직접 실천해야 해요.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사물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 길 중에서 첫 번째가 정견(正見)이에요. , 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본다는 말은 바르게 안다는 얘기입니다. 바른 앎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바른 앎입니다.

 

 

'삿된 견해'란 잘못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어떤 상황을 인지하고, 같은 상황이 두세 번만 반복되면 ', 이것은 이렇구나' 하고 단정하는 고정적인 관념이 생겨버립니다. 이 고정관념은 일상생활에 편리한 점도 있어요. 그러나 현실이 바뀌면 바뀐 상황을 인식해야 하는데, 먼저 생긴 고정관념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대승불교에서는 '상을 짓는다'라고 말해요.

 

사람들이 견해에 집착하고 싶어서 집착하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나름대로 객관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이게 사실인데 틀린 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장님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면 다 달라요. 코를 만져본 사람은 '뱀같이 생겼다'라고 하고, 귀를 만져본 사람은 '부채같이 생겼다', 다리를 만져본 사람은 '기둥같이 생겼다', 꼬리를 만져본 사람은 '빗자루같이 생겼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 코끼리 이렇게 생겼구나.' 정형화시킨다는 거죠.

 

전체를 보면 틀렸지만, 부분만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경험한 범위에서는 모두 진실인 거예요. 이것을 단견(短見) 또는 편견(偏見)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 경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정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지 또는 연애할 때 이미지를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살아보면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도 보이잖아요.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인데, 사람들은 상대가 '변했다, 배신했다.'라며 갈등하고 괴로워해요.

 

 

늙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젊을 때 자기의 모습이 마음속에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원래 내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나는 이만큼 일할 수 있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는 데도 자기 얼굴을 보면서 '이건 내 얼굴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늙는다고 괴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변한 것을 변한 대로 보지 않고 과거의 생각으로 보니까 늙음이 한탄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일을 할 때도 자기 머릿속 관념과 나이 든 현실이 달라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로움이 생깁니다. 남을 보면서는 '저 사람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잘 들어요. 정작 본인은 늙었다는 말을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늙어도 마음은 다 청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순이죠. (웃음)

 

모든 것은 변화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 항상 나오는 구절 있습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한다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에 딱 다가오지 않죠. 그런데 깨달으면 자기가 안고 있었던 많은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져 버려요. 그래서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하는 말이 '형성된 것은 모두 소멸한다'라고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이것은 마치 덮인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탁 밝혀주심과 같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어느 한 부분에 딱 고정되어있습니다.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는 사물의 한 장면만 딱 포착해서 찍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계속 현실하고 안 맞는 거예요. 그나마 변화가 느리면 덜 혼란스러운데, 변화가 빠르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안과 밖이 안 맞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이 혼란스럽다'라고 이해합니다. 세상은 혼란스러울 게 없어요. 세상은 늘 변하는데 내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거예요. 내가 가진 생각의 틀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늘 변화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야 아무런 편견 없이 현실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에 기초해서 인생을 산다면 괴로울 일이 없어요.

 

숫타니파타(Sutta Nipāta)는 초기 경전이기 때문에 경전의 형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건이 있어서 부처님이 법문을 하셨는데, 그 사건은 없고 법문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즉문즉설을 하면, 그 중에서 몇 구절만 뽑아서 희망편지를 만들어 내보내지 않습니까? 왜 이런 법문을 했는지 배경은 없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있어요. 이런 형식은 법문을 짧게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배경이 없으니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며칠간 경전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해탈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른 종파나 학파에서 계속 부처님을 모함하고 논쟁했던 사건들이 있었던 후에 해주신 법문들이에요. 매일 아침마다 제가 하나하나 해설을 다 못하더라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독송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괴롭지 않게 사는 길

부처님은 인생의 괴로움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인생을 괴롭게 살아갈까?’

 

부처님은 깊은 탐구 끝에 결국 화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지 않고,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괴로움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인도어로 니르바나(Nirvana, 열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본인도 안온하게 사셨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를 해결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르침은 한쪽은 불교라는 종교로 흘러갔고, 다른 한쪽은 불교철학이라는 학문으로 흘러갔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어떤 것을 믿는 종교도 아니고, 사유하는 철학도 아니고, 바로 실천하고 체험해서 자기 삶을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공부는 내 마음을 다스려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엇인지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지금보다 내가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을 강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 속에서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을 한 번 같이 찾아보자는 뜻으로 대화를 해봅시다.”

 

이어서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의 마음의 계절은 다 달랐습니다. 그중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 때문에 괴롭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편이 화가 나면 며칠 동안 말을 안 해요

“제 남편은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말도 많이 하고 농담도 하지만,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며칠이고 말을 안 합니다. 예전에 화가 나면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제가 풀어보려고 말을 걸어봤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편 성격을 알아서 화가 났다 싶으면 반발을 하지 않고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도 기분이 몹시 가라앉습니다. 며칠 지나서 남편이 화가 풀리면, ‘네가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났다’며 다시 말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제 기분이 남편 기분에 따라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죠?”

 

.”

 

 

질문자도 기분이 좋으면 좀 친절해지고, 기분이 나쁘면 말하기 싫어지잖아요?”

 

.”

 

본인이 그렇듯 남편도 똑같아요. 남편도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기분이 나쁘면 며칠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똑같긴 한데 남편이 너무 오래 동안 말을 안 하고 화를 내면 제가 많이 힘듭니다.”

 

오십보백보란 말이 있잖아요. 오십보 가나 백보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얘기예요. 기분이 좋으면 입 안에 있는 것도 내줄 듯이 하고, 기분이 나쁘면 줬던 것도 도로 뺏는 것이 사람입니다. 질문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사람이에요. 사람이니까 화를 낼 줄도 알고, 사람이니까 말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겁니다. 질문자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질문자가 남편을 볼 때, ‘왜 그만한 일에 화를 내고 말을 안 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 자주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질문자를 보고, ‘왜 그만한 일에 괴롭다고 그러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 알겠습니다. 스님께서 예전에 한 즉문즉설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가 말을 하면 개구리가 운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남편을 개구리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죠.(웃음) 개구리 하고 같이 산다고 하면 질문자가 창피하죠. 질문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개구리 하고 살 수준은 넘지 않아요?”

 

, 넘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개구리라고 하면 남편을 욕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 본인을 욕하는 셈이에요. 자기 가치를 좀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편을 볼 때 법륜스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웃음)

 

질문자가 매일 제 법문을 듣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남편 말을 제 말처럼 믿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웃음)

 

노력하면 안 돼요. 항상 이렇게 기도하세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남편이 감정에 기복이 있는 것은 남편이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안 되는 거예요. 남편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내가 남편에 대한 기대가 큰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마음이 좀 언짢은 거예요. 남편이 화도 좀 덜 내고, 갈등이 생겨도 빨리 풀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 주면 좋겠죠?”

 

.”

 

그런데 내 남편이 그만큼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뭐든지 줄 것처럼 하고, 기분이 나쁘면 토라져요. 토라지는 시간이 조금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로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첫째, ‘우리 남편은 사람입니다이렇게 생각하세요.

 

둘째, ‘남편은 사람 중에도 부처님이다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남편의 말을 부처님 말씀을 듣듯이 들으면 남편이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 남자가 부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남편은 부처인 거예요. 남편을 부처로 보면 질문자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기독교인에게 불상은 부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으로 볼 것 같습니다.”

 

불교인에게는 불상이 뭐예요?”

 

부처님입니다.”

 

그 불상이 부처인지 우상인지는 본래 정해져 있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우상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겠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기독교인은 불상을 우상으로 봐도 상관이 없죠. 절에 안 다니니까요. 그런데 매일 절에 다니는 불교인이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면 본인이 불행하겠죠. 다른 사람은 질문자 남편을 나쁜 남자라고 해도 괜찮아요. 같이 안 사니까요. 그런데 질문자는 그 남자하고 같이 살잖아요.”

 

. 평생 같이 살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누구 손해예요?”

 

제 손해입니다.”

 

질문자가 남편과 같이 못 살겠다고 했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예요. 남편 성격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것이 괜찮으니까 같이 사는 거죠?”

 

. 맞습니다.”

 

남편이 건강도 안 좋고, 돈도 못 벌고, 성격도 안 좋고, 애들한테도 잘 못 하고 다방면으로 나쁘다면, 저에게 이런 신세타령을 안 하겠죠. 스님한테 묻지도 않고 벌써 이혼해 버렸을 거예요.”

 

. 벌써 이혼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성격 빼고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남편이 이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한 가지 고치려다가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부처로 볼 거냐 우상으로 볼 거냐 하는 문제와 같아요. 기독교인들이 우상 숭배라고 할 때, 왜 우상이냐고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는 것은 네 자유다. 그래 봐야 네 마음만 허전하지 나는 매일 봐야 되니까 부처님으로 본다라고 하면 돼요. 그처럼 질문자에게 남편은 내가 매일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잖아요. 아이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인 게 좋아요, 나쁜 사람인 게 좋아요?”

 

훌륭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런 마음을 내어보세요. 설령 아이들이 아빠 성격이 문제야이렇게 얘기를 해도, ‘성격 빼고는 다 훌륭한 분이다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누구한테 좋다고요? 남편한테 좋아요, 질문자에게 좋아요?”

 

저한테 좋습니다.”

 

“‘훌륭한 남자하고 산다이런 관점을 가지면 자기에게 자긍심이 생기는 거예요. ‘남자가 성격이 나빠서 잘 삐지고 화를 낸다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저런 사람하고 평생 살아야 되나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남편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성격은 나하고 좀 안 맞지만 다른 건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나하고 안 맞는 거지, 그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행복하려면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내면 질문자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고 남편에게도 좋아요.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예요. 이 좋은 길을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할 때 왜 상대의 성격이나 생활습관은 안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결혼할 때 주로 무엇부터 봅니까? 첫째, 인물을 보죠.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면 인물은 더 이상 안 봐요. 아침에 눈 떠서 남편이나 아내를 딱 보니 인물 때문에 진짜 구역질이 나서 같이 못 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능력을 보죠. 어느 대학을 나왔냐, 월급은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 집안은 어떠냐,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게 능력을 보는 겁니다. 물론 연애를 좀 오래 하면 성격을 보긴 합니다. 그런데 생활 습관은 아예 안 봐요.

 

그런데 같이 살아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생활 습관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딪치는 것이 성격이고 세 번째가 능력입니다. 인물은 아예 해당도 안 돼요. 그러니까 결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보는 조건과 살면서 부딪히는 조건이 정 반대입니다. 같이 살기 좋은 사람보다 보기에 좋은 사람을 골라서 결혼을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같이 살려면 생활 습관이 잘 맞는지가 중요한데 다른 조건만 맞춰보고 결혼을 하니까요.

 

우리 일상도 그렇습니다. 경치 좋은 바닷가나 계곡에 가면 여기 집 하나 지어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한번 살아봐요. 습기도 많고 바람도 많고 소리도 시끄럽고 여러 가지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다고 반드시 생활에 좋은 것이 아니에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을 때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갈등은 대부분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닌 다른 것을 자꾸 문제 삼기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상대를 선택했을 때 인물을 봤다면 평생 인물만 논하고, 능력을 봤으면 평생 능력만 논해야지, 정작 같이 못 살겠다고 불평할 때는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논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남편의 성격을 자꾸 논하지 말고, 남편의 그런 성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요. 남편은 그렇게 생긴 걸 어떡합니까. 남편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남편에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서 정 못 살겠다면 저한테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묻기 전에 알아서 결정을 해버리죠. 저한테 물었다는 것은 남편에게 좋은 점이 많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이런 점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내 마음에 들도록 할까요?’ 이것이 고민이 되어서 묻거든요. 자기 힘으로 안 고쳐지니까 저에게 묻는데, 남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세요. 산에 가면 나무가 많지만 기둥하기에 좋은 나무는 드뭅니다. 목수가 가져와서 필요에 맞게 조금 다듬어야 됩니다. 결혼생활도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지, 딱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룸메이트나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맞춰가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참나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한자로는 실아(實我)라고 표현됩니다.

진실된 나, 참된 나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라는 것을 먼저 자세히 아는게 중요합니다.

""라는 것은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름/명칭!!!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내가 너의 몸을 보고 네 이름을 부르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몸을 보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색수상행식에 과연 실체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이죠.   

(/물질)은 무상한 것이며, 그러므로 苦이고, 또한 無我이며, 空입니다.

수상행식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온도 역시나 실체가 없어서 공한데,

그 실체가 없는 오온에 의지해서 붙여진 ""라는 명칭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

또한 거길 뛰어넘어 <참나>라는 것도 역시나 있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에도 실체가 없는데, <참나>라는게 있을 수 없죠.

""라는 호칭/명칭은 우리 인간세계에서 서로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니,

나 또는 너...라고 서로 호칭을 붙여서 부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임시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야경에서의 부처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5[]이 화합한 까닭에 이름이 나이어서, 실제의 나[實我]는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중생(衆生) 내지 아는 자[知者]ㆍ보는 자[見者]도 모두가 5중의 인연이 화합하여 생긴 임시의 이름[假名法]이니, 이 모든 법은 진실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건만 세간에서는 단지 이름으로만 말하게 되느니라. 보살이나 보살의 이름과 반야바라밀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가 이 인연으로 화합한 임시의 이름이니라

위의 말씀에 나오다시피,

오온이 화합한 것을 나라고 부르는데, 실제의 나(참나)도 역시나 당연히 얻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는 용수보살의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외도들처럼 실아(實我)를 구하고 찾아도 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거짓 이름일 뿐이다.

갖가지 인연이 화합해서 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있을 뿐이다.”

외도들은 ""에 집착하기 때문에 "진실된 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걸 아트만 또는 영혼이라고 부릅니다.

몸과 마음을 떠나서 ""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몸과 마음과 상관없는 제3의 나(영혼/참나)가 있다면, 그것이 과연 나랑 뭔 상관이 있겠습니까?

영원불멸의 나, 즉 참나가 있다면 언제나 변화가 없어야 하므로,

죽지도 못하고 다시 태어나지도 못해야 합니다. 영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변화해가며 태어나고 죽습니다.

그러므로 참나(實我)라는 것은 본래가 없습니다.

왜냐면 <제법무아>라서 실체가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기 때문입니다.

""라는 것도 실체가 없이 그저 이름만 있을 뿐인데,

"참나"라는 것도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또 많이 오해하는 것중에 하나가 불성(佛性)이 있다라는 표현입니다.

불성(佛性)이란 불생불멸을 뜻하며, 이게 곧 입니다.

그러므로 실체로 여길 만한 그 무엇이 있는게 아닙니다.

도 역시나 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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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참나는 무엇인가. / 혜국스님

 

 

 

 

 

어떠한 것이 참나인가. 누가 참나인가.

 

여러분들은 라고 하는 것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 몸에서 영혼이 나가면 눈이 떠집니까?

 

죽은 사람들은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눈이 있지요.

 

있는데 그 사람은 봅니까? 못 봅니까?

 

그럼 눈으로 보는 게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영혼이 다시 몸속으로 들어오면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혼이 나입니까? 이 몸뚱이가 나입니까?

 

영혼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화두 참구법입니다.

 

위궤양이나 간경화를 고쳐주면 의사선생한테 정말 고맙다고 하는데,

 

몸뚱이가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참나를 위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돌아보세요.

 

몸뚱이가 나인 줄 알고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했지만 몸뚱이가

 

나를 지켜 줍니까?

 

늙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늙지, 아프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아프지, 죽지 말라 해도 제 마음대로 죽지, 아무리 내 몸뚱이를 위해봐야

 

결국은 나를 배신합니다.

 

배신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몸뚱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

 

운명의 노예가 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라면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내 몸뚱이 위한다고

 

보낸 시간은 많지만, 내 몸뚱이 썩지 않도록 지켜주는 내 마음을 위해서

 

마음 농사짓는데 바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선 공부는 깨어있는 방법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법문을 듣고 여러분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워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부처를 깨우려면 여러분들 안에 있는 욕망, 시기·질투,

 

번뇌 망상을 화두로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화두는 부처요, 망상은 중생이니 중생부처바꿔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이 부처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 몸뚱이는 60조 개나 되는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무량겁(無量劫) 동안 살아온 우리의 모든 것이 다

 

기록돼 있습니다.

 

그 기록을 우리는 업장(業障)이라 합니다.

 

60조 개나 되는 세포에 기록된 모든 업장이 부처로 바뀌어 가는

 

기간을 교리적으로는 아승기겁이라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나 요원하겠습니까.

 

내가 마음의 눈을 뜨면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쉽다고 하면 쉬운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중생이 부처 되는 것을 쉽다고만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목숨 바쳐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고 보면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라고 하는 벽이 있어서 나와 네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이 법당에도 벽이 있으니 이 방, 저 방, 아랫방이 있는 것입니다.

 

이 벽 다 허물어 버리면 법당도 없고 허공이 되어 버리지요.

 

그럼 그 허공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허공은 변하지 않습니다.

 

허공은 조용필이 부르는 허공과는 다릅니다.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는 시야까지를 허공이라 하는데 진짜 허공은 깨달은

 

사람만이 볼 수 있습니다.

 

내 성품이 허공이지요.

 

아인슈타인은 허공을 본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다

 

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들어오는 허공을 허공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공 자체는 변함없습니다.

 

여러분 마음 부처가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임제 스님도 그것을 깨치고

 

황벽의 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했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깨어지는 소리요, 중생이 부처되는 소리요,

 

참으로 우리를 모두 다 제도하는 소리입니다.

 

내가 깨달으면 천하가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은 눈으로 보면 첩첩산중이 다 부처님 도량이요,

 

만상의 소리가 부처님 음성입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불국토가 사바세계인 것입니다.

 

너무 육신으로 가고, 너무 멀리 갔으니 마음의 고향으로 핸들을

 

돌려보자, 그게 화두참선법 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따라해 보세요.

 

이뭣고’. ‘이뭣고하는 이놈이 누구냐? 나는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하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번뇌망상이 부처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농사라 합니다.

 

매일 이뭣고하며 내 마음 농사는 얼마나 지었는가,

 

내 마음의 소가 남의 밭에 놀게 놔둔 일은 없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뭣고를 스승 삼아 이뭣고를 할 줄 아는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뭣고를 대지와 같은 벗,

 

어머니와 같은 벗으로 삼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승사자를 만나도, 천둥벼락이 쳐도 이뭣고하는

 

이 것만큼은 어느 구도 어쩌지 못합니다.

 

침을 뱉어도 묻지 않고, 똥물을 끼얹어도 묻지 않는 허공과 같이 마음을 쓰면

 

누가들 나를 어찌 하지 못합니다. 저는 제 손가락을 태우면서

 

나 혼자 극락세계에 가지는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만약 제 법문을 들은 사람이 지옥에 가 있다면 그 사람을

 

업고서라도 부처님 회상으로 나와서 도의 길을 가게 할 것입니다.

 

내 얼굴 한 번 본 사람은 내가 반드시 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내 벽만 허물어 버리면 여러분도 바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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