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色卽是空) ‘이 뭣고’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무형(無形)을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서로 통하고 있는가? 그러나 알고 보면 바위가 허공(虛空)이고 허공이 바위이다.

예를 들어 바위를 자꾸 나누어 가다보면 분자(分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고, 분자는 또 원자(原子)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원자도 소립자(素粒子)들이 모여서 생긴 것으로 결국 소립자 뭉치인 것이다. 그러면 소립자는 어떤 것인가 하면, 이것은 원자핵 속에 앉아서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말하고 있다. 스스로 충돌해서 입자(粒子)가 문득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있고, 바위도 무정물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인 소립자(素粒子)를 세분화하면 머리카락 굵기의 1조분의 1인 쿼크(Quark)인데 원자보다 십만배 이상 작은 원자핵 안에서 자동으로 스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우주(宇宙)를 형성(形性)하는 근본(根本)은 에너지, 질량(質量), 그리고 광자(光子)이다. 상대성원리인 E=mc2의 공식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뿐 아니라,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량과 에너지는 하나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질량이란 유형의 물질로서 깊이 들어가면 물질인 소립자이고, 에너지는 무형인 운동하는 힘이다. 연기법(緣起法)과 공성(空性)의 세계서 본다면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상주법계(常住法界)는 무진연기(無盡緣起)가 있을 뿐이니 이것이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이다.

무진연기상의 일체 생명은 성상일여(性相一如)이며 물심불이(物心不二) 여서 유정무정의 구별이 없고 생명은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의 총칭(總稱)이다.

그러므로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어야만 생명의 참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니, 개개생명 전체가 절대여서 생명거래가 없는 것이다.

 

계성변시장광설(溪聲便是長廣說) 산색개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계곡서 흘러가는 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장광설이요, 산색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로구나. 밤새 쏟아내는 팔만사천 부처님의 감로 법문을, 뒷날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이 시(詩)는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진리와 선의 세계가 아님이 없는 무처불시선(無處佛是禪)의 경계를 읊은 소동파의 오도시(悟道詩)이다.

소동파가 옥천사라는 절에 승호 큰스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대인(大人)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의 성씨는 칭(秤)가요” 천하 스님들 무게를 달아보는 저울이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악’하고 할을 하시며 “이 것이 몇근이나 됩니까?” 하고 반문하니 그 한마디에 소동파는 앞뒤가 꽉 막혀버렸다. 그래서 그 길로 상총 스님을 찾아가 ‘할’하는 도리를 묻자,

“어찌 무정설법은 듣지 못하고 유정설법만 들으려 하는고”하며 꾸짖으니, 말을 타고 계곡을 내려오다가 오로지 무정설법이라는 의정에 모든 생각, 분별이 사라지며 폭포수 소리에 개오한 것이다. 우주(宇宙)에 가득찬 그대로가 반야(般若)이고,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며, ‘이 뭣고’ 이며 증감(增感)이 없는 전 우주인(宇宙人)이고, 본래완성이며 본래구족(本自具足)이다.

또한 ‘이 뭣고’는 한없이 온갖 법을 창출하고 섭수(攝受)하되, 일찍이 일체법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정화되어 있지 않은 빛이 4차원을 넘어선 공간에서는 영(靈) 혹은 영적(靈的) 에너지로 존재한다. 이 영적 에너지는 무형으로서 생명의 근본이며 창조의 원동력이 되는 불성이고 진여본심이며 ‘이뭣고’인 것이다.

청운 스님

[출처] 색즉시공(色卽是空) ‘이 뭣고’|작성자 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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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읽을 경전은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다루고 있습니다.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방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투쟁하는 이런 괴로움은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의 뿌리는 욕망입니다. 욕망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에요.

 

 

욕망이 채워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가고 싶은 장소에 가고, 얻고 싶은 물건을 얻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기분이 좋아요. 사람들은 이 기분 좋음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사람들은 기분이 나쁠 때 불행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욕망은 항상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설령 노력해서 어떤 욕망을 채웠다 하더라도 욕망은 다시 더 커지기 마련이에요. 더 커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서 채워봤자 금세 또 욕망이 커집니다. 그래서 만족은 잠깐이고 다시 불만족한 상태가 지속됩니다.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욕망은 끝이 없다

인도 옛이야기 한편을 들려드릴게요. 옛날에 욕망이 아주 큰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은 자기 나라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침략해서 영토를 넓혀 왕 중의 왕 전륜성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만족을 못하고 살다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서 하늘의 왕인 사천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천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자 제석천왕이 삼십삼천의 권한을 반으로 나누어 줬습니다. 제석천왕이 36번 바뀔 동안 이 왕은 바뀌지 않고 제석천왕의 권력의 반을 누렸습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제석천왕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그래도 만족을 못했어요. 결국 그는 제석천왕을 죽이고 혼자서 제석천왕의 자리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수명이 다하여 다시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욕망은 끝이 없다.’

 

 

이처럼 욕망을 채우는 방식으로는 결코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최고의 지위를 가진 대통령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우리 나라 최고의 재벌기업 회장은 얼마나 행복할까? 인기 연예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우리는 지위가 높으면, 돈이 많으면, 인기가 많으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원하는 위치에 도달해도 다시 더 높은 곳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생 욕망을 다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워요. 어떤 욕망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괴롭습니다. 욕망이 이루어지면 그만큼 재앙이 따르기 때문에 괴로워요. 욕망을 따르는 방법으로는 영원히 안온한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끝없는 욕망의 대열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즐거움도 괴로움도, 행복도 불행도 사라지는 무사 안온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인생에서 꼭 해야 할 일도 없고 하면 안 되는 일도 없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게으르게 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살라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라는 것도 아니에요. 애쓰지도 않고, 나태해지지도 말고 꾸준히 수행을 해서 편안한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절을 하고 명상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일상이 곧 도()'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흐르는 물처럼

물은 경사를 만나면 빠르게 흐르고,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호수를 만나면 잔잔하게 고여 있어요. 인연에 맞게 모양을 바꿉니다. 일이 많으면 몸이 바빠지고, 일이 적으면 몸은 한가하되, 마음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 기꺼이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여여해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거예요. 땅을 파야하면 운동 삼아하고, 설거지를 해야 하면 운동 삼아하고, 무언가 만들어야 하면 놀이 삼아 만드는 거죠. 반대로 할 일이 없으면 명상을 하거나 한가하게 지내면 됩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책이나 유튜브를 찾아봐도 좋고요, 그렇다고 지식과 기술을 쌓기 위해 조급해질 필요까지는 없어요.

 

 

어려움이 있으면 인내하는 연습을 하고 한가하면 편안하게 지내는 연습을 해봅니다. 주어진 조건을 나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일이 많으면 바쁘다고 하고 일이 없으면 지루하다고 합니다. 일이 많으면 역량을 키울 수 있어서 좋고, 일이 없으면 한가해서 좋아요. 사람들은 처음 하는 일은 어렵다고 하고, 같은 일을 또 하라고 하면 지겹다고 해요. 처음 하는 일은 새로 배우는 점이 있어서 좋고, 했던 일은 익숙해서 좋아요. 사람들은 이것저것 하라고 하면 복잡하다고 하고, 한 가지 일만 하라고 하면 단조롭다고 하잖아요. 어차피 하루 종일 같은 일을 열 번 해도 하루고, 새로운 일을 열 가지 해도 하루예요.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일도 다 좋은 일입니다. 젊으면 젊은대로 좋고, 늙으면 늙은 대로 좋아요.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은 점들이 있잖아요.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기 싫으면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보고, 안 되면 연구를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원하기 때문에 힘이 들고, 남한테 도와달라고 했는데 안 도와준다고 원망하고 실망합니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남을 미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삶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동물들보다도 못하게 사는 거예요. 얼마나 괴로우면 사람이 날아가는 새를 부러워하고 개나 고양이를 부러워하겠어요? 그건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자기의 재능을 자기를 괴롭히고 남을 해치는 데 쓰는 것은 인생의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정리하면 괴로움은 욕망에서부터 일어납니다. 욕망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우리가 욕망에 매달려 노예생활을 하는 것이 문제예요. 욕망이 욕망인 줄 알고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지만 욕망에 매여 살지는 마세요.

어떤 현상도 저절로 생긴 일은 없습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생깁니다. 괴로움이 생겼을 때 어떤 원인 때문인지, 그 원인은 또 어떤 원인 때문인지 이렇게 근본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방법이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스님은 불교대학에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배웠다면, 경전 대학에서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고 강조하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왜 경전을 공부해야 될까요? 경전이란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토경전대학에서 배울 경전은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와 선불교(Zen Buddhism)의 경전입니다. 경전대학에 입학하기 전 여러분들은 불교대학에서 초기불교의 경전에 기초해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제 경전대학에서는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경전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해보고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2600년 전 부처님이 걸어간 길

하나의 경전만 갖고 공부하면 되지 왜 이렇게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것이 생겨서 복잡하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이 여러분들에게 생길 것 같아요. 그래서 경전대학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 입학식을 맞이해 왜 우리가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경전을 공부해야 되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인도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베다(Veda)’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베다는 선조들의 경험에 의해 진리라고 알려진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불교 경전이나 성경처럼 옛날부터 내려오는 진리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사람들이 논쟁을 할 때 베다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베다에 어떻게 쓰여 있느냐, 베다의 내용을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 베다에 나온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떤 것이 바른 해석이냐, 이런 식이었습니다.

 

리그베다, 사마베다 등 방대한 베다를 어릴 때부터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브라만입니다. 브라만은 인도에서 최고로 성스러운 계급으로 신의 입에서 창조됐다고 합니다. 두 번째 계급인 크샤트리아는 세상을 다스리는 왕족으로 신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세 번째 계급인 바이샤는 장사하고 농사짓는 평민 계급으로 신의 배에서 나왔다고 하고, 네 번째 계급인 수드라는 노예 계급으로 신의 발바닥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브라만 계급은 진리를 독점했습니다. 진리를 독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고 출생, 태생, 혈통에 의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남자만 공부를 시키고 여자는 안 시킨다든지, 양반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상놈은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베다 시대에는 브라만 계급만 베다를 읽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은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브라만이 진리를 독점해서 제사도 지내고 철학적 논쟁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진리는 이렇게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윤리, 도덕, 관습, 습관, 경전, 계율 등에 근거해서 검증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전승된 것을 갖고 수도 없이 논쟁을 했지만, 부처님은 그런 논쟁에 관여하지 않으시고 눈 있는 자 와서 보라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진리는 눈 감고 더듬어서 짐작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눈을 뜨고 확연히 보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기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상자 안에서 병아리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세 마리다’, ‘다섯 마리다이렇게 논쟁을 하지만, 그런 논쟁을 할 필요가 없어요. 뚜껑을 확 열어보면 두 마리이구나’, ‘다섯 마리이구나이렇게 확연히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은 브라만만 되는 것이 아니고, 크샤트리아도 되고, 바이샤도 되고, 수드라도 된다. 남자만 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도 된다. 어떤 혈통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누구나 눈만 뜨면 진리를 볼 수 있다

 

진리에 눈 뜬 자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들의 모임이 상가입니다. 진리에 눈 뜬 수행자 중에는 브라만도 있고, 크샤트리아도 있고, 바이샤도 있고, 수드라도 있었습니다. 이 공부는 계급과 관계가 없습니다. 평민이나 노예 계층까지도 상가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을 배척한 이유예요. 부처님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살해 위협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저런 노예 계급 출신을 이 성스러운 길에 허용하느냐’, ‘무지렁이 평민을 이 성스러운 길에 허용하느냐이런 반대가 많았습니다.

 

 

더 반대가 많았던 것은 여성에게 출가를 허용한 것입니다. ‘여자가 어떻게 진리를 깨닫고 수행자가 될 수 있느냐라는 비판은 낮은 계급의 출가를 허용한 것보다 더 큰 저항이 있었습니다. 여성 중에도 유녀들이 진리에 눈 뜨고 출가를 하게 되었을 때는 엄청난 사회적 저항까지 받았습니다. 범죄자라고 불리는 도둑이나 강도가 눈을 뜨고 새 사람이 되어 진리의 대열에 참여한 것을 갖고도 비난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진리에 눈을 뜨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과거에 집착해서 상가를 범죄자들이 참여한 교단이라고 비난했고, 그로 인해 교단이 무너질 뻔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출가수행자들은 걸식을 해서 대중들에게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데, 대중들이 밥을 안 주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로 사회적 저항이 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오해가 풀리고 출가수행자들은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점점 신뢰를 얻어갔습니다. 초기에는 과거에 매여서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들을 카스트나 성별을 갖고 주로 평가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는 주로 인격을 갖고 평가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교는 사이비 취급을 받다가 점점 대중의 신뢰를 얻어 주류가 됐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일어난 일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200년 후 아쇼카왕 때는 왕이 불법에 귀의하면서 불교가 탄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장려를 받는 정도가 됐습니다. 그래서 급속도로 불교의 세력이 확산되었습니다. 그 결과 출가 승려 중에는 깨달음의 눈이 열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냥 머리만 깎고 승복만 입으면 존경을 받으니까 무조건 교단에 들어온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조금씩 제기가 되었고요.

 

 

불멸 후 400년이 지났을 때는 출가한 승려들도 부처님 말씀을 갖고 이게 옳으니 그르니 하는 논쟁을 하게 되었고, 논쟁을 한 결과 파를 형성해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 부처님의 말씀이 진리로 절대화가 된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가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는 방편이 아닌 절대화가 된 거죠. 출가한 승려들은 어느덧 과거의 브라만처럼 복을 빌어주는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고, 재가 수행자들은 과거의 신자들처럼 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복을 비는 신자가 됐습니다.

 

원래 인도의 전통에 따르면, 브라만이라고 하는 창조의 신이 있고, 신의 힘을 빌려오는 사제 계급인 브라만이 있고, 복을 비는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브라만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신, 사제, 신자를 모두 부정하고, 오직 무지를 깨쳐 지혜를 얻어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누구든지 다 수행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자에는 출가한 남자 수행자인 비구, 출가한 여자 수행자인 비구니,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남자 수행자인 우바새,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여자 수행자인 우바이, 이렇게 네 가지 종류가 있었어요. 혈통으로 주어진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수행자가 될 수 있었지만, 남녀 성별과 출가자와 재가자를 기준으로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기 때문에 ‘4부 대중이라고 합니다.

 

경전에는 출가 수행자뿐만 아니라 재가 수행자들 중에서도 수많은 깨달은 자가 나왔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것 없이, 비구와 비구니를 구분할 것 없이, 여성들 중에서도 수많은 깨달은 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출가 수행자는 브라만처럼 사제 계급이 되어 갔고, 재가 수행자는 점점 수행을 하지 않고 복을 비는 신자가 되어 갔고, 부처님은 어느덧 무한한 위신력을 갖고 복을 주는 신이 되어 갔습니다. ‘수행자라는 이름과 그 가르침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불교는 점점 종교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또 한쪽으로는 학문화의 길, 철학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다’, ‘이것이 진리다하는 철학적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마치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교라는 종교와 우파니샤드 철학이 있었지만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 병들어서 죽어가는 사람, 늙어서 버려진 사람, 온갖 갈등과 고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외면되었듯이, 불교 안에서도 살아 있는 사람이 외면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교가 아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하는 새로운 불교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지금 태어나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살아가시겠느냐라는 관점이 담긴 경전입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에게 혼란스러운 현실에 대해 수보리가 묻고, 관세음보살이 묻습니다. 대승불교의 입장은 비록 부처님이 하신 말이라고 하더라도, 불교 용어를 썼다 하더라도 그 말이 절대화되고 형상화됐다면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부처님은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을 근거로 논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직접 눈을 뜨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자 부처님 당시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사이비 취급을 받았어요. 기존 불교사회에서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승려, 그중에도 남자인 비구 중심의 교단에서 특히 반발이 거셌습니다.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기존 불교를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기존 불교를 혼자 해탈하려고 한다는 의미로 작은 수레, 소승(小乘)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면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나와 남을 다 함께 행복으로 인도하는 큰 수레, 대승(大乘)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소승대승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인들이 만든 용어입니다. 대승불교인들은 처음에는 권위가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부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인들은 인격과 실천력이 높았고 관념을 타파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지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대승불교가 나타난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사상을 담은 경전이 대승경전이에요. 정토경전대학에서는 대승경전 중에서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읽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중국으로 전래되면서 역시 종교화 되고 학문화 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어요. ‘다시 수행으로 돌아가야 한다. 언어와 문자에 매여서는 안 된다.’ 이런 비판을 제기하며 일어난 불교가 바로 선불교입니다. , 음식에 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요리법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한 숟가락 떠먹어야 맛을 알고 배가 부른 것과 같습니다. 먹지 않는 이상 배는 안 부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배가 고픈데 음식을 먹지는 않고 음식 이야기만 실컷 하는 거예요. 선불교인들은 이런 사람을 두고 아무리 지식을 많이 알아도 숨넘어갈 때 아무 도움이 안 되고 헐떡거리다 죽게 된다는 거예요. 지식은 많이 모르더라도 직접 맛을 보고 자기 배가 불러야 합니다. 직접 체험을 해야 해요. 이렇게 해서 선불교에서 불립문자 (不立文字)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문자로 진리를 검증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수행으로 돌아가자는 선불교 운동이 일어납니다.

 

선불교도 초기에는 사이비 취급을 받았습니다. 출가해서 30년을 공부해도 불교를 겨우 알까 말까 한데, 선불교인들이 경전 한 줄도 안 읽고 진리를 체험했다고 하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불교인들은 복잡한 언어를 쓰지 않고 생활 언어로 단도직입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기존 불교를 보호할 때는 권위 있는 종교지도자 중심으로 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나라가 망하고 혼란기가 되니까 결국 대중에 뿌리내린 실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의 지지를 받게 돼서 중국이나 한국에서 선불교가 주류가 됐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역사는 정토불교대학에서 이미 공부했습니다. 대승불교의 주요 초기 경전인 금강경에는 대승불교를 주창한 사람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킨 관점이 뭐였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금강경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깨달음이야말로 어떤 믿음이나 지식보다도 더 위대한 경험이라고 해서 반야심경에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라고 표현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깨달음이나 진리, 부처님이라는 용어로 쓰였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언어와 문자를 절대화해서 고집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승경전은 색이니 공이니 이런 용어가 나와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은 즉문즉설을 듣다 보니 쉬운 법문에 익숙해져서 조금만 내용이 어려워져도 아예 안 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불교학자가 되려는 것은 아니니까 지식에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언어가 조금 생소합니다. 생소한 언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생소함을 넘어서야 그 속에서 담긴 굉장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알밤을 먹으려면 밤송이에 붙은 가시는 좀 뛰어넘어야 되잖아요. 가시가 있다고 통째로 버려버리면 안 되고, 언어라는 가시를 조금 헤집고 들어가야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서툴러도 직접 해야 실력이 늡니다

공부는 직접 체험해봐야 합니다. 요리를 지식으로 알기만 하지 말고 직접 만들어 먹어봐야 해요. 직접 해보면 책에 있는 내용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툴러도 직접 해봐야 실력이 늡니다. 실력은 지식만 많이 쌓는다고 느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야 늡니다.

 

 

직접 해봐야 하는데 아직 코로나19 때문에 모여서 실천 활동을 못 하니까 실천과제를 드리겠습니다. 직접 꼭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밖으로 나와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한 실천도 해야 합니다.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가 수행을 한다는 이유로 세상을 외면하는 쪽으로 갔기 때문에 세상과 함께 가자고 일어난 운동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열린 자세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승경전을 배우는 경전대학에서도 경전 공부와 더불어 사회적 실천을 함께 해야 합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위해 매달 한 번 즉문즉설이 열립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궁금한 점은 그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세 가지를 꼭 지켜보면 좋겠습니다.

 

첫째, 사전학습 법문을 꼭 듣습니다.

둘째, 수업시간에 빠지지 말고 꼭 참여합니다.

셋째, 실천과제를 꼭 해봅니다.

 

요리를 직접 해보면서 요리를 배워야 합니다. 계속 방송만 듣지 말고, 직접 썰고 볶고 삶고 요리해서 맛보아 가면서 공부해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전대학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입학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걷는 길

문경 수련원에 도착하기 전 쌍곡 계곡에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오늘도 걷기 운동을 해야겠어요.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내려서 내리막길을 한 시간 정도 걸읍시다.”

 

 

스님의 하루 제작팀도 스님과 함께 도로 위를 걸었습니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지만 아직 산속 나무에는 앙상한 가지만 무성했습니다. 그러나 잎이 돋아나지 않은 빈 가지 사이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스님은 나뭇가지에 물든 초록빛을 찾아냈습니다.

 

잎은 나지 않았지만, 가지가 먼저 연초록색으로 바뀌고 있어요.”

 

 

스님이 내리막길을 빠른 속도로 걸어가는 가운데 반대편에서 무거운 콘크리트 하수관을 실은 화물트럭이 안간힘을 쓰며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요즘 제 모습이 저 화물트럭이랑 비슷해요. 내리막길은 잘 가는데, 오르막길은 저 화물트럭처럼 겨우 올라가거든요.” (웃음)

 

 

오르막길을 걷기가 어려워진 스님은 요즘 내리막길 걷기를 틈나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인적이 드문 도로에는 스님의 발걸음 소리만이 뚜벅뚜벅 들렸습니다. 고요한 정적을 깨고 스님이 산속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무문관이나 명상을 하려면, 이런 산속보다 아파트 문을 잠가 놓고 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요. 저도 젊은 시절에는 산속에 토굴에서 정진을 해봤는데, 산속에 혼자 살면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뭐가 고장 나서 고쳐야 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해요. 처음 가졌던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국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인생을 살아보면 그런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자꾸 엉뚱한 결과가 빚어지는 이유

옛날에 어떤 스님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정진을 했어요. 너무 열심히 정진을 하는 바람에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영양실조라고 하면서 우유를 매일 한 잔씩 먹으라고 했습니다. 우유를 가지러 몇십 리를 걸어서 마을까지 왕복을 하려니까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시장에서 염소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염소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요. 결국 염소를 돌보는 아이를 한 명 데려오려고 하니까 밥도 먹여줘야 하고, 월급도 줘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바보 같이 왜 돈이 드는 그런 방식으로 염소를 키우느냐? 여자 한 명과 결혼을 하면 여자가 염소도 키워주고 밥도 해주고 다 해주지 않느냐?’

 

이 제안이 너무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월급을 안 줘도 되니까요. 그래서 결국 스님이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웃음)

 

그때 그때는 다 자기 나름대로 잘한다고 한 행동이에요. 그런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된 겁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이에요. 그때 그때는 다 잘한다고 한 행동입니다. 그 순간에는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지나 놓고 보면 처음 세웠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거죠.”

 

 

그렇게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처음 세웠던 목표를 늘 자각해야죠. 네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입력해 놓으면,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마다 경로를 이탈했다고 계속 알림이 나오잖아요. 그것처럼 목표를 늘 잊지 말아야 해요.

 

목표를 망각하면, 본인이 엉뚱한 길로 가고 싶어서 그렇게 가는 게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킨 사람들도 일부러 말썽을 일으킨 사람은 열 명 중에 한 명도 안 돼요. 대부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스님과 함께 걷는 길, 마음도 점점 가벼워지고 발걸음도 점점 가벼워졌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아주 예쁘고 큰 정원을 가진 집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큰 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돈 벌어서 이런 집 하나 사서 가꾸는 재미로 살잖아요. 그런데 꼭 내 집이 아니어도 농사짓고 정원 가꾸는 일은 얼마든지 재미있게 할 수 있거든요. ‘내 집이라는 생각만 버리면 돼요. 지부별로 수련원에 와서 농사도 짓고 정원도 가꾸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오직 내 것이라는 생각 그것 하나뿐이에요.

 

비싼 옷을 입어봐야 같은 옷이지, 비싼 목걸이를 목에 걸어봐야 무겁기만 하지, 비싼 화장품을 얼굴에 발라봐야 냄새만 나지, 차는 이동만 하면 되지 비싼 차가 무슨 필요가 있어요? 명품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병이에요.”

 

오늘 읽은 경전은 사람을 분별하는 마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은 우등하다’, ‘저 사람은 열등하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비슷하다이렇게 항상 누군가가 뛰어나다거나 누군가가 못하다며 비교를 합니다. 이렇게 비교를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견해가 다를 때 논쟁을 하지 않는 방법

부처님 당시에는 진리에 대한 논쟁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이 진리다’, ‘저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다’, ‘저것은 삿된 견해다등 무엇이 바른 길인지 학문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많은 논쟁을 했습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도 이러한 논쟁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를 두고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당시 인도에도 육사외도, 62견해, 360견해 등 다양한 사상 속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어떠한 견해가 옳은지 물었고, 부처님께서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어리석음이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일체의 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깨우친 사람은 논쟁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어떤 사물을 볼 때 뛰어나다’, ‘열등하다’, ‘동등하다이렇게 비교해서 사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물마다 모두 고유한 성질이 있기 때문에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볼뿐입니다. 사람도 사람마다 다 그 나름대로의 자질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존중을 해야 합니다.

 

견해가 다를 때에도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 지를 보는 게 아니라 견해가 다르구나’, ‘생각이 다르구나이렇게만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이 무엇은 옳고 무엇은 그르다고 주장하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아직 지혜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반증합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바라문교 사상의 성전이며 가장 오래된 경전인 베다를 읽고, 그 베다에 근거해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하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판단 기준이 베다였습니다. 그 외에는 전승된 계율이나 관습, 습관에 의해서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관습이나 습관, 계율이나 경전, 윤리나 도덕에 의해서 진리는 검증되지 않는다.’

 

이 산은 동산입니까, 서산입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산이 하나 있습니다. 산의 동쪽에도 마을이 하나 있고, 산의 서쪽에도 마을이 하나 있습니다.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은 산이 서쪽에 있다고 생각하고,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은 산이 동쪽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의 동쪽 마을에 태어나서 다른 동네에 가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부를 겁니다. 동네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모두 다 서산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역사 기록을 다 찾아봐도 서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직접 관찰을 해도 그 산 방향으로 해가 집니다. 자기 눈으로 직접 봐도 서산이 확실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서 다수의 의견을 구해도 서산이 확실하고, 옛날부터 전해지는 기록을 뒤져도 서산이 확실합니다.

 

산의 서쪽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산을 동산이라고 하고, 그 마을의 기록을 뒤져봐도 모두 동산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직접 관찰을 해도 해가 그쪽에서 뜹니다. 그러니 이 산은 틀림없이 동산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거나 전승된 기록이 있다고 해서 진실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실을 알려면 자기가 사는 마을에서 나와 봐야 됩니다. , 자기의 까르마와 아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눈을 감은 사람이 눈을 뜨듯이 그 마을에서 한 번 나와 보면 이 산이 동산이 아니구나또는 이 산이 서산이 아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이 산은 무슨 산일까요?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또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닌 산이다이렇게 규정합니다. 산은 그냥 산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는 마을의 위치에 따라, 즉 조건에 따라 동산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서산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도리를 아는 사람은 누가 북산이라고 해도, 누가 남산이라고 해도, 논쟁하지 않습니다. 누가 북산이라고 하면 , 저 사람은 산의 남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알고, 누가 남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북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압니다. 누가 동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서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알고, 누가 서산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산의 동쪽에 있는 마을에 살고 있구나라고 압니다. 이렇게 그 사람이 사는 위치를 알아버리면 다툴 일도 없고, 논쟁할 일도 없어집니다. 전체를 보는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논쟁을 하는 거예요.

 

덮인 것을 벗겨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래서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깨닫게 되면, 논쟁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그중 어떤 것이 옳은지 물을 것도 없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든, 저 사람의 말이든, 전혀 헷갈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이 풀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뭔가로 덮여 있어서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으로만 알다가 덮개를 벗기고 나면 한눈에 보이는 것처럼 한 번에 알게 됩니다. 상자 속에서 나는 병아리 소리를 듣고 세 마리일까, 네 마리일까?’ 이렇게 서로 짐작하고 주장하다가 상자를 확 열어보면 몇 마리가 있는지 한눈에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의 가르침은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번뇌와 의문이 탁 풀어진 경험을 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분명하고, 덮인 것을 벗겨서 보여주는 것처럼 분명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분명하고,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등불을 비춰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비유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스승의 손안에 숨겨둔 비밀 같은 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무언가 비밀스러운 비법을 전수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제자 중 누구에게만 비밀스럽게 특별한 것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이건 진리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벌써 진리가 아니라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 구절에 미래의 희망 같은 건 없다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얼핏 보기엔 이해가 잘 안 되죠? 평소에 우리는 미래의 희망을 갖는다는 말을 많이 하니까요.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극락과 천당을 이야기하고, 죽어서 윤회한다거나, 좋은 일을 하면 다음에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법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왜 정법이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어요.

 

 

수행자는 어떠한 조건이 주어지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오늘은 나쁘고 내일은 좋을 때 미래의 희망이라는 말이 성립되고, 옛날보다 오늘이 나쁠 때 절망이라는 말이 성립되는데, 수행자에게는 좋고 나쁨이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봄을 좋아하고 여름을 싫어해야 여름이 오면 재앙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가을을 좋아하고 겨울을 싫어해야 겨울이 오면 재앙을 받았다고 할 수 있고, 겨울을 싫어하고 봄을 좋아해야 봄이 되면 대운이 찾아왔다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수행자는 어떤 계절은 좋고, 어떤 계절은 나쁘다고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에 무슨 좌절할 일이 있고, 굳이 희망을 얘기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운명을 점치는 일을 금지한 이유

운명을 점치는 일을 일체 금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자가 손금을 보고 관상을 보고 하늘의 별을 보고 사주를 보는 것도 일절 금지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 다 지금은 나쁘지만 미래는 좋아지기를 기대하는 심리 때문에 하는 거잖아요. 이건 수행자의 자세와 맞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든 늘 좋습니다. 어디를 가도 두려움이 없고, 걸림이 없고 편안한데 뭘 따로 더 좋은 걸 기대하겠어요.

 

이런 도리를 확연히 깨우쳐야 왜 부처님이 미래를 점치지 말고, 신통을 쓰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좋은 것을 구하고 나쁜 것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나누고, 손금을 보고, 관상을 보고, 사주를 보고, 전생을 알려고 하면서 좋은 일이 생기겠냐, 나쁜 일이 생기겠냐늘 따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른다는 건 애당초 도달할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정진할 때도 여러분은 늘 정진하면 뭐가 좋아집니까?’하고 묻는데, 다만 정진할 뿐입니다. 명상을 할 때도 일체를 모두 내려놓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기만 하고, 화두를 들 때도 다만 화두를 들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러면 뭐가 좋아요?’, ‘저러면 뭐가 좋아요?’ 이렇게 늘 좋음을 구합니다.

 

신심명 첫 구절이 뭐예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고 미워하는 것이 싫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갈애와 혐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 마음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좋고 싫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여러분도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늘 좋은 걸 찾고 있습니다. 좋은 걸 찾는다는 건 지금이 어렵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좋으면 좋은 건 또 유지하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성된 것은 모두 다 변화한다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루어지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겁니다.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만나다 보면 내 취향에 맞는 사람도 있고 맞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계절에도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계절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계절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좋아한다고 집착하지 말고, 싫어한다고 밀어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옛말에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무심하라는 말 같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각자 까르마 때문에 일어난 일에 너무 목매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까르마로부터 일어난 일에 집착하면 평생을 껄떡거리고 살게 됩니다.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버리면 공부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본질을 꿰뚫지 못하면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방 안에 불을 탁 켜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데, 불을 끈 채 손으로 더듬으면 사흘을 더듬고 한 달을 더듬어도 방 안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애는 많이 쓰는데 얻는 건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잘못 알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늘 자기 생각을 쥐고, 자기 욕구를 쥐고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바로 그런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고 경전을 읽고, 일상생활에도 적용을 해봐야 합니다. 옛 선사들이 언하에 깨쳤다고 하잖아요. 눈을 감고 헤매다가 눈을 탁 뜨고 나면 별 거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이렇게 헤매고 애쓰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면서 살아갑니다. 갈애가 끝나지 않으니까 오늘이 내일을 연결하고, 내일이 모레를 연결하고, 인도식으로 표현하면 이생이 내생을 연결합니다. 이 연결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을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삶으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인격을 갖추는 방법

“우리는 매달 계본을 기준으로 포살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냥 형식적으로 포살을 하는 것 같아요. 40계본 속에 수행자가 가져야 할 자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상을 많이 안다고 해서 인격을 갖출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격은 계율을 지킬 때 생깁니다.

 

인격은 말을 어떻게 하고,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고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격은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고, 남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말과 행동이므로, 말과 행동이 곧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계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율은 속박이 아니라 인격을 닦는 방법이에요. 믿음은 마음의 영역이고, 법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의 영역입니다. 이는 신해(信解)에 해당하는 것이지 행(行)은 아닙니다. 행에 해당하는 것은 계율이에요. 계율을 잘 숙지하고, 포살하거나 참회할 때 ‘아, 이걸 내가 놓쳤구나’하고 자각하고 계율을 지켜나가야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물론 바른 말과 행동의 뿌리는 바른 생각입니다. 그래서 화나고 짜증나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수행이 필요한 거지요.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 안으로는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해야 하고, 타인을 해치지 않고 이롭게 하기 위해 밖으로는 계율을 잘 지켜야 합니다. 윤리, 도덕을 강조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안 주려는 사람 중에는 정작 본인의 마음 관리가 잘 안 되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도 있어요. 반대로 수행자들 중에 막행막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마음만 편하면 수행이고 도라고 하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방식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계율을 기초로 삼아야 됩니다. 계율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교리 공부를 해도 사량분별에 불과하고, 명상을 해도 정신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일은 연구하면서

40계본 중에는 ‘몸에 집착하여 몸을 사리지 않는다’, ‘일에 집착하여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계율이 있습니다. 몸에 집착하면 게을러지고, 일에 집착하면 과로를 하게 됩니다. 게을러지는 것도 비효율적이고, 과로해서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비효율적이에요. 그래서 몸에 집착하지도 말고 일에 집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과로는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어요. 첫째, 어쩔 수 없이 과로를 해야 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산행을 갔는데 일정상 중간에 쉴 수가 없어서 하루 일정이 길어진 겁니다. 이것은 몸에는 무리지만 일에 집착해서 과로를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거죠. 둘째, 일에 집착해서 몸을 무리하게 쓰는 경우예요. 나타나는 증상은 같지만 전자는 주어진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과로를 한 것이고, 후자는 과로하지 않아도 되는데 일에 집착해서 과로를 하는 거예요. 전자는 용기에 해당하고, 후자는 집착에 해당됩니다.

 

또 일을 늘 해오던 방식대로 하지 말고, 연구하면서 해야 합니다. 단순한 일은 그냥 해도 괜찮습니다. 10분이면 하는 일을 오래 연구해서 하는 건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계속 반복하는 일이라면 시설을 만들거나 뭔가를 갖추어서 하는 것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 단거리를 갈 때는 자전거를 배워서 타고 가는 게 걸어가는 것만 못하잖아요. 장거리를 갈 때는 며칠이 걸리더라도 자전거를 배워서 타고 가는 게 더 효과적입니다.

 

일, 운동, 놀이의 통일

생활을 같이 해보면 운동은 늘 하면서 절은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절은 수행도 되지만 운동도 됩니다. 또 운동은 열심히 하면서 일은 안 하는 사람이 있어요. 짐을 들고 나르는 것도 똑같은 운동이에요. 자연에 사는 동물에게는 운동이 따로 없습니다. 동물들은 먹이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는 게 일이고 그게 곧 운동이에요.

 

인간에게 길러지는 동물은 더 이상 먹이를 잡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러니까 가축들이 운동이 부족해서 비만이 되는 거예요. 편한 게 꼭 좋은 게 아닙니다. 가축은 비만이 많지만, 자연에 사는 동물들은 비만이 거의 없습니다. 비만한 사람들도 먹는 것에 비해 운동이 부족한 거예요. 이것은 본인이 먹을 것을 본인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체질적인 경우도 있고요.

 

 

일과 운동 그리고 놀이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운동을 하든 일을 하든 즐거운 마음으로 하면 그게 곧 놀이죠. 같은 일을 해도 돈을 쓰고 하면 놀이가 되고, 돈을 받고 하면 노동이 됩니다. 조금만 원리를 잘 생각해보면, 운동을 하고 돈도 받는 게 낫지 않아요? 일이 놀이가 되도록 한다면 일과 운동, 일과 놀이가 일치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수행까지 더해서 네 가지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역기 운동을 하는 사람은 짐 내릴 일이 있는 날에는 오늘 운동은 쉬고 짐 내리는 것으로 운동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절을 하고 등산도 하고 해야 되는데 시간이 없어서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면, 등산대신 절을 할 수 있어요. 절은 하지 말고 일만 하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짐을 내리는 일을 하면서 상체운동을 많이 했고 하체운동이 부족하다면 저녁에 절을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수행은 해야 하니까 이렇게 서로 연관해서 하면 효율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청소기 돌리고 운동 시간을 따로 갖고 이렇게 하지 말고 청소를 운동 삼아서 하면 됩니다. 이게 전부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돈을 내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놀이고 운동이라서 기분이 좋고, 돈 받고 하거나 그냥 하는 것은 노동이라서 하기 싫은 심리적인 것에서 오는 차이입니다.

 

마음공부란 주어진 상황을 늘 놀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부처님이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일을 즐겁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부처님은 욕구를 만족시켜서 생기는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주어진 조건을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막 들뜨라는 게 아니라 싫어하는 마음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즐겁게 한다’라기 보다 ‘가볍게, 기꺼이 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관점으로 일상을 가볍게 생활했으면 좋겠습니다.

 

젊음을 낭비하지 마세요

참회하는 내용을 들어보니 자기들끼리 갈등을 하고 참회를 하던데 저는 그게 젊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해요. 좀 더 살아보면 남을 시비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는 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빨리 깨우칠수록 자신을 덜 괴롭히고 덜 학대해요. 늦게 깨우칠수록 한 번뿐인 젊음을 자신을 괴롭히는 데 낭비합니다. 조금 더 자기 상태를 점검하고 항상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남을 시비하고 미워하면 나만 손해라는 걸 알아야 해요. 삶은 소중하니까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자기를 잘 가꾸어 나가길 바랍니다. 얼굴과 몸매를 가꾸는 것보다 마음을 가꾸는 것이 인생에 훨씬 더 이롭다는 것을 알아서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해나가길 바랍니다.

 

 

어떤 일을 할 때도 연구하는 자세를 가지고 운동 삼아 놀이 삼아하는 관점을 가지면 훨씬 더 일의 효율도 오르고 피로도 덜 합니다. 이런 내용이 계율에 다 갖춰져 있습니다. 계율이 곧 수행입니다.”

 

 

 

“오늘 삼일절을 맞아서 우리는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었다고 이야기하는 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에 선조들이 독립운동에 나설 때 얼마나 큰 장애와 위험이 있었는지 우리는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고통을 겪었고 재산까지 잃었습니다. 그런 위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라의 독립과 정의를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삼일절을 진정으로 기념하는 방법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켜내고 통일을 꿈꾸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일은 죽을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갈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며, 가족이 피해 볼일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개인의 이익에만 안주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우리가 개인의 이익에만 안주한다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어렵습니다. 독립운동가처럼 목숨을 건 각오와 결심은 하지 않더라도, 조금만 자기 시간을 내고, 재능을 기부하고, 조금만 소비를 줄여서 재정을 모은다면, 우리 사회를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고, 평화가 정착되어 안전이 담보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과거를 잊지는 않지만 얽매이지 않고 뛰어넘어 우리가 북한을 포용하고, 일본을 용서하고, 동양 삼국이 협력하는 시민 정신을 갖는다면, 다시는 이런 불행을 겪지 않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미 입은 상처에 얽매여서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상처가 있다면 재빨리 치료하고, 다시는 상처입지 않도록 위험을 예방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백 년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쟁했고, 분단과 전쟁의 고통을 딛고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적 번영을 이룩해 왔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짧은 시간에 민주주의를 이룩해 왔습니다. 아직 많은 문제가 남아 있지만 이루어 놓은 성과는 매우 큽니다.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있긴 하지만, 남이 볼 때는 우리가 이뤄 놓은 성과는 눈부시다고 평가됩니다. 여기 안주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긍심 위에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코리아 리스크’라고 말하는 전쟁의 위험과 분단이 극복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에 안주해서 사치와 향락, 개인 이기주의에 빠지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면서 정쟁을 일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도 훌륭한 성과이지만 여기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반짝 빛나다가 꺼지는 불과 같이 될 것입니다.

 

 

천 년의 한을 풀 수 있는 기회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기반으로 조금만 더 비전을 갖고 노력한다면 한반도 평화와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으며, 한일 간의 구원(舊怨)을 극복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고, 미·중의 패권 시대에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과거에 동북아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대륙의 주변부로 전락한 우리 민족은 천년의 한을 풀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현재에 안주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독립운동가처럼 긴장하고 불안에 떨고 각오하면서 이 일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룬 것을 어느 정도 누리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이런 희망을 품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년 만에 온 기회입니다.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그 사태에 휘둘려서 피해를 볼 수도 있고, 반대로 조금만 잘하면 강대국의 갈등 속에서 우리의 독립과 자주, 번영을 이루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행자는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거나, 주어진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곳

오늘 3.1 독립운동 102주년을 맞이해서, 우리는 선열들이 어려운 가운데 행했던 그 의지를 계승하고, 우리의 스승이신 용성 진종조사님께서 한평생 나라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해 오신 정신을 계승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용성 진종조사님께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통합된 새로운 나라를 나제려국, 또는 대한정국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동안 분열하고 태만하여 잘못 살아온 것을 참회하고, 그에 기반하여 미래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새로운 나라는 곧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가야정사 자리인 봉림사지, 백제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우면산 대성초당, 고구려 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집안(集安) 초문사(肖門寺), 신라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아도모례원을 잘 가꾸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전해오는 경주 남산 천룡사를 중창해서 새로운 나라를 열어가는 기초로 세우라는 유훈을 남기셨습니다.

 

올해부터 정토회 지부별로 배정된 이 절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미래의 희망을 만드는 곳입니다. 우리의 스승인 용성 진종조사님이 태어나신 곳에 죽림정사가 지어졌고, 석가모니불 다음에 오실 미래의 부처님이 미륵불인데, 미륵 부처님을 모신 미륵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불교 초전 법륜 성지인 서울 우면산 대성사 초당 밑에 정토사회문화회관이 있습니다. 이 장소들은 단순히 마련된 장소가 아니라 이런 비전과 꿈을 가지고 만든 장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행하고 공부할 가까운 장소가 없어서 지역마다 법당을 만들었고, 그것이 정토회 발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지역 법당보다 개인 법당 또는 온라인 법당이 수행 정진하기에 더 효율적인 공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수행과 전법은 온라인 법당에서 해나가고, 우리 민족의 꿈과 비전은 지부별 실현지에서 키워나갑시다.

 

 

용성 진종조사님의 뜻을 이어

오늘 3.1운동 102주년 기념식이 여러분 각자에게 용성 진종조사의 유훈을 계승해 나가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토회는 수행 정진해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과 우리가 사는 이 나라가 평화적으로 통일되어 자주적이고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도록 하는 것, 이 두 가지 꿈을 갖고 28년 전 만일결사를 시작했습니다. 만일결사가 이제 2년 남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꿈을 딛고 세계인들이 다 행복할 수 있도록 세계전법을 해 나가야 합니다.

 

삼일절이 단순한 기념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장 어려운 시기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과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꿈꾼, 대한민국 수립운동과 패망한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 새로운 불교를 꿈꾼, 대각교 운동을 일으킨 우리의 스승이신 용성 진종조사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그 뜻을 이어가고자 다짐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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