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공(空)에는 눈귀코혀몸뜻이 없다.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표상, 의지, 인식도 없으며,

 

是故 空中 (시고공중)

그러므로 공(空)에는

 

無色        

색이 없고 

無受想行識

느낌 생각작용식별이 없으며

 

空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온이 나옵니다. 

오온은 지난 번에 말씀드린대로 색수상행식인데 크게 보아 

 

1.물질, 2.정신의 세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공은 비어서 빔이라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어있는 빔입니다. 

그곳을 누가 '빔'이라고 말하면 틀려져요. 

왜냐? 빔이라는 개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빔은 철저히 비어서 빔이라고 빔의 뜻을 세워도 안되요.

우리가 보통 '빔' 이라고 하면 빔이라고 부르는 사이에 벌써 우리의 의    식은 빔의 형상을

그립니다. 

텅빈 것을 연상해요. 그런데 이렇게 연상이 있으면 빔이 아닙니다. 

그래서 빔이라는 개념도 있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빔이라고 하면 벌써 어긋나버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공부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생기는 병이 바로 이 빔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는데에 있습니다. 

빔이라고 말하면 벌써 빔이 아닌 줄 몰라요. 

그래서 좀 알면 불교는 빔을 주장하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억세게 주장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병(病)인데 그것을 모르고 빔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억세게 주장하다가 보이까 자기가 틀리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고 혹 '그것이아니다' 하고
 가르쳐주어도 잘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갈쳐주는 선생이 잘못되었다 해요. 딴데서는 다 맞다고 하는데 이곳 무불에서만은

왜 틀리다고 말하냐고 따집니다. 

그러니 제대로 갈쳐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깊은 병이 들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이 공부는 절대 자기를 세우면 안됩니다. 

자기 를 세우면 진전이 없어요. 

부처님도 천제(闡提)는 제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였는데 

천제는 지나치게 똑똑하던가 아니면 자기 주장을 강하게 세우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가 부처님보다도 선생님보다도 스승님보다도 더 많이 아는데 어찌 선생님 말이 귀에  들어가겠습니까? 

오늘날 스승없이 혼자 깨달았다 하는 사람들 보면 전부 아상이라는 깊은 병이 들어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스승이 없이 혼자 깨달아도 圓通하면 겸손하지 않으려고 해도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리가 그래요. 

왜냐면 이 법을 깨우친 자라면 절대 자기를 내세우지 않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사람한테 메일을 받았는데 제가 요즘 강의를 하고 있으니까

회원 한 분이 자유게시판에  완능록 원문을 올려 놓으셨더라고요. 

내용은 쉬우면서도 깊은 내용이라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타카페....들어보니 그곳에 주인장께서도 깨달았다고 하는 모양인데...거기다 글을 올렸습니다.

주인장이 완능록 글을 읽더니 밑에다가 아직 圓通하지 못한 글이라고 평을 달아놨데요. 

완능록이 누구 글입니까? 

선종의 큰 기둥을 인가하였던 황벽스님 글입니다. 

황벽스님의 인가를 받은 임제스님이 禪의 중흥조잖아요.

그런 황벽스님의 글을 보고 아직 덜 깨달았다고 평가하는 정도이니 

요즘 禪을 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相病이 깊게 들었는지 알 만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글을 올리신 우리 회원 분이 

글 내용은 완능록 원문인데 출처를 밝히는 곳에서는 "무불님 강의 중에서" 라고 했어요. 

우리 카페라면 그것이 무불님의 강의 중에 나와 있는 황벽스님 원문인지 다 알겠지만

그 카페 주인장은 그 말이 아마도 제 강의인줄 알았을 겁니다. 

그러니 선서의 기본 서적도 못읽어 보았다는 말이 되잖아요. 

그 사람은 저를 비방했겠지만 사실은 황벽스님 글이니 황벽스님을 비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말하든 그 말이 맞으면 좋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런 여유가 없음은 아직 공부가 덜 되었다는 증거인데 

그렇게 남모르는 어떤 앎(식)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그런 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앎병!  이것 참 무서운 병입니다. 

수십년을 지나도 그 앎병을 못버리면 절대 깨달았다 할 수 없어요. 

모든 선서를 보세요.  어떤 선사가 공을 공이라고 말하던가요? 

그렇게 말한 선사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을 공이라고 말하는 자는 아직 공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뿐만 아니라 어떤 앎도 그것은 세우면 제대로 뭘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자기 앎에 의지하여 끝없이 남을 평가하고 자기를 자랑하겠습니까?

깨달은 자라면 지식의 주머니를 비워버리고 그 주머니까지 던져버린 자입니다. 

진실을 보임에 지식의 주머니가 드러나면 그는 아는 자이지  깨달은 자라고는 하지 못해요. 

그래서 선가에는 인가하는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깨달은 자를 알아요. 그래서 깨달은 자가 깨달은 자를 인가하는 것입니다. 

대담중에 확인해보고 아직도 앎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 앎을 깨부수어주는 일을 스승이 하는것입니다. 

어떤 꼴통이 자기가 깨달았다고  구구절절히 글을 써서 보냈길레 보니까 병으로 꽊 차있어요. 

그래서 '그 나무 말뚝을 빼버려라....'하고 간단히 멜을 보내주었는데 

자기는 틀림없이 깨달았다고 장담하는 이 꼴통이 답장하길 

'언젠가는 스님과 손잡고 큰 일을 도모할 날이 있을 겁니다' 해요. 

그야말로 시건방의 극치입니다. 

나는 바빠서 그런 꼴통들과 말할 시간도 없고 같이 천하를 도모 해보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어요. 

난 단지 혼자 평범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 꼴통들에게 단지 한마디 한다면 '그 병을 고쳐라' 할 뿐인데도 못 알아들으니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 사이비도 엄청 많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꼴통을 부추기는 꼴통들입니다. 

자꾸 눈먼 장님이 장님을 부추기니까 더 신나서 자기 이론을 못부수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옛선사들이 중요한 것을 꼭꼭 숨겨두고 함부러 내 보이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드러내면 낼 수록 눈 뜬자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고 병든자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붓다 여러분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앎을 내 세우면 바로 병인 줄 알아야 해요. 

그러면 적어도 사이비 소리는 듣지 않습니다. 

공은 텅텅 비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색이 없어요. 물질이나 색갈도 없습니다.  

또한 느낌도 없고, 생각도 없고, 작용도 없고, 식별도 없으며.... 

만약 누가 어떤 느낌을 받고 이것이 공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병인줄 알아야 해요. 

또한 생각에서 나온 말이나 행동이나  기괴한 언어, 특이한 지식을 내세워도 절대 공을 모른 것입니다. 

공은 이 모든 것이 다 빈 상태인데 어찌 이런 것으로 공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공은 할을 하여도, 기이한 몸짓, 행동, 말도 적당하지 않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고 하여도

공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공은 눈도 없으니 눈을 껌벅여도 안되고, 귀도 없으니 기이한 소리를 내어도  안되고,

코도 없으니 냄새로서 알게 하려고 하여도 안되고, 혀도 없으니 맛으로 느끼게 하여도 안되고 

몸이 없으니 감촉으로도 공을 표현할 수도 없고.  정신이 없으니 어떤 뜻으로도 그 공을 제대로

표현 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참선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전후가 끊어져 고요한 정신의 세계를 잠깐 느끼고는 

아~알았다!

바로 이거야 ! 이 정적한 경지가 바로 공이야 그리고 열반이야... 하고는  자기가 깨달았다 하고는

오도송을 짓고 미친 짓을 하길레... 제가... 정신 차려라...

너는 지금 느낌으로 혹은 정신으로 그 곳을 안다고 하는데 

그렇게 느꼈던 곳을 과거의 모든 사람들도 수없이 느꼈다 

그래도 모두 정신의 한 현상으로 알고 넘어갔는데 너는 유독 그걸... 좀 보고 참을 봤다고

그렇게 부산을 떨고 그러냐  하고 주의를 주어도 아니래요.

자기가 본 것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절보고 모른데요.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그 경계 못보았지요?

전 보았심더....그러니 제가 깨달은 것이 확실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네가 병이 깊이 들었구나' 그 병 고쳐라 라고 말해 주었는데도

아직도 못 깨우치고 여전히 헛소리 하고 다닙니다. 

도대체 뭘 본다는 말입니까? 

근원이 텅 빈 공에서 시작하여 공으로 돌아가는데...공을 느낄수도 없고 볼수도 없는데.... 

참(眞)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어찌 느낌을...생각을...뜻을 그렇게 붓잡고서 뭘 깨달았다고

할수있단 말입니까? 

모다 병인줄 모르고 기이한 헛경계에 유혹당하여 거짓을 참으로 알고있을 뿐입니다. 

이런 병에 대한 주의는 안 듣고 제가 깨달아도 미미한 습기는 남아있을 수 있다는

말만 가져다가  견성방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마음에 탁 붙이고는 

자기는 깨달았는데 아직 습기가 남아있을 뿐이라며 그 습기를 제거하는 공부를 하고 있데요....

그렇다면 책을 많이 읽은 사람도 깨닫고, 뭘 특이한 것을 알은 사람도 깨닫고.... 

다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에 도인이 꽉찼을 것입니다. 


붓다여러분, 오늘 제가 명확하게 말합니다만 

뭘 안 경계와 깨달음의 경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셔야 합니다. 

앎은 앎일 뿐입니다. 그 앎을 버려야 깨달음입니다. 진리를 듣는 순간,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앎은 저절로 버려지는 것입니다. 

끝없이 앎을 내세우면서는 절대 깨달은자 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무의식을 끊어낸 상태가 깨달음입니다. 

진리를 논함에 작은 앎이라도 세우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자는 절대 깨달은 자라고 말하지 못해요. 

깨달음은 순간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것이 아냐요. 

깨달아도 아주 미세한 것은 남아있다는 그것은 너무 세밀해서 남은 모르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남이 벌써 턱 아는 경계로 어찌 깨달았다 합니까?

그 미세한 습기를 살아가면서 마저 제한다 하는 것이지  의식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제말은 일목요연합니다. 

원래 붓다이나 여러분은 집착으로 인하여 자신의 참 모습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앎을 통하여 자기가 붓다임을 알았으나 그것이 깨달음은 아닌 것입니다.

자기의 정체를 알았을 뿐야요. 

깨달음은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순간 단번에 깊이 들어가요. 들어가는 노력을 훨씬 줄인 상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 붓다임을 알고 붓다행을 하다가 보면 언젠가 단번에 묵은 때를 벗겨내고

들어가길 바라면서 강의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빨라요. 

무심으로 살아갈 것

한 생각이라도 용납하지 말것

기특한 경계를 이상 경계로 삼지 말것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말것


항상 고요하게 고요하게 살아갈 것

그러다 보면 어느날 저절로 그 깊은 맛을 알게 될 날이 옵니다. 

그때 깨달음도 오고 선어구도 다 알게 되요.....

 

선사들과 한마디 법거량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요.

오늘은 공에는 색 느낌 생각 작용 식별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뜻도 없다는 것까지 하고 마칩니다. 

붓다여러분! 스스로 붓다의 정신을 잃지 맙시다. 

항상 겸손하시고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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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남도 아니고 줄어듬도 아니니라.

불교의 법문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합니다.

不二法이란 둘이 아닌 법이라는 뜻입니다.

둘이란 상대적인 양변의 세계를 말합니다.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현상계를 다 부정합니다.

그것이 형체가 되었건 비물질적인 무형체가 되었건 상관없이 다 부정합니다.

특이 둘(二)을 부정하는 법으로 유명합니다.

둘이란...생과 사, 유와 무, 존재와 비존재, 더러움과 깨끗함,

부자와 가난한 자, 부처와 중생....등 상대적인 세계를 말해요.

세상의 모든 개념은 결국 상대적인 언어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 영리한 자와 똑똑한 자 보살과 평범한 사람...

이 모든 것을 한마로 둘(二)이라고 해요.

그런데 부처님은 기본적으로 이 둘을 부정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불교의 심오한 세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무와 유를 다 부정하는데 여기 반야심경에서 색(존재)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라는 말도 일종의 양변을 부정한 말이고 유와 무를 부정한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경전에 유를 부정한 경우는 많이 나오나 무를 부정한 경우는 적게 나옵니다.

없는 것이 아니고 有를 부정하는 끝에 항상 無도 부정해야 한다고 앞을 유추하여 알라고 짧게 말할 뿐입니다.

금강경에 보면 상을 타파하라는 말이 수없이 나옵니다.

相(象과 同字)은 형상을 가진 것이든지

마음에서 생각하고 정해놓은 정신 세계든지 상관없이 다 상(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중생이 상에서 부처를 찾거나 음성에서 부처를 찾으면 절대 부처를 보지 못한다고 하였어요.

부처는 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형체를 말하기도 하나 마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상입니다.

금강경은 철저히 상을 부수므로 해서 참 자기를 깨달아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상을 부정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러한 이유가 바로 불교는 무와 유를 부정하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모태로하고 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로 有, 즉 相이나 色(물질)을 부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설법하셨습니다.

중생은 눈에 보이는 형상에 많은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눈앞에 어떤 현상에 유혹되는 삶을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 형상이 아침 이슬과 같이 허망한 것이고....

인생이 한낱 꿈과 같은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조차도 원래 없는 것이니 그것을 깨닫고... 지금 몸뚱이는 업신이요,

연기처럼 하늘에 떠가는 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니 삶에 큰 의미를 두지 말고 .

삶은 꿈과 같은 것이니 집착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명예에도 집착하지 말고,

처나 자식에도 집착하지 말고 고요하게 무심으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거의 모든 경전에 이렇게 有를 부정하는 쪽에 초점을 맞추어 설법하십니다.

이것은 중생의 병(病)이 유有쪽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여기서 혼란해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전쟁도 유의 집착때문에 일어나잖아요.

일종의 有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유에 집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웬만큼 불교 공부를 하면 모두 인생을 허망하게 보고 꿈 처럼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번에는 無病이 빠지게 됩니다.

아니면 정신적인 고상한 것을 찾게 되요.  정신적인 고상한 것.....

바로 니르바나요, 깨달음의 세계요, 극락세계이고, 청정 불국토입니다.

그래서 그 니르바나(涅般)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은 病일 뿐입니다. 무엇을 찾고 얻는다는 것.....

이것 부처님의 눈에는 가소로운 것이고 무엇인가 조작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렇게 얻을 만한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사들도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던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깨달으면 남이 얻지 못하는 어떤 것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그것조차도 버리라고 끝없이 쉬고 쉬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가르침 속에서 또 無病이 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병.....이것이 無病입니다.

분명 밥먹고 잠자고 걸어가고 말하는 자가 있는데 어찌 없다는 無에 걸려있는

것이 올바로 가는 것이겠습니까?

여기 가끔 와서 불교에 대하여 아는 소리를 한다는 사람들 가만히 하는 말 들

어보면 전부 無病에 빠져있어요.

그걸 가지고 뭘 좀 알았다고....깨달았다고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無病도 有病(존재가 사실이라고 집착하는 증세)만큼 심각한 병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그것 無조차 버리라고 닥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무 아니면 유 를 선택하는 습관이 자동으로 되어있어요.

그래서 무병을 고치라하면 유병에 빠지고 유병을 벗어나라하면 무병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세계가 버젖이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무아니면 유에 빠지는 것입니다.

무병도 벗어나야 합니다. 유무에 상관하지 말아야 해요.

동시에 두 측면을 다 버려야 합니다.

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면 어디가 無도 아니고 有도 아닌 세계이냐하면 바로 마음의 세계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처럼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게 하고 내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마음은 굳이 표현한다면 무심이라고 하지만 무심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니 무심이지요.

무심이라는 글자가 마음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찌 마음을 무심이라고 합니까.

문자에 매여있는 초심자는 무심이라고 말할 지 몰라도

말과 뜻을 벗어난 장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처럼 무심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인데

그 놈은 모든 것을 맘대로 그렸다가 지웠다가 하고(생멸)

신도 만들고 우상도 만들고 존귀함도 만들고 미천함도 만들어요.

모든 것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 마음이 만든 것입니다.

허상을 세운 것입니다.

형체없는 마음이 우주의 주인입니다.

바로 붓다입니다.

그 붓다가 저마다 사람에게 들어가 있는데 자기가 누군인지 모르고 허상을

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선사나 선생님은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우주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다고 무無병에 빠져들면 안되요.

부처님 말씀은 없다는것이 아니고 '아니라'라는 말입니다.

수없이 그대들이 단정하고 결론 짓는 것

그것은 허망한 마음이 지은 것일뿐 더럽다 깨끗하다,

늘어났다....줄어들었다

부자다 가난하다....

그것은 모두 자기가 지은 것입니다.

나도 없는데....도대체 누가 부자이고 가난한 자입니까?

우주가 본래 공에서 탄생된 것이라 안개처럼 허망한 것인데

온갖 명칭을 스스로 세워놓고

가지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고

조금 가지고 있으면 있다고 헛되이 남에게 뽐내고 자랑합니다.

엊그제 산에 올라가니까 산에 말없이 서있는 소나무들을 보니까

사람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나무는 무심으로 살아가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소나무보다 덜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나무는 생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뿌리가 잘려져 나가도 자존심을 상해하지 않습니다.

공해도 소음도 짜증내지 않고 잘 견디고 있고 나무를 잘라가면 못생긴대로

살아갈 뿐 못생겼다고 ....우울하다고,,,,

가을이 되어서 쓸쓸하다고 남괴롭히고 소주먹고 싶다고 강짜내지 않아요.

소나무에게는 깨달음도 한낱 욕망이 일어난 한 티끌일뿐 필요하지도 원하지 않은 채

죽는 날까지 왜 사냐고 묻지도 않고 왜 죽어야 하느냐고 묻지도 않은채

그냥 고요하게 살아갑니다.

뿌리가 잘려져나간채 흉물스럽게 몇가닥 뿌리로 겨우 지탱하고 있어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먼 바위 벼랑에 몇백년 난쟁이로 찬바람 거칠은 비바람을

맞으면서 고독하게 살아가도 고요하게 살아갑니다.

다만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뿐 고요하고 고요합니다.

사람처럼 고통이 없고 삶의 애환이 없이 평생 살다가 죽어서 본래 없던대로 돌아갑니다.

마치 붓다의 삶처럼.....

그래서 만물이 부처님의 분신이라고 했어요.

알고 보면 모두가 부처님의 일생을 살아가요.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기 전까지는 늘 고통속에 살아갑니다.

다른 고통이 아니고 자기가 세워 놓은 개념이나 명칭에 빠져서 괴로워합니다.

스스로의 앎때문에 스스로 고통스러워하니 불쌍한 중생이지요.

왜 울어야 하는지 모르고 울고 왜 슬퍼해야하는지 모르고 슬퍼해요.

그래서 고통을 벗어나라고 부처님은 양변을 부정한 것입니다.

앎을 바꿔주고 있는 것입니다.

不二法!

둘이 아니다...... 하나도 아니다.......

둘은 없느니라....없다는 그 하나조차 없느니라...

그런 개념에 끄달리지 마라.....

無에도 有에도 떨어지지 마라

무엇을 먹던 무엇을 행하던 그 의미에....허망한 뜻에 떨어지지 말고 항상 고요해라.

무엇이든지 하라.... 해야하는 것이라면 다 하라.

그러나 무에도 유에도 집착함이 없이 고요하게 하라.

이것이 마음이 행복한 자의 행이다.

유가 좋으니 무가 좋으니 집착하지 말고 떨어지지 마라

그런 개념을 아예 지워버려라.

더럽다 깨끗하다, 부자다 가난하다, 그런 개념을 다 지워라.....

단지 있는 그대로 열심히 일하여 얻은 소득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소득에 맞게 먹고 살고 여행갈 뿐. 여행을 꼭 가야 행복하다든지....

가지 못하여 불행하다든지 하는 생각을 내지 마라.....

갈 수있으면 가고 못하게 되면 못가는 것이다.

성철스님이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을 두문불출하고

산에서만 살았어요.

그 뒤로 57세경에 해인사 방장이 되었는데

82세 사망할 때까지 근 20여년을 역시 어디 가지 않고

산속 암자에서만 살았습니다.

남들은 큰스님이라 해도 스리랑카, 인도, 중국, 유럽여행가는데 혈안이

되어있어도 성철스님은 아무데도 안갔습니다.

20년간 오직 해인사 백년암에서만 고요하게 ...

아무 원함도 없는 채.....해가 뜨면 밝다 하고 해지면 어둡다면서 잠자고....

고요하게 고요하게 살았어요.

답답해하지 않고....그런데 저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 방학동에 들어온지 지금 벌써 15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무데도 안갑니다. 우선 가고 싶은 데가 없어요.

도대체 움직이기 싫습니다.

그래서 여행도 안가고....해외도 안가고....제주도도 아적 안가봤습니다.

남들 다니는 것 부럽지도 않고 굳이 가고 싶다하는 데가 없어요.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면서 마음이 자꾸 쉬어지기 때문입니다.

한해 다르고 또 한 해가 달라요. 점점 고요해집니다.

늘 고요한 마음 가득하니 아침에 일어나면 고요하고

저녁에 잘때까지 하루종일 고요하니

나날히 알수없는 충만으로 가득하고 마음은 항상 든든합니다.

생각속에 빠지지도 않고 참선하고 책읽는 재미로 그냥 그렇게 하루를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참다운 진리를 제대로 안다면 도대체 무엇에....

어떤 의미에.....어떤 개념이나 명칭에 유혹되겠습니까?

남말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 많이 하세요.

매순간 한생각 일어날 때마다 잡아채서 싹싹 비벼버리세요.

그렇게 습관되면 한 생각 일어나기도 전에 바로 쉬어버립니다.

여러분이 그런 훈련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한번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

혹 자신의 말에 대하여 부인이 이상하게 반박하고 대들면 곧 성질이 나고

나중에는 욕설이 오고 가고.....서운했다가 삐겼다가 수시로 반복합니다.

며칠은 조용하다가 며칠은 괴롭다가 .....

한 달은 잘되었는데 어느날 말짱 도루묵이 되고.....

이것 모두 평상시에 한생각 일어나는 것 잡아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잡아내고 잡아내어 용납하지 마세요.

처음에는 곤욕스럽고 힘들어도 자꾸 하다보면 남의 말에 반응하지 않게 되고

자기 생각에도 끄달려가지 않게 됩니다.

남말에는 유혹되지 않아도 자기 생각에 유혹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그것도 용납하지 마세요.

오직 모든 것은 부처님께 턱 맡기고 고요하게...고요하게....

그리 살다 보면 어느날 마음이 크게 열려서 우주의 비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교는 요가처럼 무슨 쿤탈리니 같은 기가 도는 현상 같은 없습니다.

누구나 부처라해도 지극히 정상인과 같습니다.

운기현상은 상을 찾아서 수행하는 이상세계입니다.

그런 세계를 설정하면 작은 것에는 통달하게 될지 몰라도 큰 깨달음은 얻지 못합니다.

오직 쉬어가세요. 당신이 부처이니 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당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납니다.

부처행을 하면서 고요하게 고요하게 시간을 보내세요......

억지로가 아닌 저절로 당신이 정말 고요한 것을 체득하고 더이상

구할 것도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선문답의 뜻도 즉시 드러납니다.

그러거들랑 멋들어지게 여기에다 꾀꼬리처럼 깨달음의 노래 한번 짓고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가세요.

그 어떤 사상이나 뜻이나 생각에서 끄달리지 않는 자유로운 삶.......

그런 삶을 붓다의 삶이라고 합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겸손한 삶... 잊지 마세요.

생과사, 공과 색, 더러움과 깨끗함, 늘어남과 줄어듦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뜻에 끄달려서 부처가 어리석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게 붓다라하고

당당하게 붓다의 행을 하나하나 실천해가세요.

모두 행복하심을 축하드립니다.

저 오래전부터 얻은 그 행복 맘대로 사용하다가 즐겁게 살다가 가세요.

 

10.不垢不淨( 불구부정 )

 

▶不垢不淨 ( 불구부정 )

더러움도 아니고 깨끗함도 아니니라.

지난 시간에 설명해드렸듯이

아니라는 말은 저기 지금 어떤 현상이 있는데 그것을 잘못보고 있을 때 아니라고 교

정해주는 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無는 없다는 말이니까 아예 처음부터 부정한 것이고요.

아니다는 그 현상을 부정하는 말입니다.

인도는 현실을 아예 없는 것으로 본 것이 아니고

어떤 사건이 있지만 그것을 보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로 아니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더러운 것이 있다고 하겠으나

부처님이나 보살의 관점은 그것은 더러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그렇게 보고 있을 뿐이지 사실의 입장에서는 더러움은 없다는 뜻이지요.

부처님은 중생이 괴로워하는 것은 모두 자기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를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스스로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에 걸려서 괴로운 것입니다.

옐들어 누가 나에게 스발느므스키....못된 놈...하고 욕설을 하였다고 합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이 발개지면서 발끈할 것입니다.

아마 면전에서 그렇게 욕한다면 누구나 찜찜해할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럽다' 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 뒤에 깨달음을 통하여 특별히 무엇을 얻은 것은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도 부처님은 나는 전혀 얻은 것이 없다고 했어요.

이것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설마 부처님께서 정말 얻은 것이 없었을까....? 하고 생각하겠으나... 정말입니다.

부처님은 무엇도 얻은 것이 없어요.

금강경만이 아니고 부처님의 경전 어디에도 나는 무엇을 얻었노라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후 보살과 선지식들....그리고 중국의 선사들도 아무도 나는 이렇게 깨달았노라

하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얻은 것이 없노라 하니까

모두 얻은 것이 없다고 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얻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상에 떨어진 사람이고

절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부처님이나 선사들은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단지 생각을 바꾼 것일 뿐입니다.

생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더러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다 라는 생각이 잘못된

관점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말을 통하기 위하여 그런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진실의 입장....절대적인 法에서는 생과 죽음과 더러움과 깨끗함은 없다라는 것을안 것입니다.

여기 한무더기 똥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사람들은 모두 더럽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음식물이 삭고 녹아서 ....일종의 화학반응으로

그런 물질이 된 것이지....그래서 그런 냄세가 나는 것이지 ...

하나의 자연물이요, 찌꺼기일 뿐.....

그것의 실체는 더러움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떤 물질도 같은 것은 없어요.

모두 자기만의 향기와 개성을 갖고 있습니다.

꽃은 꽃의 향기...버섯은 버섯의 향기...나무는 나무의 향기....

그 많은 물질이 다 자기만의 냄새를 냅니다.

그처럼 똥은 자기만의 냄새를 낼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럽다라고 생각하는 존재는 오직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위대한 것이 아니고 괴로운 것입니다.

이 우주에 그 누구도 그것을 더럽다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직 사람만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면 다른 것들은 틀렸고 사람만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사람만 잘못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릇된 앎으로 인하여.....스스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앎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괴롭지 않은 존재입니다.

무엇을 들어도 보아도 항상 편안한 존재입니다.

본래 무심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무심에다 어느날 우연히 잘못된 앎을 새겨넣고 누가 더러운 놈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괴롭고 분노를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명이라고 합니다.

▶無明....밝음이 없음

중생은 이 무명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분노내고 합니다.

무명은 바르게 알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무명은 혹 無知라고 번역합니다.

알지 못하여 어두운 삶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욕했다고....나를 무시했다고....서운하게 말했다고....

섭섭해하고 분노내고 흔들리는 것은

마른 하늘에 천둥이 일듯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이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러움은 본래 없는 것인데 스스로 엉뚱한 앎을 일으켜서

더러운 것이 있다는 앎을 세워서 공연히 그 말을 듣고

터무니없는 분노를 일으키거나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겠습니까?

본래 있지 않는 것인데 있다고 스스로 만들어서 누가 그런 말을 하면 괴로워해요.

명심하세요. 그 누구도 나를 괴롭힌 적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나 보살은 이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무엇을 얻은 것이 아니고 앎을 바꾼 것이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이렇게 앎을 교정한 것입니다.

그러자 곧 편안하여졌어요.

그동안은 왕자가 출가하여서 무엇을 얻어서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야 위대한 붓다인

줄 알았는데 스스로 완전한 존재였고 모든 앎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그대로 바로 붓다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천기를 읽고 남이 모르는 것을 특별히 알고 남이 하지 못하는 신통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다만 모든 앎을 버리기만 하였어요.

그래서 대해탈을 얻은 것입니다.

아무것도 주장할 것이 없으니까 마음이 고요해졌어요.

그것을 니르바나(涅般)라고 했어요.

물론 부처님이나 조사들도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느니라 라는 깨달음으로

그것 한번으로 바로 편안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생도 없고 사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이 사실에 먼저 깊이

감명받았고.....그리고 그 감명에 의지하여 더러움과 깨끗함에 흔들리지 않도록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원래 고요한 우주에 중생이 스스로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관념 때문에

무의식 깊은 곳에 앎이 저장되었어요.

이것을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앎이 순간순간 튀어나오므로 이것을 제하는 훈련을 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능엄경에서 이즉돈오 사즉점차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즉 깨달음은 찰라이나 그 실천은 점차되느니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여 선사들도 깨달아도 보림수행하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원오스님과 대혜스님도 다 그렇게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무엇을 알기만 하고 행이 안된다면 아무 소용없잖아요.

그래서 깨달음후에도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했어요. 경봉스님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깨달음은 쉽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스스로 완벽한 부처인줄 알고 진실은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

는 것을 깨달았다면 바로 깨달음입니다.

여러분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부처입니다.

본래 부처입니다.

그러나 그 부처가 부처행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동안 닦아야 합니다.

얼마나 닦아야 할까요?

여러분이 불생불멸 불구부정을 불확실하게 이해하였다면

공부는 쉬워집니다. 매순간 달라지고 매년 달라져요.

그러나 이 불생불멸 불구부정을 알기만 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낼이면 도루묵이 되요.

그래서 부처님 말씀은 깊이 새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되려면 영혼에 깊이 새겨야 됩니다.

제가 이 진리를 처음 깨달았을 때가 20년 전입니다.

그때 너무 반갑고 ...기쁘고....놀라서...

한 달을 멍하게 지냈어요.

온 도시를 미친 사람처럼 걸어다녔습니다.

아침 밥을 먹고 하루 종일 쏘아다니다가 저녁에 돌아왔어요.

출가한지 10년 만에 혼자 스스로 알은 진리였는데 감동이 매우 컷습니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컷는지 평상시 가을만 되면 쓸쓸하던 병이 사라졌어요.

10년을 넘게 가을만 되면 외로움.... 고독....허무함등으로 은근히 가을을 쓸쓸히

보냈는데 한 순간 딱 끊어진 것입니다.

심병은 마음으로 고쳐야 합니다. 자각이 일어난 순간 고쳐집니다.

그뒤 화두를 들고 여전히 정진하였는데

불생불멸 불구부정을 알아도 여전히 마음에서 분노가 있고 소심함이 있어요.

물론 전보다는 훨씬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미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공부목표가 되었고....

드디어 화두 일념이 나타나고 24시간 화두가 성성해지는 순간이 오자

화두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내부에서 다시 한번 더 각성이 일어나 고요해지고....

그 뒤로 화를 좀처럼 안내는 사람이 되었어요.

물론 간혹 일을 위하여 화를 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일부러 낸 것이고....그조차 점점 줄어듭니다.

요즘은 거의 화를 안내요.

낼 일이 없어졌어요.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그러나 속썩히는 사람은 아직 있어요.

저도 인간관계가 있으므로 화낼 일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는데도 갈수록 가만있어요.

가능한 대화로 하려고 하지요....

요즘은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어야 한다고 여전히 참선하고 기도하면서 정진합니다.

대혜스님이 70세가 되어도 마음을 점검한다고 하였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대혜스님은 중국에서 유명한 선승이었지요.

그 정도로 우리의 病은 깊고 그 병을 제거하는 깨달음은 사실 큰 약인 것은 사실이

나 완전하지는 못해요.

깨달음은 한순간 느낌이나 病은 다생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더러움이 없다고.... 그러면 모두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안되요.

깨끗함도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단지 물일뿐,,,,나무일뿐,,,,사람일뿐,,,,혼자 살뿐,,,,장가를 안갔을뿐,,,,

장가갔을뿐... 그 누구를.... 그 무엇도 그것을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병입니다. 이 병이 스님들에게 많아요.

스님이 되면 첨에 스스로 깨끗하다는 병에 걸립니다.

왜냐면 부처님께서는 스님들을 삼보에 넣어서 예배받는 위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되면 누구나 예배를 받습니다.

저도 신도들이 와서 절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자기가 깨끗하고 위대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정신은 여전히 혼탁하고 아직도 분별이 남아있고 명예와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이면

서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때문에 껍데기를 보고 남이 존경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부처님과 동일시가 되어요.

이때 고치지 못하는 아상이라는 병이 드는 것입니다.

저도 이 병이 심해서 한동안 고생했어요.

장가 안 가고 혼자 사니 깨끗하고....수행하니...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했죠.

이 병을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요.

이 환경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잘 안됩니다.

그래서 아주 고생해서 그 아상 버리는 공부를 했어요.

지금은 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열려서 마이 나아졌어요.

늘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나는 스님이 아니고 다만 한낱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여기 가끔 결혼한 스님들이 찾아옵니다.

구도열이 대단해요. 참선도 열심히 하고 겸손해요.

저는 그분들에게 항상 똑같이 대합니다. 마음에서 쓸데없는 아상이 없어요.

같이 말하고 웃고 같은 고민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독신승들은 자기들만이 오직 깨끗한 진짜 수행자라고 생각해요.

스님끼리도 결혼한 스님을 만나면 약간 무시해요. 겉으로는 안그런 척해도 내부에서

차별을 두어요. 너는 속인과 무엇이 다르냐고 하죠.

이것이 바로 병이요, 21세기에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사고방식입니다.

신도들은 더해요. 아직도 반야심경을 파악하지 못하는 신도 많아요.

인간은 평등해요. 신도에게 불법을 수행하길 바란다면

결혼한 스님도 청정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장가갔다고 더러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식의 논법은 틀렸어요. 부처님은 더럽다 깨끗하다는 생각이 없어야

그것을 청정이라고 했지 외부적인 어떤 것을 청정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언행이 부처님 말씀에 맞아야 합니다.

그런 쓸데없는 오만한 사고 방식을 고치지 못하는 사이에 타종교는 이미 불교의

도 절반을 뺏어가 크게 번성하고 있고 불교는 저 밑으로 쳐져 있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깨끗함은 없어요.

다만 그 자체일뿐이지 깨끔함은 없습니다.

만약 깨끗함을 찾으면 죽을 때까지 찾아도 절대 찾지 못해요.

그런 것은 본래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함을 좋아하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병들은 것인줄 알아야 합니다.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는 줄 알아야 바론 안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행복해져요.

무엇을 보아도... 들어도 마음은 흔들림이 없고 고요해집니다.

고요함....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가지고 있는 천연의 자성이요, 붓다의 심성입니다.

그 고요함을 항상 지켜서 거기서 조금도 나아가지 마세요.

부처님도 이것을 깨닫고 바로 고요해졌을 뿐 무엇을 얻은 것은 없습니다.

모두 나날히 행복하시고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9.不生不滅(불생불멸)

 

舍利子 是諸法空相 (사리자 시제법공상 )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은 공한 모양이니

 

여기서 또 사리자여~ 하고 관세음보살이 이름을 부릅니다.

먼저 번에도 말했듯이 이름을 부르는 데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고 하였는데...

아직도 그 숙제...모두 못풀었나요?

금강경 강의를 읽고 반야심경...그리고 무심론 전심법요...완능록 선서를 다 읽었는데도

아직도 사리자여! 라는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것을 모르면...안됩니다.

배우긴 배웠는데 자기 것이 되지 않은 것이고...또 알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한것이고....

설사 확신은 하여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의 답이 있으니 ....화두, 선문답, 인생의 의미, 반야공사상....

다 들어있으니 척 듣는 순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공부가 끝나요.

나무를 아는 사람은 나뭇 잎만 척 보아도

그 나무의 건강 정도를 알고

거지는 굴뚝에 연기가 나기만 해도

누구네서 밥주는지 알고 그리로 걸어가요.

엊그제 방송에서 소금치는 사람에 대하여 나왔다는데

김치에 간하고 고기에 간하는...소금치는 사람인데

척 소금을 한 움큼 짚으면 20g이래요.

그 생선은 소금을 딱 20g만 넣어야 한데요. 넘쳐도 모자라도 안되고 딱 맞아야

맛있다는데 저울에 달지 않아도 척 짚어서 치면 20g이랍니다.

그래서 기자가 가서 한움큼 짚은 것은 저울에 달았보았더니 20g이드래요

한 참 후에 다시 또 달았보았더니 역시 20g이드래요

소금치는 사람은 짚으면 척 척 20g인데....

그동안 그렇게 강의를 듣고도 이 문제를 못풀다니....

여기서 작심하고 7일간 아란존자처럼 용맹정진하여

그 뜻을 알아보세요.

어째서 사리자여! 여기에 다 들었다고 했을까?

여기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화두에 대한 답도 있다는 것일까?

계속 연구해서 낭중에 답을 올리세요.

법法은 불교에서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진리, 법칙, 만물....등으로 번역할 수 있어요.

법은 만물을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공空에서 법法이 나오고 법에서 만가지가 나왔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주 씁니다.

여기 法은 절대적인 法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더럽다, 깨끗하다, 귀하다....천하다...등은 法이 아닙니다.

주관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왜냐면 그런 기준은 때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교에서는 더럽고 깨끗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쇠는 나무를 자른다...거나 불은 나무를 태운다...

땅에서 곡식이 나온다....물은 불을 끈다...

이런 것은 法이 될 수있어요.

法이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물이 간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물이 가려면 반드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물은 위에서 낮은 데로 가는 조건에 합해야 흐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낮은 데로 가는 것이 물이듯이 이 법은 절대적인 것, 불변,

꼭 그러한 것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반드시 그러한 것이어야 法이라 할수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우는 불법佛法은

각 종 민법이나 상법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러한 것, 진리, 법칙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안 먹으면 죽어요. 이것 법입니다.

걸으면 반드시 앞으로 나가요. 이것도 법입니다.

원래 법칙은 만들수는 없어요. 다 발견한 것입니다.

여자는 애를 낳아요, 남자는 못낳습니다. 이것 발견야요.

우주에는 무한한 법칙들이 있어요.

아직 발견하지 못한 법칙도 많아요.

어떤 운명학자는 사람이 들어오면 척 알고 당신 무엇 때문에 왔지요?

하고 말한 답니다. 물론 그거 아는 법 육임이라는 학문이 있기는 하지만

이 사람은 육임을 공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명리를 한참을 연구하니까 우리 일상사에 모든 것이 전부 음양 오행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터득했어요.

옐들어 사람이 들어오는데 왼쪽으로 기우뚱하고 걸어들어오면 양陽이야요.

오른 쪽으로 기우뚱 거리면서 걸어들어오면 음陰이고...

그런 식으로 전부 음양 오행으로 통해있기 땜에 들어오자 마자....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자식때문에 왔구나....하고

알고 몇 가지 사항을 파악해서 '부인이 잉태했는데 아들인가 딸인가

그걸 물으러 와구먼...' 한데요....

그러면 깜짝 놀라면서 '아니 선생님,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한데요.

"다 아는 수가 있지....그런데 딸이야..."한데요.

그러면 정말 나중에 보면 틀림없이 딸이래요.

이 사람이 신이 들려서 아는 것이 아니고 통해서 그런데...

뭘 통했느냐하면 법칙을 알은 것 뿐입니다.

알고 보면 쉬운데 그걸 안가리켜주어서 현재 그걸 배운 제자가 없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발견했으면 우리도 발견할 수 있어요.

누가 7일간만 연구해보세요...당신도 발견할 수있습니다.

하얗튼 그것도 법칙法則을 발견한 것입니다.

황우석씨도 유전자 재생법을 발견한 것이고

우주는 무한한 법칙들이 있는데....발견하기만 하면 되요.

무엇이든지 있어요. 그런데.....

이 법은 빈 곳에서 나오고....절대적인 법조차도

그 근원은 빔이라는 말이 제법공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 번역을 '모든 법은 공한 모양이니라' 이라고 해도 되고

모든 법의 공(法空)의 모양은... 이라고 번역해도 됩니다.

두 번째는 법공法空을 하나의 단어로 보는 것이야요

어쨌거나 뜻은 같습니다.

모든 法의 근원은 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법은 곧 공인데 ...그러므로 이러하고 이러하니라....

하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不生不滅 ( 불생불멸 )

생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으며

반야심경은 이 대목과 앞으로 나올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한

뜻만 알면 다 아는 것입니다.

사실은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이 세 마디를 설하기 위하여

반야심경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읽고 예로 부터 많은 스님들이 깨달았던 유명한 내용이지요.

그 첫 번째 대목이 바로 불생불멸인데 생도 없고 죽음도 없느리라.....

정확하게 번역하면 생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니라 이렇게 해야 합니다.

없다는 無이고 아니다는 不인데 물론 같은 의미이지만

無는 아예 첨부터 없다는 말이고

不는 어떤 것이 저기 있기는 한데 '아니다' 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 인생은 生도 있고 死도 있어요.

분명히는 아니고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것을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은 저것은 生과 死가 아니니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역할 때 아니고....라고 번역해야 하나

사실은 없다는 말뜻입니다. 대체적으로 중국의 선서는 다 없다 (無)로 사용했어요.

▶無生無死!

중국 사람들은 뜻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고 본질을 꿰뜷어보는 훤한 눈을원했기 때문에....

또 의미를 확실하게 해두어야 .... 또한 의미를 확실하게 해두려는 중국사람들의 속성상....

▶無生無死

이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不대신 無를 대신 넣어도 틀린 말은 아니어요.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현상계를 인정하면서 다른 세계를 말하고 싶어서 不자를 썼고

중국 사람들은 현재 조차도 인정하지 싶지 않고 바로 이상을 높이 세웠던 탓으로

無를 써서 말한것 같습니다.

중국은 신선 사상이 강해서 산으로 아예 들어갔고....

그래서 불교도 산중불교가 됐어요.

그러나 원래 인도에서 불교는 산중의 불교가 아니고 마을에 있는 불교입니다.

인도 불교는 인가와 가까운 곳에 절이 있어요.

매일 걸식해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인가에서 멀면 안되요

그러니까 현상계를 인정하면서 말하려니 없다는 말보다는 아니다는 말로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生도 아니고 죽음이 아니다. 라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 不生不滅

이라는 말 하나에도 중국 불교와 인도 불교의 차이를 엿볼수 있고

나라마다 해석도 약간씩 다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글자에 대한 것은 이쯤하고 ... 그럼 왜 生도 없고 死도 없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생사는 겉을 본 것이고 성자들은 속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과 영혼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나 성자들은 원래 공에다 기반을 두고 설하기 때문에

나는 없고 따라서 죽는 자도 없고 태어난 자도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요.

죽는 것이 아니고 자연으로 회귀이고 오히려 자연으로 태어남인데 무엇이 죽음이겠어요?

생각해 봐요.

딱 죽음의 순간 저쪽에서는 곧 태어남인데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생과 사는 연결된 하나의 사건인데 어떻게 딱 죽음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죽음은 저쪽 세상에서는 탄생이잖아요. 그런데 어찌 죽음이 있고 태어남이 있겠습니까?

영혼도 하나의 형상입니다.

원래 육신도 없었으나 공에서 생겨났듯이 영혼도 원래는 없는 것이나

우리의 정신이 만든 또 다른 세계가 영혼입니다.

영혼은 마치 양파 껍질과 같습니다. 양파는 전부 껍질로 이루어져있어요.

그 껍질을 다 까버리면 알맹이는 없습니다.

그처럼 영혼도 분명 하나의 형상이기는 하나

집착을 다 버리면 영혼 자체도 없어지고 맙니다.

돈에 대한 집착, 명예에 대한 집착,....

부자에 대한 집착....더러움이 있고 깨끗함이 있다는 집착....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한 집착.... 슬픔, 외로움,기쁨.....

이런 것에 대한 집착이 덕지덕지 쌓여서 하나의 체를 이룬 것이 영혼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분명 윤회합니다.

6세상으로 가는데 천당, 인간, 축생, 아귀, 아수라,지옥입니다.

누구나 이 중에 한 곳으로 가서 다음 세상을 살아가요.

그런데 윤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깨달은 자입니다.

왜냐면 깨달은 자는 깊이 뿌리밖혀있던 모든 개념들을 다 지워버렸어요.

그렇기 때문에 영혼이 비워졌습니다. 이 생에 몸은 마지막 육신입니다.

육신이 다 닿으면 이제 다시는 윤회하지 않고 영원히 고요한

붓다의 세계에 돌아갑니다. 대우주의 근원으로 회귀해요.

우주의 근원....붓다의 세계....空....이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붓다의 세계에 들어간 것을 적멸에 들어갔다하여 '열반'이라고 말합니다.

▶ 열반=니르바나=적멸=고요

적멸이란 다시는 분별이 없는 고요한 세계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고통이 없는 해탈의 세계라고 해요.

그런데 만약 누가 알기만 하고 무의식에 아직도 더럽다 깨끗하다, 옳다 그르다에 대

한 집착과 분별이 남아있으면 그것은 깨달은 자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알 때 정신이 확 바꿔져야 해요.

진리를 들으면서 깊이 새겨지고 사실로 인정이 되면서

그동안 어리석었던....나를 중심으로....얄팍한 지식으로

이해했던 앎이 다 떨어져 나가야 해요.

그렇지 않고 아직도 습관이 남아있고 앎 따로 행 따로이면 절대 깨달은 자라고 말하지 못해요.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부처이기는 분명 부처인데 아직 깨어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선문답이 있고 화두가 있는데 이것은 깨달았나 를 아는 관문이 됩니다.

깨달았다면 아무리 어려운 화두도 쉽게 납득이 됩니다.

화두를 안다는 것은 맛있는 과일이 나는 곳을 몇 사람만 알고 심심하면 가서 따먹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맛을 몰라요.

아는 사람은 그 깊은 의미에 감동하고 혀를 차요.

아~~그렇게 사용하고 말하다니....고수로다.. 고수야 하죠

그러나 모르는 사람은 마치 외국어 서적을 읽는 것처럼 그 뜻이 선명하게 들어오지않습니다.

육도윤회는 분명 깨닫지 못한 사람이 떠돌아다니는 세계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큰소리쳐도 깨닫지 못하면 자기가 지은 대로 다음 세계에 나야 합니다.

불생불멸은 진리입니다. 법이어요.

죽으면 영혼은 다음 생으로 나는데 어찌 죽음을 死라 하겠습니까?

나(我)는 없어서 죽을 자도 없고 설사 영혼이 윤회하여도 죽음은 곧 탄생이니

이 또한 死라고 말하지 못하고 生이라고도 못합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했어요. 이 도리를 안다면 어찌 生과 死에 연연해서

태어남을 기뻐하고 죽음을 슬퍼하겠습니까?

태어남도 담담하게..... 죽음도 담담하게 보아야 해요.

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다 던져버려야 합니다.

나는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아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 강의를 통하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불자님들은 자기의 진불(眞佛)을 깨

닫고 평온해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부처....내가 주인이므로 내 길은 내가 간다....

이렇게 매일 아침 크게 외치시고 마음 부처님께 모든 것을 턱 맡기고

편안하게 ....편안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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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 생각, 작용, 식별도 또한 그러하니라.

▶受...받아들이는 것...느낌

▶想...생각하는 것

▶行...작용하는 것

▶識...식별하는 것

▶원래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이것 정도는 외워두셔야 해요.

아니면 반야심경 정도는 구결이 짧으니까 한문으로 다 외우는 것도 좋습니다.

270자밖에 안되나 그 뜻이 무궁무진하므로 반야심경을 다 외우면 불교의 주요 사상을

다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 반야심경이 중요하다하여 조석으로 빠지지 않고 외우도록하려고

절에서 모든 행사에 반야심경을 읽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알면 불교 다 아

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독경테이프를 사다가 차에서나 집에서나 자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한문을 여러번 읽어서 문자에 익숙한 후에 다음으로는 여러번 반복하여 테이프와

함께 외우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 외우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법회에 여러번 참석하게 되면 어느날 저절로 외우게 되는 수도 있어요.

반야심경에서는 기본적이 법수가 몇 가지 나옵니다.

사성제, 12인연, 생노병사, 육근, 육진, 육경 등....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오온도 바로 기초적으로 알아두어야 하는 법수입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운전하려면 우선. 헨들, 기아, 헤드라이트, 스몰등, 본네트 등등...

기본적인 용어를 외워야하듯이....

그래야 자동차를 겉핥기식으로라도 조금 이해하게 되듯이

불교도 기본 적인 법수 용어 몇가지는 외워야 합니다.

오온은 色受想行識인데 자세하게 나누면 5개이나

크게 나누면 '몸과 마음'이라고 나눌 수 있다고 지난 번에 말했습니다.

즉...色은 몸이나 물질적인 것을 말하고

受想行識은 정신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역부여시라는 말은 '또한 그와 같다' 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반복되는 것은 따옴표로서 같다는 것을 표시하듯이

한문에서도 같은 방식의 말을 역부여시라고 합니다.

즉...위에서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였으니

여기 정신세계에서도 ....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느낌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느낌과 다르지 않아 느낌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느낌

이니라.

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생각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생각과 다르지 않아 생각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생각

이니라.

느낌이 곧 공이요...공은 곧 느낌이니라....

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

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행과 다르지 않아 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행이니라.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식별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식별과 다르지 않아 식별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식별

이니라.

원래 이렇게 써야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한자로 역부여시亦復如是니라 라고 줄여서

말한 것입니다.

색을 세밀하게 설명하였기 땜에 여기 수상행식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다 알것이라 생각합니다다만

간단히 설명해보면 수상행식은 우리의 정신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정신 작용은 다 나온 곳이 공이므로 정신작용은 곧 공이라는 말입니다.

빔은 텅빔이고 거기에서 만물이 나왔는데 사람의 몸도 거기서 나왔고

그리고 사람의 정신작용도 나온 곳이 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공이 변하여 정신이 되고 정신은 없어지면 다시 공으로 돌아가니

공이나 정신이나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사람들이 정신은 나온 곳이 다른 근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수상행식이라고 세분하고 그것도 시작된 곳은 공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공과 색이 전혀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라는 이치를 여러 방면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결국 우리가 손을 말할 때 손등과 손안은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듯이

우주의 공과 색은 그 자체가 원인이고 결과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사상은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무엇이 도입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담밖에 있느니라" 하고 대답했어요.

또 어떤 선사는 "무얼 묻는 거야?" 하고 반문을 하기도하고....

"도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상이 바로 공과 색을 하나로 보았던 옛선사들의 대답입니다.

또한 마음이 부처라는 말도 마찬가집니다.

중생은 이미 자기가 탄생의 원인이면서 결과입니다.

모든 것은 여기가 원인이고 여기가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따로 무엇을 찾지 않는 종교입니다.

극락도 여기, 천당도 여기입니다. 또한 이상세계도 여기라는 사상도

다 이 공사상에서 사상에서 나왔지요.

지난 번에 향하심님이 꼬릿글에 빔에서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모양의 만물이 생겨났

을까 하고 굼금해 하셨던데 빔은 비었기 때문에 무한대 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근원이 빔이 아니고 어떤 형체라면...그러니까 '아트만'이 우주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유물론자들 이라면 우주의 근원을 설정해놓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트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근원을 형체화시키면 거기서 파생된 우주도 한정될 것입니다.

아트만이 어떤 성질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형체가 있다면 그것이 만든

계도 유한하다는 말입니다.

그 아트만의 입자에 맞는 만물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까지 합하면 매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한없는

종이 있습니다.

색깔만 해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색깔이 더있다고 해요.

우주는 너무 다양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까지 합한다면 그 무한한 창조성을

가히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할 정도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불가사이입니다.

지금도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이 자꾸 생겨나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없어지고 있습니

다. 이것이 바로 빔의 무한성입니다.

빔이기 때문에 다양할 수 있고 무한할 수 있어요.

이것을 선인들은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표현했습니다.

공이지만 헤아릴수 없는 묘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서도 말했지만 공은 철저히 공이지만 그 공은

비었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이 되어서 모든 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공을 그냥 '없음' 이라고 보면 안되요.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우리의 인식은 한계가 있어요.

없으면 없는 것이고... 있으면 있는 것이지 어찌 없음과 있음이 같을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주의 진실은 같은 것이 진실입니다.

옐들어 지금 여러분 눈앞에는 허공이 있어요. 제 눈앞에도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없음'입니다. 그렇다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냥 공은 빔이다 이래야 해요. 여기 눈 앞이 공이다 이래야 해요.

그러나 분명히 우리 눈 앞에 빈 공간이 있어요. 그래서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없는데도 있다고 말해요. 사실입니다. 물체와 나와의 거리만큼 틀림없이 공이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없는 존재를 있다고 말하다니..... 공간이 있다.....

무엇때문에 공이 있음을 압니까? 바로 물체를 통해서 알죠

그러니까 만약 물체가 없다면 공도 없어져요.

색이 곧 공인 것입니다. 우주는 이렇게 물체와 공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빔은 그녕 단순한 빔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빔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색(물질)을 대동해야 해요.

이쪽 모습은 빔이나 빔의 저쪽은 색(물질)이라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말입니다.

이 사상을 알면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한 모습이기때문에

굳이 내가 따로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도 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대로 가만 있어도 무한한 우주요, 주인요, 근원입니다.

바로 내가 부처라는 사상이지요.

또 진공묘유는 불자들이 신행하는 이론의 근거가 됩니다.

불자들은 절, 독경, 참선, 기도를 통하여 신행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를 수련하기 위해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신비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기적입니다.

제가 승가대학에서 몇년간 불교공부는 하고 처음으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할 일이 생겼어요.

결핵성 뇌막염이 발생하여 혼수상태에 빠진 국민학교 5학년 아이를 위해서입니다.

중환자실에서 밤새도록 손을 잡고 졸다가...깨다가...

하룻밤을 꼬박 새우면서 아침 7시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절로 돌아왔는데 아침 식사가 끝나자, 그 아이 집에서 연락이 왔어요.

의사가 회생불가하다하여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산소마스크를 빼면 3시간안에 죽는데요.

그러니 좋은 곳에 가게 염불좀 해달라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염불책을 잡는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하나는 극락세계보내는 책....하나는 병을 낫게 하는 책....

둘 중에 어느 책을 가지고 가서 기도해야할까....?

통상 이럴 때는 사망후에 좋은 곳에 가게 하는 책을 가지고 가는데

저는 그때 회생하는 경을 가지고 갔어요.

그리고 그 아이 집에 도착하여 계속 기도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얼마나 불렀던지....하루종일하고 저녁 늦게까지 했어요.

낮 12경에 퇴원한 아이가 희한하게 산소마스크를 벗었는데도 안죽어요.

저녁 10시가 되었는데도....

신이 나서 기도.....기도.....또 기도 했어요.

그날도 밤을 꼬박새고.....

그렇게 며칠을 낮에는 절에서 일하고 저녁이 되면 그 집에서 기도하면서 1시까지

기도했는데 7일이 되는 날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손톱만큼씩 의식이 돌아오는데...

이것을 정말 기적이라고 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1달간 매일 밤 기도하면서 있었던 여러 사연이 많으나 다 줄이고 ...

아이가 1달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그 1달간 저는 오직 기도로 지냈어요.

그렇게 애가 병이 낫고... 병원에서도 기적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6개월을 더 살았는데 재발하면 위험하다고 했어요.

결핵성 뇌막염은 그렇대요. 약도 없고... 그 뒤 저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6개월 뒤에

아이가 다시 위독해졌다는 소리를 듣고 갔더니 다시 혼수상태더라고요.

그날 제가 보고 돌아온 밤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로 저는 기도에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죽을 사람도 살리는 구나.... 그래서 기도의 가피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뒤로 수없는 기적을 경험하였지만, 다 말하면 시간이 모자라고....

그 뒤 또 어떤 사람이 쓸어져 뇌진탕을 일으킨 사람을 위해 밤에 3천배를 했는데

희안하게 다 죽는다 했는데 그 사람은 안죽었어요.

그 사람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하이얗튼 기도의 신비는 반드시 있습니다.

그 후 왜 그런 일이 있는가 연구했는데 결론은 이 眞空妙有에 있었습니다.

"네가 비워지면 신비한 일이 있으리라."

기도는 자기를 비워야 해요.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지를 못쓰던 사람도 쓰게 되고.... 사업에 망한 사람도 길이 보입니다.

기도 자체가 전생의 업이 소멸되고...

가정이 편안하여지고...소원을 이루게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래서 신을 모시지 않는 불교에서도 세계 어디를 가도 기도하는 신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참으로 비워진 곳에서는 신비가 일어난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시고

매일 일과 수행하세요.

관세음보살 3천번이나....신묘장구대다라니 24번,

아니면 금강경 7독씩 정하여 매일 하시면서 원願을 실으세요.

그 원중에 '깨달음'과 '원하는 것 성취' 둘다 실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되어집니다. 문제는 언제 이루어지는가인데....

그것은 업이 제하는 날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원이 성취된다하여도 그후 계속

하세요. 평생하겠다는 신념으로....

하세요. 그것이 곧 마음 비우는 수행이고....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기도입니다.

비었지만 만물이 나오고....각종 정신의 세계도 나오고....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이것이 공(空)의 신묘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신비함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부처입니다. 부처는 스스로 짓고 파괴합니다.

모든 것은 여러분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 말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여러분 삶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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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색은 곧 공이다

 

오늘은 물질론 쪽을 좀 더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반야심경강의 책에서는 반드시 색즉시공 공즉시색할 때는

약간이라도 물질의 세계를 과학적인 입장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카페강의라 장황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라도 살펴보겠습니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공과 물질... 이것은 오래전에 부처님께서 명상속에서

찾아본 우주와 현상계에 대한 짤막한 결론입니다.

불교는 과학을 탐구하거나 신神을 추종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기 때문에 만물의 탄생과 근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독뭍은 화살에 비유하여 당장 독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디에서 왔으며 누가 쏘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셨던 부처님께서는 50대가 넘자...

대승불교를 설할 때에 자연스럽게 물질과 공에 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에 대한 것은 사실 불교에서는 반야경에 나오는

이 짧은 구절이 전부입니다.

공과 색.....그리고 색이 곧 공이요, 공은 곧 색이니라....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고 불교적인 시각의 만물의 실체를 알 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시각은 동시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즉 물질과 공을 각자 따로 본 것이 아니고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는 동시성입니다.

색=공, 공=색...이라는 등식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이 둘을 따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왔어요.

둘은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했죠.

그러나 부처님은 명상 끝에 과감히 같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공은 없는 것이고 색은 있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 것과 있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

그런데 불교적인 삶을 살으려면 반드시 이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색은 곧 공이다' 이랬지...'

"색과 공은 같은 것이니라" 라고 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처럼 들려도 사실 달라요.

색과 공이 같다는 말은 똑같다는 것이 잖아요.

그런데 도저히 색과 공은 똑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같다는 말이 '색이 곧 공이니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쪽으로 보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말입니다.

현재 우리의 눈으로보면 공과 색은 엄연히 달라요.

그러나 내부를 보면 같다는 말이 '색은 곧 공이니라' 라는 말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여러분 자체가 이미 공이면서 동시에 색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있어도 나는 공이다.....이 말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불교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게 되요.

어떻게 내가 공이란 말인가....어떻게 내가 無我란 말인가....

라고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은 자기 몸을 존재라는 쪽..즉. 색色만 본 것입니다.

나머지 반쪽을 못보았어요. 바로 공空입니다.....

우리 몸은 색이면서 동시에 공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께서 하시고 싶었던 말입니다.

저 하늘 텅빈 세계는 빔이... 저렇게 틀림없는 빔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빔이지만... 저 빔은 곧 색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렇다고 빔에 만물이 될 수 있는 에너지가 담겨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 하늘은 비었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가득 들어있겠지...

그 공에서 만물이 나오니까 공이 빔이지...이러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빔은 그대로 순수한 빔이라고 보아야 해요. 글자 그대로 텅빔....

그런데 이것이 만물이 발생하는 근원이었던 것입니다.

에너지조차도 없는 텅빔은 만물의 근원이 되어서 만물을 생生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의 근원은 빔 그 자체가 원인입니다.

만약 빔이 아니면 원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 빔이 어떤 고정된 형체로 있다면 어떻게 이렇게 무한히 자유로운 우주가 되겠습니까?

만약 빔이 아니면 거기서 나온 물질은 고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빔이기에 무한히 자유로운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애벌레와 나비와의 차이와 같습니다.

애벌레는 전혀 날지를 못했요. 먹는 것도 달라요.

기어다니고....그러나 나비는 날아다닙니다.

먹는 것도 다르고 모양도 달라요. 당연히 생각도 달라요.

어떻게 생각이 다름을 아느냐? 기어다니는 애벌레는 기는 생각밖에 못합니다.

날아서 어디를 가고 꽃을 찾아가서 꿀을 따는 것등은 전혀 생각하지 못해요.

그러나 나비는 나르는 것을 생각을 합니다.

한 마디로 생각이란 자기가 가능한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

불가능이란 것은 생각하지 못해요. 특히 곤충들은 그렇습니다. 지능이 낮으니까....

그런데 여러분... 나비도 생각하는것 아세요....?

엊그제 모기를 손으로 잡는데.....모기가 손을 벗어나서 막 도망 가더라고요...

도둑놈이 도망가듯이... 위험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엉...? 이놈이 도망 갈줄아네... 하고 끝까지 쫓아갔는데

저 구석 손이 닫지 않는 곳..벽장과 벽 틈으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벽장에 붙어있는데 손이 닿지 않아요.

그래서 손으로 벽장을 두르렸어요. 나와라 이놈아....하고...당당당...

그런데 놀랍게도 이놈이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아요. 아무리 시끄럽게 두둘겨도....

거기가 안전한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리채로 모기 몸 가까이까지 대고 위협을 주니까 그때서야

안맞아죽으려고 윙 나르더니 어떤 틈을 보았는지 구석에서 쏙 나와

어디로 달아나는데 내 키 위에서 날지 낮게 안날아요.

멍청하면 낮게 날텐데....위로 나는 것입니다. 안전하게...

그래서 기어이 못잡았는데 ....모기도 생각하는구나....생각했죠...

아아....빔의 신비여...어떻게 저 작은 머리에서 안전을 생각할까? 했습니다.

그렇게 전혀 다른 애벌레와 나비이지만

여러분은 누구나 애벌레가 곧 나비라는 것을 다 알것입니다.

이런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애벌레의 모습은 없어져요.

흉하고 털투성이인 애벌레가 아니죠....

날렵하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서 창공을 마음대로 날아요.

애벌레가 나비가 된 사실을 모른다면

그누구도 나비가 애벌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도톡 애벌레와 나비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진실은 같듯이....색과 공도 전혀 달라요. 그러나 같습니다.

같은 것이 공이 되었다가 색이 되었다가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체입니다. 이 육체는 공이 변하여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곧 빔인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한계가 있어요. 앎은 진실이 아니고 정함입니다.

하늘을 보고 저것 파랗다고 정했을 뿐이지 실제는 전혀 파랗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여요.

개가 색맹이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천연색으로 다 본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왜냐면 선재는 붉은 색을 보면 막 짖어요. 하옇튼 싫어해요.

목줄이 붉은 색인데 첨에 그 줄땜에...스트래스받아서...쓸어지고 토하고....

난리를 했어요...그러거나 말거나....네놈이 어쩌것냐....하고 그냥 놔두었더니....

설사하고 안먹고...하기를 보름만에....적응 하더라고요...

웬일인지,,,,붉은 색을 보면 짓어요...그런데 흑백만 본다면 검은 색도 붉은 색도 같

은 색일텐데 유독 붉은 색만 보면 짓을 것이 뭡니까...?

그런데 그때 혹 개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색을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붉은 색이 개는 붉은 색이 아닌

어떤 다른 색.....몽쩡색말야요...

그 몽쩡색으로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짓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어요.

눈송이님 몽쩡색이 뭐야요?

모르겠는데요, 어떤색이예요

나도 몰라요. 개만 보는 색을 내가 지어낸 거야요....몽쩡색이라고...

그러니까 모르지...ㅎㅎ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붉다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야요.

우리만 보는 색일지도....그렇다면 색도 주관적야요...객관적이 아니고...

그렇지만 그것이 진실이든지 거짓이든지 상관없어요.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어느정도를 이해를 하면서 사니까

그런데 말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앎은

절대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렇게 알뿐인 것이죠....

그러니 우리가 아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겠습니까?

우주는 색과 공의 동시성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존재와 비존재는 분명 같아요.

그것을 '색은 곧 공이니라' 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여기 관세음보살께서...두 분다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대품반야경에서 말씀하셨어요.

물질의 기본 단위를 소립자의 세계라고 합니다.

원자를 쪼개면 분자가 나오고 분자를 쪼개면 소립자의 세계가 나와요....

거기에 뉴트리노란 놈이 있는데...그러니까 광자, 전자, 뉴트리노...

이것이 소립자입니다. 뉴트리노는 아무도 보지 못했어요.

다만 존재한다는 것은 실험으로 확인했습니다.

도대체 그놈을 왜 못볼까???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응...저놈은 삼각형이구나 하고 생각하려면 그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우리 생각의 속도는 어떻게 될까? 아마 빛만큼 빠를거야요...

그런데 그 놈은 변신의 천재야요.

그래서 뭐라고 단정하려고 하면 그사이에 어느덧..딴 놈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아무도 못보았습니다. 우리 생각보다 빨라요.

하옇튼 그런 놈인데도 결국 공空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 신비합니다.

우주가 마치 회오리처럼 돌고 있다는 것은 아실거야요....

우리의 천체도 돌고 있어요.

바다에... 호수에의... 소용돌이처럼

허공이라는 거대한 호수에 밑에 구멍이 생겼어요.

그리로 물이 빠져 나가니가 그 힘으로 소용돌이가 생깁니다.

바로 우주의 흘랙홀이지요. 어딘가 뚫려있다...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지나면 전혀 다른 우주가 있을것이다.

이것이 이론 물리학에서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나팔꽃 두 개를 꼭지를

따고 통로끼리 서로 붙히면 우주의 불랙홀을 연상할 수 있어요.

마치 마차 바뀌처럼 축을 중심으로 양쪽에 마차바퀴처럼 소용돌이가 있어요.

어쨌던 이것은 낭중에 대폭발 이후에 일이고 ...나팔꽃 만나면 해봐야지..

첨에 우주가 탁구공만하게 압축되었다가...

어느날 폭발해요...거대하게...빅뱅이라하지요...

그때 우주는 빈공간에서 압력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허공이 밀리는 현상이 생겨요.

그때 허공끼리 마찰이 생깁니다. 강력한 마찰이죠.

거기서 가스가 생겨요...거대한 폭발력으로 마찰에 불꽃이 일고 카스가 생기죠....

그렇게 수억광년이 지나서까지 그렇게 계속 팽창하면서 식은 것은 별이 되고...

해서 우주가 생겨났고 지구같은 것이 생겨났고 물질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 공에서 만물이 생긴 다는 말이 맞아요.

그런데 이 과정을 우주는 반복한데요.

압축....팽창....압축....팽창...

왜 하는지는 몰라유...

마치 사람 심장이 압축팽창하듯이

저는 우주가 그래서 사람 심장도 우주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닮는다....이것 잘 찾아보면 여러곳에서 발견됩니다.

하옇튼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어줍잖은 물리학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물리학에서 모르는 부분을 부처님 말씀으로 대체해보려고 이러는 것입니다.

바로 압축되었을 때...

즉...지구는 지금 팽창하는 우주와 함께 계속 퍼지고 있어요...

나팔꽃처럼 꽃잎쪽으로 넒어져가고 있어요....

그런데 팽창하던 우주가 어느 시점이 되면 다시 모입니다. 줄어든단 말야요.

폭발력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탁구공만해지는데 바로 이때 그 탁구공 속에 무엇이 있을까 입니다.

과연 어떤 물질이 있는가? 빔인가....?

물론 이 탁구공이야기도 이론 물리학이지만

혹시 이 탁구공 이야기가 맞다면 그 압축된 상태는 무엇일까입니다.

여기서 저는 물질이 아니고 바로 텅 빔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입입니다.

마치 나무의 나이태처럼 그 중간은 빔이고 그 빔이 압축되어 더이상 어찌 못하여 폭발

하면 압축되던 반대로 구멍이 뚫려요. 바로 불랙홀....

그래서 다른 우주에 구멍이 생기고 거기서 폭발력으로

나팔꽃처럼 점점 넓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쪽은 나팔꽃이 줄어들고 있고

저쪽은 나팔꽃잎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마차의 양 바뀌처럼 하나의 축에 달려있는 양바뀌....

연상이 되죠? 연꽃님이 나팔꽃 꼮지를 서로 대본다고한 모양...

나팔꽃 두개.... 어느 시점에는 크기가 같은 모양이 되요.

그리고 결국은 이쪽은 없어지고 저쪽은 생겨나죠....

그러니까 힌 수건을 펴서 들고 아이보고 수건을 젓가락으로 누루라고 하면 볼록해질거야요

그 볼록해지는 현상....누루면 볼록해졌다가 펴졌다가...볼록했다가 펴졌다가...

반복... 이것이 우주의 모습입니다....그런데 이것 제 상상도 좀 들어갔어요.

나팔꽃 두 개는 상상입니다....실제는 하나만 말하고 있어요....불랙홀은 있다하나...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요....어차피 이론 물리학이니...저도 상상해보았어요

계산없이... 그런데 어쩌면 나팔꽃은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저쪽 우주는 없고 수건을 누루면 볼록해지듯 저쪽으로 잠시 들어갔다가 어느 시점에서

다시 이쪽에 돌아오는 것일 뿐인지도 몰라요.

팽창이지요....그렇게 계속 압축팽창을 하는 지도 몰라요....

자세한 것은 물리학자도 나도 모릅니다.

대폭발 이론도 갖다 붙였지만 그 이론은 진짜여요....

하옇튼 그 중앙이 비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 부처님 말슴이 색이 곧 공이니까

그 중앙은 철저히 빔이라는 말이지요. 현재 물리학은 모릅니다.

언젠가는 밝혀질거야요.

현재는 물질의 최소단위는 에너지라는 것 밖에 못밝혀냈습니다.

즉 소립자를 쪼개면 퀴크가 나오고 그 퀵크는 곧 에너지다...

즉 처음 폭발해서 허공의 마찰로 생긴 그 가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식어서 지구가 되었으니까...

결국 에너지는 공에서 생기니까... 물질은 곧 공이다는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보는 물질은 모두 공이라는 말이 맞아 떨어져요.

부처님의 명상이 맞았던 것입니다. 색은 곧 공이니라....

부처님은 이러한 진리를 명상으로 아시고

너는 곧 공이니라....무아니라....하고 이론 체계를 새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공이라고...무아라고 아무 것도 없는 공으로만 생각하고

아무 일도 안 하면 안되요....몸은 있으면서 공이기 땜에 일을 해야합니다.

일하는 것이 곧 공이고 이대로 공이고.... 삶 자체가 공야요....

또한 색이기도하고.... 삶 자체가 공이요..색...!

그래서 공이다....색이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하면 틀린다는 논법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다 선택할 수도 없고.... 다 포기할 수도 없고....

색이라할 수도 없고,,,, 공이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뿐이다....

이런 논법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말....행동....이것은 다 진실이 아냐요...

거기서 진실을 찾으면 못찾아요.

진실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거대한 우주에서 보면 한낱

봄날의 어지랑이나... 번개와 같고....이슬과 같아요....꿈과 같고...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 어찌 진실을 얻겠습니까? 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인데...

생각하지 말고 상상하지 말라.... 오직 무심으로 살아라.....

허망하다는 생각도 없는..고요함..고요함..으로 들어가라..이것이 열반이다..

그대가 한 생각 일으키면 허망한 것이고..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공연히....일으키는 파문...그러니 아무 생각도 내지마라...

일있으면 하고....웃을 일이 있으면 웃어라...

여행가고 싶으면 가고...등산하고 싶으면 하고....

자식 열심히 키우고....빨래하고 돈벌고...그러나 생각은 일으키지 마라....

부처라는 생각도 중생이라는 생각도.... 무엇이 옳다 그르다....

그대가 무엇을 주장하고 세우면 그때부터 괴로워진다. 거짓을 생각하는 것이니까..

세우지 마라.....그 무엇도....한동안 고요해라.... 잊으라...

과거의 잔재를 다 잊으라... 때가 되면 세우지 않고 세우리라...

부처님처럼 선사처럼...가르치고 말하기 위하여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하여

다시 세워도 그때는 전혀 동요가 없이 사용할 것이다

내부가 편안한 상태로 사용한다....

이름하여 '사람'이라한다.....부처도 때뭍었으니...

 

 

6.공과 색은 하나이다

지난 시간에 공과 색에 대하여 충분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아

오늘 조금 더 하고 진도 넘어가겠습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불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철저하게 진리를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은 말을 통하기 위한 말이지 그 말이 절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겠으나.....

말이 어떤 진실과 정확하게 부합하지는 않아요.

옐들어 요즘 가을 하늘이 파랗다고 표현하는데

실제의 하늘은 파랗지 않음을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파랗다라고 말을 통하고 있어요.

이것은 눈에 그렇게 비쳐지는 가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고 그렇게 통용되는 것이지

하늘은 파랗다가 진리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불교는 가능한 진실을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언어...그리고 그 언어가

갖는 의미란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말을 통하기 위한 것이요, 표현하기 위한 수식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인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요.

엘들어 누가 나의 맘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다면

엘들어 자존심 상하는 말 같은것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보면 맘을 상한다.... 상하는 말을 했다....

라는 의미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맘 아파해요.

그런데 사실은 맘은 상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맘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 ....퍼득.....6근이 움직여 맘이 만들어져 작용하다가 없어지고....

만들어져서 작용하다가 작용이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이 마음인데

무엇이 상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상한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이 말은 틀린 말이고 엉뚱한 말입니다.

또한 '상하게 하는 말' 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의 말은 사실 진실은 하나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해요.

다만 수박 겉핥기식으로 겉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엘들어 사탕이 '달다' 라고 누가 표현했다면

이 말 자체가 사탕맛은 아닙니다.

달다라는 이 표현은 다만 표현이지 맞는 말은아닙니다.

우리식의 표현이어요.

만약 달다라는 말이 단 것 그 자체라면 누가 들어도 다 알아들어야 해요.

미국사람에게 달다....해도 알아들어야 해요

그러나 달다라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만 알아듣는 약속입니다.

똑같이 먹어보고 이런 맛을 달다라고 표현하자 했어요.

그러자...하고 달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지 달다라는 말이 사탕 맛 자체는아냐요

정확한 맛은 오직 혀끝에 사탕이 닿아야 알수있어요.

아~~이맛이군....이걸 달다라고 말하는군....하죠

그러니까 단맛은 정확하게 설명하려면 사탕을 혀에 대는 것이 젤 정확해요

달다.이 말은 단맛 자체가 아닙니다.표현이요, 말이어요.....

그러니까 말은 어떤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맹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행히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은 알아듣고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다만 말만 할 뿐야요.

정확한 맛을 모른 채 이런 이야기를 왜 하냐하면 여러분이 불경을 공부할 때도

평상시 말에 쫓아다니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첨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맞는 것 같고 부처님 말씀이 틀린 것 같아요.

자기가 생각하는것은 맞고 부처님이나 성현의 말은 틀린 것 같아요.

그걸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 이라고 합니다. 뒤바뀐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지금 진실과 전도된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고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진실을 알고 진실대로 살아간다면

매우 편해지고 행복해져요. 그래서 부처님은 진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야심경야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오랫동안 습관되어 자꾸 전도된 생각이 튀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경을 알아도 부처님처럼 행복해지지 않고 생활이 매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 따로 행동 따로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순간 가슴에 새기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을 알았을 때 앎과 동시에 깊이 깨우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렇게 되면 행동이 바로 되기 때문야요.

부처의 행동이 바로 나타나요.

깨우침은 곧 체험입니다.

사탕 맛을 아는 것입니다.

달다라는 말을 아는 것이 아니고

달다라는 맛을 아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만이 묵으면 이빨이 썩는다는 사실을 알고 안먹는 것입니다.

단 것이 어떤 것 인줄 확실하게 아니까....

그런데 단 맛을 보지 못하고 그냥 아는 것은 사실은 그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몰론 달다라고 말은 했으나 모르고 말한 것이고.....

아무리 다른 말로 그 맛을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해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것은 먹어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말은 달다라고 해도

그것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요.

그래서 체험! 즉 깨달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깨달아야 세상사를 정확하게 알아요.

영가스님이 육조스님을 만나서 삿갓도 벗지 않고

무상이 신속합니다 했어요

이 말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데 예의를 차리고 뭐할 것 어디있습니까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서 육조스님이 뭐라고 말하나 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육조스님이 '본래 빠르고 느림이 없는 줄을 왜 모르느냐?' 하고

가볍게 말해줍니다.

시간은 없다...네가 있다고 생각했을 뿐....그런데 어디에 느리고 빠름이 있겠는가

라는 말인데.... 순간 영가스님은 크게 깨달았어요.

아차! 어찌 빠르고 느림이 있을까보냐....내가 또 실수했구나... 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원래 영가스님은 천태학을 열심히 연구한 학승이었습니다.

물론 천태 지관법도 수행했고 불경도 배워서 다 아는 수행자였어요.

초자가 아니고 불경을 많이 공부한 수행자였지만

그래서 반야심경 정도는 넉근히 외우고, 금강경, 아함경, 법화경을 다 외우는 정도

였고 아주 똑똑한 스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하고 알았기 때문에 일상사에서 말할 때 자기도 모르게

더럽다...깨끗하다...빠르다....느리다 하고 분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지적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운 것을 평상시에 정확하게 사용하도록 선생은 지적해줍니다.

그런데 스승없이 혼자 배운 영가스님은 그런 지적을 받질 못했어요.

그래서 육조스님 회하에 도착하여 삿갓도 안벗고

정면에 턱 서서 한마디 던져본 것입니다. 무상이 신속합니다

無常도 원래 빠르다는 의미인데 거기다가 신속하다고 더 표현했으니

시간이 빠르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라는 뜻이죠

그러자 육조스님은 말하는 자의 병(病)이 확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 빠르고 느림이 없는 줄 왜 모르느냐?

라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순간......영가스님은 아차! 그렇치..... 하고 깨달았어요.

아....내가 이렇게 실수를 하는 구나....

"그리고는 제가 이제 빠르고 느림이 없는 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하고 말하자....옳다 옳다 하고 긍정하였고 이때 대중이 모두 놀랐다고 합니다.

웬만해서 그렇다하고 인가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렇다고 긍정했으니 놀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영가스님은 하룻밤을 자고 나가서 육조스님의 뒤를 이은 제자가 되었는데

하루만에 깨달았다하여 사람들은 '일숙각'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이 기록을 보면 보통사람들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잘 몰라요.

영가스님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육조스님을 만나 깨우치고 갔던 것이지

즉, 깊이 새겼단 말입니다. 새로 무엇을 안 것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과 깨달음은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알지 마라고 불입문자라고 했어요.

여기 반야심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이라던지 색이라는 언어가 뜻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알고 있으면

반야심경을 백번 공부해도 부처님의 뜻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뜻

▶ 空=빔

▶ 色=만물, 생각...

이라는 의미에만 갖혀있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진실을 모르게 되요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색(色)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우주는 공과 색 이 두 가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이 두가지 요소가 사실은

한 몸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문입니다.

어떻게 전혀 다른 두 가지가 하나일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것을 정확하게 납득해야 해요.

관세음보살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했어요.

왜냐면 이 두가지는 서로 따로 떼어놓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주가 빈 공간이 없이 물체로 꽉 채워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해요.

설사 우주가 꽉 채워진 것이라고 해도 채워질 공간이 있어야 채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있으려면 반드시 공간이 있어야 해요.

또한 물질이 없이 공간만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불가능합니다. 왜냐면 이 우주에 이 공간이 있으려면

이 공간을 가둘 울타리가 필요해요.

만약 공간을 확보할 울타리가 없으면 공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색이 바로 울타리입니다. 그러니까 공과 색은 전혀 다른 것이면서

손바닥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멀리서 보면 우주라는 하나의 세계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빔은 빔이 아니고 색을 탄생시키는 모체이고

색은 공을 낳는 모체여요. 그러니까 색은 공을 낳고 공은 색을 낳습니다.

그러니가 공은 어머니요, 색은 자식이고 같아요. 공이 곧 색입니다.

또한 색이 어머니요, 공이 자식이니까 색과 공은 같아요. 색이 곧 공입니다.

서로 母가 되고 子가 되는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둘이면서 하나라는 말이어요.

이 기본 사상은 불교에서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잡습니다.

존재, 그리고 비존재는 같다...... 그러니까 갖으려고 욕심낼 것 없고 ....

왜냐, 나는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이미 우주의 근원이니까

주인이요, 부처입니다. 그러니가 이미 다 가지고 있어요.

더이상 가지려고 할 필요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우주의 주인임을 깨닫고

갖으려했던.....헐떡이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의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주어진 만큼 얻어서 쓰다가 갑니다.

어떻게 살고....어떻게 써도 그것은 이미 나도 없는 빔입니다.

그러니가 나 자체가 비인위적인 상태로 필요한 것만 하면서...내가 자연이 되어서

바람이 불면 꽃이 피듯이 움직여서 열매를 맺게 하고

거두어들여서 육체껏 누리다가 가는 자 없이 가는 것입니다.

빔이라고 해도 존재이고 존재라고 해도 빔이어요.

그래서 이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빔에 떨어져도 안되고 존재에 집착해도 안되요.

인연따라 결혼하고 늙어서 인연따라 갑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라고 단정하면 틀려요.

공도 공이다....이것 말은 맞을라나 몰라도 단정하면 한정하는 것이 되어요.

그래서 틀립니다.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하나라도 정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설사 中道라도.... 단 반개 라도......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해요.

생각을 내면 인위적인 것이 됩니다.

오로지 무심으로 살아가고 무심으로 받아들이고 무심으로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을 아는 자입니다.

무슨 생각이라도 내면 반드시 그 반대가 생겨요 그래서 절대 진리가 아닙니다.

치우친 견해여요 그래서 한 생각도 내면 안됩니다.

지겨운 것은 아직 무심이 안되어서 그래요

무심이 되면 지겨움도 사라져요.

나조차도.....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도.....잊어요

나도 인식못하고 무엇을 하고 있음도 인식못하는데 어찌 지겨움이 있겠어요.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들어도 한 생각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일으키면 사심이고, 치우친 견해이고  편협한 시각입니다.

공과 색은 동시면서 다른 것입니다.

어느 것에 치우치면 하나에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에도...... 색에도...... 치우치지 마세요

일어나는 생각을 잘라내세요.

그것이 치우치지 않는 방법입니다.

한 생각이라도 유니 무니 공이니 색이니....일르키면 안되는데

무엇을 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더욱 안됩니다. 이것은 진실을 몰라서 그래요.

자기 생각을 세우는 것이지 결코 진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심하세요. 당신은 색이기도 하고 공이기도 하고 색이 아니고 공도 아닙니다.

당신이 당신의 본질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하고 어떤 생각이라도 일으켰다하면

벌써 어그러져버려요.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우면 잘뿐

일할 것이 있으면 일하고 걸어갈 일이 있으면 가고

부모가 아프고 찾아가고 바쁘면 찾아뵙지 못하고.....

할수 있으면 하고 하지 못하면 안합니다.

하지 못해도 전혀 어떤 한 생각도 내지 마세요

언제나 고요하게 무심 속에서 살아가세요.

눈은 빤짝이고 정신을 초롱초롱하게 멍쩡한 상태로

있으면서 무심으로 고요하게.....고요하게....

일어나는 생각 다 죽이고...... 편안하게...... 편안하게......

이것이 반야 공에 들어간 반야의 삶입니다.

참다운... 지혜로운 삶이지요

화두 의심은 망상이 아닙니다. 궁금증이고

자기 의지로 망상을 자르는 것입니다.

망상을 자르려면 화두에 정착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그래서 망상 대신 화두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자의적인 의지입니다.

자유인의 의지를 기르는 것입니다.

화두는 자꾸 엉뚱한 데로 가는 마음을 자기 맘대로 이끄는 훈련입니다.

무기는 靜的이고 빠짐이라 활동은 못해요. 비활동적입니다.

무심은 활동하면서 똑똑히 사건이나 물건을 보면서

마음이 고요한 것입니다. 무기와 무심은 전혀 다릅니다.

 

 

 

  5.공과색(空과色)

 

舍利子

사리자

 

사리자여,

여기서도 금강경처럼 제일먼저 제자 이름이 나옵니다.

사리자는 사리불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에 첫번째 지혜제일의 제자입니다.

불경강의를 들으면서 최소한 10명의 부처님 제자 이름은 외워야 합니다.

1. 사리불 - 지혜제일

2. 목건련 - 신통제일

3. 마하가섭 - 두타제일

4. 가전연 - 논의제일

5. 부루나 - 설법제일

6. 우바리 - 지계제일

7. 수보리 - 혜공제일

8. 아란존자 - 다문제일

9. 라훌라 - 밀행제일

10. 아나율 - 천안제일

이렇게 1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분들이 있어서 부처님은 더 유명해졌어요.

왜냐면 이분들은 다 당시에 난다 긴다하는 유명한 철학자요, 종교가였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은 부처님보다는 1살이 많은 제자였어요.

일설에 오래전 어떤 왕국의 후손이었다고도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눈은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인도는 서방과 동방의 접합점이라 사람들이 동양과 서양사람을 다 닮았잖아요.

달마스님도 인도에서 온 왕자인데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털이 많고 눈이 둥그렇게 생겨서 달마도를 그렇게 그리는 것입니다.

그후 달마의 禪을 수행하는 제자들을 눈푸른 제자라고 해요.

눈을 푸르게 뜬다라는 말은 진리의 골수를 뀌뚫는다는 의미죠.

禪의 바로 가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인도에는 '사리' 라고 하는 새가 있어요.

그 새의 눈이 푸른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인도라고 하지만 여자가 눈이 푸른 것이 희한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딸을 사리라고 이름지어주었어요.

그러니까 사리자의 어머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리 처녀가 시집을 가서 애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또 눈이 푸른 애였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사리부인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사리자(舍利子)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리자는 커서 삶의 문제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출가하여 바라문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전통 승려를 바라문이라고 했어요.

부처님보다 먼저 출가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교단의 큰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35세에 깨달아 부처님이 되셨는데

사리자는 대략 40세를 전후해서 이미 인도에서 유명한 선생이 되어있었어요.

그의 스승이 죽자 지혜가 출중한 사리자에게 교단을 넘겼기 때문에

대략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큰 교단의 교주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500명의 제자를 거느린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전에 구례 화엄사 조실스님께서 약 200명의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신기록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의 얼굴을 다 몰랐다고 해요.

누가 와서 절을 하고 안부를 물으면 "누구 제자시요? " 하고 물었대요 ^^

옛날이나 지금이나 500명은 대단해요.

사리불이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모르는 이치가 없었고 못 외우는 역사가 없었으며

모르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가히 부처님 다음갈 정도로 뛰어난 제자입니다.

그런 사리불이 하루는 소문을 들으니 고오타마싯다르타라고 하는 마스터가

스스로 깨달은 붓다라하고 하면서 설법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가서 듣는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하루는 가보기로 했어요.

세상에 나보다 더 똑똑하고 깨달은 자가 있었단 말인가? 가서....토론해보고

나보다 훌륭하면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제도하여 내 제자로 삼으리라 했어요.

드디어 부처님 교단에 도착하여 보니까

부처님이 초창기라 제자도 별로 없고 집도 허술한데 연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서 북적댔어요.

거참 희한하다......제자는 없는데 말을 들으려는 사람들은 많구나 ....

그래서 가서 면담 신청을 하고 갖가지 이론을 들추어내면서...

천하의 지식을 다 내보이면서....토론을 유도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장황한 사리자의 식견을 들어보고는 아무 말도 안하고 묵묵히 있다가

"여기서 1년만 내 옆에 있으라, 그 뒤에 네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대답해주리라" 했어요.

그러자 사리자는 붓다를 꺽을 심산으로 1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부처님은 사리자를 잊은 듯 그 쪽에는 신경쓰지 않고 평상시 대로 설법을 하셨고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였으며 평범한 사람처럼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었어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제자가 되려고 몰려들어서 승단의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났어요.

드디어 1년이 되자 어느날 부처님은 사리자에게 물었습니다.

"자, 이제 물어라. 그대가 궁금한 것을 물어라"

"나는 그대를 위하여 질문에 답해주리라"

그러자 사리자는 얼른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 조어장부시어, 저는 여래에게 물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궁금함이 저도 모르게 다 풀리고 말았습니다. 그대신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그것이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리자는 곧 자기의 교단에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나는 이제야 참다운 스승을 만났다. 나는 그의 제자가 되러간다.

그대들은 각자 좋은 스승을 찾아서 떠나라. 나는 붓다에게 가리라.

그러자 제자들이 모두 놀라면서 자기들의 스승보다도 더 훌륭한 스승이 있다면 자기

들도 가서 그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했어요.

그래서 500명의 수행자가 모두 달려가서 한꺼번에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9궁금한것이 없어지고.. 마음에서 모두 사라질때까지...!!)

그러니까 사리자의 교단이 인도에서 가장 큰 교단이었는데 그 수행자 그릅이 부처님

의 제자가 되니까

부처님의 교단이 갑자가 일도에서 제일 큰 교단이 되고 말은 것입니다.

이렇게 사리불이 500명, 가섭이 250명, 목련존자가 그의 제자 500명등을 데리고 와서

부처님은 갑자기 1250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대수행자 그릅이 되었고

그 기폭제 역활을 한 사람이 바로 사리자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두고 사람들은 그때부터 부처님은 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禪은 말을 줄이고 생각을 줄입니다.

일상사가 선이고 평범해요.

졸부들은 형식을 세운 곳에 가면 그 형식 때문에라도 무슨 거대한 이치를 가지고 있

는 스승인가부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형식 속을 들여다 봅니다.

형식을 떠나서 참 도리를 보아요.

이것을 부처님의 지혜라고 해요.

묻지말고 말하지 말고 1년간만 내 진리를 들으라.

그리고 그뒤에 질문을 해라 그래야 내가 그대와 토론을 할 수 있다.

네가 불교를 모르고 도대체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은 지를 모르는데

네가 아는 것만 참진리라고 생각하고 고집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진리를 바로 이해하겠는가

어떻게 내 진리를 제대로 알겠느냐?

1년간 묵묵히 들어라 그리고 그 뒤에 토론하자.....

부처님도 영리한 분이지만 사리자도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묵묵히 기다렸고 그대신 부처님의 일상과 설법을 그대로 목격하였습니다.

누구보다 중립적이고 그 무엇도 주장하지 않는 붓다의 정신은 다른 사람들이 이것이

진리이다 하고 주장하는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습니다.

붓다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불교입니다.

다만 한쪽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그르다고 말할 뿐 붓다의 주장은 없어요.

오히려 쉬라고 해요.

그대는 스스로 만족하다 스스로 위대하다 하고 말해요.

이것에 사리자가 감동된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반박할 것인데

주장이 없으니 편안하고 싸울 일이 없고 토론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냥 붓다의 제자들은 와서 쉬고 참선하면서 아무것도 세우지 않고 찾지 않아요.

그러니까 평안하게 1년이 흘러갔던 것입니다.

사리자는 그새 더 지혜롭게 되었고 더 총명해졌어요.

마음은 더 평안해졌습니다.

자기의 스승도 이렇게 평안하게 해주지 못하였는데

자기에게 한 마디로 말하지 않는 저 붓다에게 와서는 매우 평안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리자와 목련존자는 이렇게 붓다에게 감화되어 다 제자가 된 사람들인데

모두 부처님보다는 1살씩 많았고 부처님보다 더일찍 열반에 들었습니다.

불교성전에 보면 붓다는 79세에 사리자와 목련존자가 먼저 열반에 들자 매우 서운해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8상록은 부처님을 신비의 인물로 부각했지만 불교성전은 붓다를 인간적으로 그렸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와서 처음에는 반박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불교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제는 불교에 완전히 정착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든지 그 학문을 이해하려면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해요.

깨달음은 맨 마지막에 더이상 알 것이 없어졌을 때 문득 오는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천천히 매주 여기에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생각이 달라지고 뜻이

달라진 위대한 붓다가 될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혹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급하게 맘먹고 휙 나가버린다든지 섯부르게 단정하

지 말고 차분하게 인생을 살아가듯이 불교속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그 핵심을 관통하고 말 것입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을 대신해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주로 노년에 부처님을 대신해서설법했습니다.

그 책이 경전에 그대로 나오는 곳도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은 사리자를 다음 2대 붓다로 지목했는데 먼저 죽는 바람에

목련에게 넘어갔고 목련도 먼저 죽는 바람에 3번째 가섭에게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2대 붓다가 마하가섭입니다.

그런데 저의 위에 가섭을 두타제일이라고 했는데 두타제일은 수행제일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참선하고 수행하기를 즐겨했던 가섭이 2대 붓다가 되는 바람에

불교는 처음에 완고하고 고지식하게 했어요.

그래서 이때를 소승불교라고 하고 수행주의 불교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500년 뒤에 대승불교, 즉 융통성있는 불교가 되면서

불교는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오늘날처럼 대중불교가 된 것입니다.

자, 이정도로 사리자에 대한 이야기와 부처님의 주변 제자들 이야기는 마치고....

여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먼저 사리자를 부릅니다.

그래서 '사리자여.....'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요.

왜냐면 부처님과 거의 같은 정도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제자를 부른 것입니다.

즉 관세음보살은 사리자라면 내 말을 이해할 거야 하고 생각하고 특히 사리자하고

대화하듯이 이 경을 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의 서두에 사리자여! 하고 사리자를 부르는 말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옛날부터 많은 선사들은 관세음보살이

사리자를 불렀을 때 벌써 반야심경 마쳤다고 합니다.

하고 부르는 여기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참 신비로운 견해인데 잘 생각해보면 옛선사들의 말이 맞습니다.

사리자여하고 불렀을 때 과연 무슨 뜻이 있기에 이 외침 속에 반야심경의 뜻이 다

들어있다고 한 것일까?

이것을 내내 강의들으면서 혹은 법당에서 기도하면서 읽어보면서 생각해보세요.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色)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라.

 

오늘 첫 대목을 조금 나가봅니다.

반야경은 空과 色 이 두 글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먼저해야합니다.

공空=빔

색色=물질, 존재, 생각

공은 바로 여러분의 눈 앞에 있는 텅빔입니다.

여러분!

지금 눈 앞에 무엇이 있나요? 모니터와 자기 눈 사이에 모니터가 보입니까?

보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공이 있음을 알지요?

정말 눈 앞에 공이 있나요?

공이 보입니까?

연꽃님? 공이 보이나요?

안보여요

글치요.....

보이면 공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안보이니까 공이야요

그런데...없다하면 안되요.

공이 없다면 세상이 존재로 꽉 채워진 것이라고 해야하는데 실제는 공이 있으나

공은 존재가 아니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반야경을 공부하면서 우리 눈앞에 있는 공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 해야하고

왜 있는데 없다고 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이해 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세상을 공과 색 이렇게 두가지로 설명했어요.

이것이 불교의 세계관입니다. 우선 빔은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거기서 존재가 나왔어요.

우주는 빔과 그리고 존재(色) 이 두가지의 모습입니다.

만약 빔이 없으면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존재가 있으려면 반드시 빔이 먼저 존재해야해요.

그 빔위에서 집도 짓고 꽃이 피고 사람도 태어나요.

여기서 法이 등장합니다.

法=진리, 법칙

도대체 무엇이 있어서 빔에서 만물이 생겼는가?

법이 있어서 만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만물이 있게된 원인은 무엇인가?

즉, 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빔' 입니다.

즉 만물이 있게 된 근원이 빔이어요. 빔이 있어서 만물은 생겨났느니라.

즉, 빔이 만물을 만들었느니라.

그러니까 빔은 우리가 그냥 아는 정도의 빔이 아닙니다.

우리는 빔을 아무것도 없음으로 생각해요.

그러나 실제의 빔은 그런 것이 아니고

만물을 잉태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빔입니다.

빔을 없음으로 이해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없음도 버려야 해요.

비기도하고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빔이기도 해요.

여기서 바로 하나가 아니고 둘을 포함한 빔 空(공)으로 이론이 태동합니다.

즉 빔은 빔과 색을 다 가지고 있는 빔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빔의 모습이지만

그 내면에는 색을 잉태할 수 있는 빔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반야심경에서 관세음보살은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했어요.

즉 하나라는 것입니다.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우주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사실은 이 둘이 하나여요.

자, 손을 들어서 한번 쳐다 보세요.

손에는 손등과 안(바닥)이 있어요.

그렇지요? 그럼 손등이 없는 손바닥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손바닥없는 손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손등과 손바닥은 둘이나 사실은 하나여요.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어서 손이라는 체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주는 공과 색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주입니다. 우주는 두가지의 요소가 합하여 하나가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공은 곧 색이라고 했고 색은 곧 공이라고 결론내렸어요.

즉 둘이나 하나라는 말입니다. 어느 하나만이 존재할 수 없어요.

자, 이 논법을 잘 이해 해야해요. 불교는 바로 여기가 첫 출발입니다.

두 가지는 알고 보면 하나이다. 태극을 보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어요.

이처럼 우주도 하나로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한 쪽에다 매어두면 안된다는 것을 배울수 있습니다.

근원을 말하면서 현실을 깨닫게 합니다.

즉, 어떤 사람이 돈에 집착해요. 이것 지나치면 병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에 집착해요. 그러면 이것도 지나치면 病이어요.

세상은 공과 색이 함께 적당히 어울어진 것이 세상인데

어떻게 공속에 들어가서 살려고 합니까?

육체가 존재인데 어찌 안 먹고 살려고 하나요?

매사 공에 집착하여 아무것도 안한다든지 무에 합리화시키면

우주를 모르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고 차에 집착하고 옷에 집착하고 평수에 집착하여도 병입니다.

매사 인생의 가치와 성공을 여기다가 기준하면 안되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병자의 삶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이상적인가? 어떤 삶이 진리적인가?

배고프면 적당히 먹을 수 있고 능력껏 일해서 얻은 집에 살고

능력껏 얻은 돈으로 차를 몰고 살지만

그 차와 집과 먹거리로 인생의 가치를 삼지 않는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도인의 삶이요, 진리적인 삶이고 그대로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무엇을 하되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소득에 맞는 인생을 사는것

그래서 서운 하다던지 비참 하다던지 최고라는 생각이 없는 무심으로 사는것

가치를 세우지 않는것 의미를 내세우지 않는것 이것이 있는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과 색에 대하여 다음 시간에 좀더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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照見五蘊皆空 (조견오온개공 )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이제부터는 기본 적인 법수를 좀 외워야 합니다.

오늘은 오온,

저 뒤에는 12인연, 6근, 6진, 6경, 4성제,.... 등이 나와요.

얼마 안되니까 다 외워야 합니다. 그래야 강의가 이해되게 되어있어요.

반야심경강의 책이 있는 분들은 미리 외워놓고 들어오세요.

이러한 숫자들을 법수(法數)라고 해요.

우선 오늘은 오온을 살펴보겠습니다.

오온(五蘊)=色, 受, 想, 行, 識

色...물질적인 것

受...받아들이는 것, 감각 기능,,,,

想...생각하는 것

行...작용, 움직이는 것

識...식별하는 기능, 분별, 판별...

이렇게 해서 오온은....색, 느낌, 생각, 작용, 식별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중에서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요.

나머지는 정신 적인 것입니다.

5개라고 하지만 사실읕 '몸과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몸이 있고 거기서 느끼는 기관이 있어요.

눈.귀.코.혀.몸.뜻이지요.

그 기관으로 무엇인가 느껴지면 사람은 생각해요.

음....좋은 향이로군...아니, 이렇게 독한 냄새를 피우다니....

혹은 음....좋은 소리로군....하고 생각하죠.

'생각' 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음으로는 행동해요.

오온 중에 行인데.....나쁜 냄새가 나니까 빨리 가서 향을 꺼야겠군....

'行'입니다.

다음으로는 식별합니다.

내 행동이 과연 옳았는가, 글렀는가....

저기 저 친구의 집착증은 제대로 되어있는 것인가?

저 아이가 저러니까 공부하지 않는구나....

일종의 결론적인 단정, 판정을 내리는 기관을 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와 일상 행동' 을 오온(五蘊)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몸과.....그리고 나의 생각과 단정.......

이것이 결국 비었음(空)을 비추어보았다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듣는 자는 누구인가?' 라는 탐구를 오랫동안하여

이근원통(耳根圓通)을 얻었다고 했어요,

즉, 듣는 자를 알게 되면서 희안하게 전생을 알게 되었고.....

아무리 멀리서 내는 소리도 듣게 되는 천이통(天耳通)을 얻었습니다.

천이통(天耳通)=세상의 소리를 다 들음

그래서 누가 아무리 멀리서

"관세음보살님,,,,,헬프 미....."

하고 소리치면 금방 알아듣고 헬기같은 구름을 타고 달려가서

구해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관세음보살' 을 마이 부릅니다.

지금이라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온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33가지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의사, 간호사, 거사, 왕, 부인, 군인, 신장.....

스님, 군수, 아동, 부녀자, 지신, 천신....등등

의 모습으로 변해서 구해준다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누구에겐가 구원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으면 그 선생님이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누군가 당신의 영혼을 구하고 깨어나게 하면 그가 관세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다에서도....해수관음...

산에서도....들에서도 나타나요.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하여도 구원을 요청하면 즉시 달려온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원함이 없으면 달려오지 않아요.

반드시 원함을 가지고 부탁해야 합니다. 아이가 울어야 젖주듯이...

깨달음도 마찬가지고......소원성취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원해야 얻어요.

만일 원함이 없으면 구함도 없는 것입니다.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불교 공부하는 분들이 불교공부좀 하고 나면

나중에 다 空하다고 하면서.....원함을 버려요.

그래서 돌처럼 살려고 ....묵묵해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이 쉬어지지 않는 동안은 이런 자세 좋아요.

자꾸 버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깨달음까지도 버리려고 해서는 안되요.

기도하는 불자라면 원함을 버려서는 안되고요.

다버려도 그것은 가지고 있어야 원하는 대로 일어납니다.

즉, 마음은 깨달음을 원하지 않으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글자 그대로 그냥 비워져버려요....텅텅

그러면 돌처럼 되어서 무기(無記)에 빠집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성을 잃는 것밖에 안되요.

옛날에 신선도를 공부하는 어떤 스승이 자기를 항아리에 묻고 7일 뒤에 꺼내라고 했어요.

그 정도는 숨 안 쉬고 살 수 있다면서 한번 보이겠노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정말 항아리를 땅에 뭍었는데

며칠 지나자 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군인들이 막 밀려와서 절안에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신선들을 다 베어죽이니까

모두 도망갔어요.

적군이 거기다가 임시 본부를 차려놓고 전쟁을 치렀는데

그렇게 몇 년을 하다가 군인들도 물러가고

절은 폐사가 되고....

세월을 약 150년 정도 흘렀어요.

하루는 그 나라의 왕이 거기를 지나다가 저기다 절을 지으면 좋겠다 면서

절을 짓게 했는데 마침 옛 절터가 나왔어요.

그렇게 큰 토지 공사를 하다가

어디선가 큰 항아리가 나와서 임금에게 바쳤습니다.

임금의 명으로 항아리를 깨어보니 새 집이 나왔는데

새 집 속을 들여다 보니까 사람같은 것이 나와서

그 털을 다 깍아보니까 사람이었어요.

한편 도사는 밖이 시끄러운 것을 느끼고 7일이 되었는가 보다 하고

눈을 떴는데 150년이 지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 난리가 나고 신인으로 불렀는데

어떤 스님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 시녀들을 같이 들어가게 해서

동하는가 시험해보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왕이 구멍으로 보니까 금방 동하더래요.

그래서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이것이 무기입니다.

무기란 기억이 일순간 없어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멍한 것인데 다시 기억이 돌아오면 심성이 똑같아져요.

그래서 옛부터 무기에 빠짐을 경계했습니다.

즉, 멍한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깨어나면 같다는 말입니다.

전혀 진전이 없어요.

깨달음은 지금 이렇게 생생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속에서 일어나야 해요.

그래야 나를 자유롭게 조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깨침, 그리고 원은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렇게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점점 마음이 쉬어서 아무것도 원함이 없게 되면

저절로 깨침이 오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무엇이 듣는가?' 이것을 탐구하면서

무엇이.......라는 의심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공부가 지속되지 않고 집중도 되지 않아요.

무엇이 듣는가? 이것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나중에 답도 나타납니다.

바로 오늘 내용이 그 답입니다.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여기서 비추어 보았다는 말은 마음에서 오온이란 공한 것임을 확실하게.....

만물이 거울에 나타나듯이....

호수에 저 산의 단풍이 아름답게 비추듯이.....

佛影寺 연못에 정상의 佛頭峰이 훤하게 나타나듯이

오온이 공함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순간을 비추었다고 표현했어요.

마음에서 한순간 선명하게 누가 듣는가? 라고 집중하고 몰두하다가

선명하게 무엇인가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바로 오온이 공한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이 비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몸도 비고 마음도 비었다.......

이것을 알지 않고 깨닫게 되었다......

마음의 호수에 선명하게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아는 것이 병입니다.

불가에서는 아는 것이 큰 병이라고 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알았다는 것이 있으면

부처님도 버리고 스승도 버리고 자기 신분도 버리게 됩니다.

그 알았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리고 이 법은 알면 십만 팔천리나 멀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알려고 해요.

알면 여러가지 병이 오게 되어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병이 거만병입니다. 아상 존심.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거만해져서 남을 무시하고 불교도 무시합니다.

얼마전에 노숙자하고 대화를 했어요.

두 사람이 똑같이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을 대면서 제가 그 사람 참 훌륭한 사람이어요.

우리는 그 분 따라가지 못합니다.

비록 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죽을 때 현금만도 30억이 나왔어요.

방에서 나온 돈만 해도 2천만원입니다.

그랬더니 ....그 노숙자가....대뜸 하는 말이

아, 뭐 그까짓 30억을 가지고 뭐 그리 많다고 합니까?

그래요. 그래서 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니, 댁은 얼마나 가지고 있기에 그렇게 말하시우?

그랬더니 ...아,,,,뭐 나는 가진 것이 몇백도 안되지만....

수백억은 되어야 많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아이고~~~이 노숙자 좀 보게나....

자기는 몇 백밖에 없다면서 현금 30억을 남긴 사람을 무시하네....

그 사람 집까지 합치면 수백억이야요.

그런 사람 드믈어요.

댁이나 나는 죽을 때가 되어도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을 거외다. 했어요.

노숙자들이 꼭 말하면....그까짓 것이 뭐 대단하다구....해요.

서울역에 가서 노숙자에게 물어봐요.

대통령 참 대단하지요? ...해봐요. 그러면 그까짓 대통형이 뭐 대단합니까 해요.

적어도 세계를 통일해야 대단하죠....해요.

노숙자들은 항상 그런 식야요.....오히려 자기가 대통령보단 낫다고 하면서

신문을 깔고 쭈구리고 자요....허허허

이 노숙자와 같은 자가 아는 자입니다.

알면 쥐꼬리를 잡고서 코끼리 몸통을 들고 있다고 말해요.

깨달음은 아는 것과 십만 팔천리입니다.

깨달음은 깨어남이어요.

장님이 눈을 비로소 뜬 것이지, 아직 눈을 감고 있으면서 뭘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의 피해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른다면 한 마디를 듣고 깨어나게 되는데

알면 금방 아~~저것... 하고....이해를 해버려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말에도 깨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알지 말고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면 생각이 중지되어 고요한 상태로 비로소 주변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움직이던 모든 것들이

중지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사물의 진실을 알게 되요.

고요함.......이것은 빔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마음을 중지하고 봐야 진실이 나타납니다.

내가 마음이 옳다 그르다, 더럽다 깨끗하다 하고...

본래 고요한 마음에서 한번 움직여 굴렀는데 그렇게 뒤바뀐 상태로

사물의 진실을 보려고 하면 절대 제대로 못봐요.

더군다나 앎이라는 조건이 있으면 영원히 가려집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들.....

어떤 것도 좋으니까 다 버리세요.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하나의 그렇게 알고 있는 앎일 뿐입니다.

내가 안다는 것

이것은 내가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지 진실은 아니어요.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것을 진실인 것 처럼

거기에 믿고 의지하고 달려갑니까?

그 앎 때문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시끄러워요.

앎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나오는 "몸과 마음은 비었느니라."

이 말 한마디에 깨어나야 합니다.

이 몸....이것....허망한 것입니다.

이것....언젠가 스스로 없어져요.

생길 때도 스스로 생겼듯이 없어질 때도 스스로 없어집니다.

자연의 물질이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이것은 자연의 한 흐름이어요.

거기서 허망하게 생긴 몸뗑이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내것이다 하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나

곧 없어지는 허망한 물거품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없어져요.

누구도 여기에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래 없는 데서 공연히 아침 이슬처럼 생겼다가 없어져요.

신문에 비행기가 100m아래로 떨어졌어요.

40여명이 다쳤습니다.

그 사람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허공.....이것도 안전하지 않아요.

허공에는 기압이 있어요.

알죠? 별똥들이 떨어지다가 타버리는것

빠른 속도로 떨어지면 허공의 마찰력에 의하여 별이 타요.

개구리가 뛰려면 땅이 있어야 해요.

땅을 딛고 다리를 일단 움추렸다가 휙 펴면 멀리 뛰어요.

그런데 개구리가 뛰었다가 순간 다리를 팔랑개비처럼

빠르게 돌리면 더 멀리 갈까요?

맞습니다.

실제 그렇게 된다면 멀리가요.

왜냐?

허공은 기압이 있어서 빨리 돌리면 허공을 미는 힘이 생겨서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원리로 비행기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압이 없어졌어요.

프로펠러가 밀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프로펠러가 돌아도 비행기는 밑으로 떨어져요

이유는 기압이 방향을 아래로 흘러가기 땜에 없는것 같은 효과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기가 떨어졌어요.

우리 모두 그때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그 순간을 체험했어야 하는데.....

100m 아래로 툭~우리 모두 가상 체험해봅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프로펠러가 돌면 비행기는 앞으로 간다......

그러나 밑으로 떨어지는 수도 있어요.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처럼 지금 내 몸이 영원하리라 믿지만

잠시뒤에 없어져요.

믿음.....이것 허망한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알았습니다.

몸과 그리고 거기서 나온 각종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나....

마치 호수에 영상이 비추듯이 진실을 선명하게 비추어보고 크게 깨달았어요.

몸과 마음(오온=색수상행식)은 의지할 것이 못되는 것이구나......

저기 저 허공이 바로 나로구나.......

저 허공이 우주요, ....자연이요, 모든 존재의 본질이구나.......

그런데 저 아무 것도 없는 저 것에서 무엇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냐......

나도 없고....마음도 없고 우주가 비어있는데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인가

거기 어찌 앎이 들어갈 틈이나 있을까보냐?

이렇게 깊이 깨닫고 비로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度一切苦厄 (도일체고액 )

모든 괴로움을 여의없느니라.

깨달음은 목적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깨달았다 해놓고 괴로워 한다면 그는 가짜입니다.

적어도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그 결과가 해탈이요, 탈고脫苦입니다.

부처님도 그러했고 많은 선사들도 그러했어요.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났어요.

그런데 깨달은 자가 작은 말 한마디 욕하는 소리....

시기하는 소리....

미워하는 말....질투하는 말...에 괴로워한다면

남편의 말이 고깝고, 부인의 말에 성질나고....자식의 말에 화가 나면....

어찌 아는 것을 벗어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깨달음은 아는 것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앎 이것이 괴로움을 일으켜요.

몸과 맘이 본래 공한 것인줄 깊게 느끼십시오.

깊게......깊게 느끼고.....자꾸 저 허공이 나라고 동일시하세요.....

그래서 몸에도 맘에도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혹 이런 강의 듣다가

불교는 너무 염세적이요, 바보같은 삶을 원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불교는 상당히 현명하고 영리합니다.

즐거움을 찾아서 진실을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바보가 아냐요.

다 듣고 느끼고....말하면서 여기서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갈수있을까 찾는 것이 불교의 과제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 무한히 창의적인 삶을 살기를 바래요.

창의적인 인생......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독특한 자기의 인생

무한히 미래지향적이고....현실적인 삶과 말들....

이것이 막 쏟아져나옵니다.

절대 바보가 아냐요......

명심하세요.

당신은 아주 똑똑해져요.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요.

생각이 우주를 넘나들고 과거현재 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흝어보고...시야가 넓어집니다.

누가 그랬나요? 불교를 하면 바보가 된다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누구와 토론을 해도 이기고 .....똑똑해져요...

자식을 잘 키우고 부부가 최대로 행복한 삶을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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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세음보살의 耳根圓通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오온이 다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였느니라. 

 

  行深般若波羅蜜多時 :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이것을 원서(범어)에는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라고 되어있습니다. 

  편의상 한문 번역으로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라고 합니다만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원어 번역대로 생각해야 좋습니다. 

  즉, 깊이 수행했다는 말입니다. 

  한자식은 깊는 반야...가 되는데  깊은 반야를 행할 때에..이렇게 되죠. 

  그러나 원어에서는 깊은 반야를 행한 것이 아니고  깊이 반야를 행할 때에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반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반야행을 깊이

  했다라는 말입니다. 

  의역하면 '관자재보살이 반야행을 깊이 할 때에' 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반야행을 하긴 하는데 깊이 했다는 말인데 ... 깊이 해서 일체 모든 고액을 건너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관자재는 흔히 '관세음'이라고도 부릅니다. 

  관세음보살은 이상하게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찰에서나 밖에서나 주로 일반인들의 어려운 것을 해결해주고 

  문제를 해소하여 주는....일종의 고충처리를 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것 억지로 하라고 하면 아마 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관세음은 스스로 하고싶어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저의 전생 인연은 어떻게 되었기에 제가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까?

  보살아, 너는 네 스스로 알아보도록 해라. 

  너는 저 마일국의 장자 관세음이었느니라..... 

  그러기 전에 너에게는 특이한 인연이 있으니 네가 알려고 하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 

  그래서 관세음은 열심히 수행을 했습니다. 

  그때에 한 수행을 '반야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자기를 버리는 수행을 하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자기를 버리고 앎을 버릴 것인가....

  관세음은 특이한 명상법으로 수행하였는데 

  '이 소리를 듣는 자가 누구인가?'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명상 주제였습니다. 

  이 소리.....

  이것을 듣는 자가 누구야? 

  그렇게 계속 생각했어요. 

  누가 듣는가?,,,,,누가 듣는가?.....

  몸이 듣는가?....

  몸이 듣는다면 죽은 자도 들어야 하는데 죽은 자는 듣지 못한다.....

  그럼 마음이 듣는가?

  마음이 듣는다면 마음이 어디 있어야 하는데....무엇이 마음인가?

  이 마음을 볼 수 있는가?

  그런데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는 것이니....어찌 몸 따로 마음 따로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럼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도대체 누가 듣는가?

  누가 듣는가......?

  이렇게 오랫동안 수행했습니다. 

  관세음의 화두는 '누가 듣는가' 였어요.

  그렇게 세월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알았습니다. 

  아, 이 놈이 듣는구나.....!

  그래서 부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부처님 제가 알았습니다. "

   "듣는 놈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 

  "그래 누구더냐?"

  "구원겁전부터 있던 부처요, 관세음(觀世音)입니다." 

  觀世音=세상의 음성을 觀하다. 

  觀=마음으로 보는것

  見=눈으로 보는 것

  看=두루 살펴보는 것

  視=확 터진 것을 보는 것 

  "그래.....네가 이제 듣는 그 자를 제대로 알았구나."

  부처님의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그때 관세음은 시야가 밝아지면서

  전생을 환하게 보게 되는 신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전생에 속이와 함께 보타락가산에서의 인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속이=대세지보살의 전신

  저 과거 전생에 관세음은 7살이었고 이름은 '조이'이고, 동생 '속이'는 5살이었습니다. 

  친모가 돌아가시자 계모와 살게 되었는데 

  그 전생에 아이들이 계모에게 빚을 진 것이 있어서... 

  계모가 아이들을 미워했어요. 

  남편이 밖에 일을 하러가면 

  아이들은 광에 가두어 놓고 돌아올 때쯤이 되면 꺼내놓았습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하루 종일 지내면서 항상 밝은 곳을 원했어요. 

  우리는 언제나 저 밝은 곳에서 뛰어다니면서 놀게 될까? 

  이것이 소원이었어요.

  그러던중 아버지가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돈을 벌러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매일 광에 갖혀 지내던 어느날 폭풍우가 치고 비바람이 부는 한 밤중에 ....

  계모는 아이들을 광에서 나오라고 하더니 

  횃불을 들려주면서 어서 조각배에 타라고.... 시키면서....조금만 가면 너의 아버지

  가 기다리니 그리로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비바람에 폭풍은 불어오고.... 파도는 산더미처럼 밀려옵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은 아버지를 만나려는 일념으로 바다 가운데로 노를 저어나갔는데.....

  얼마 안가서 그만 배는 뒤집히고 아이들은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얼마후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도 없는 무인도에 밀려와서 

  겨우 목숨은 붙어있게 되었어요. 

  춥고 배고프고 외로움은 이루 말로 할수 없었어요. 

  무인도에서 얼마 동안은 바다 생물을 잡아먹고 살았지만 

  겨울이 되자 의지할 데가 없어서 추워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조이와 속이는 서로 다음생을 위한 맹세를 각자 옷에다 써놓기로 했어요.  

  손가락에 피를 내어 글씨를 썼습니다. 

  다음생에서는 춥고 어두운 중생을 위해서 살리라.....

  계모처럼 포악한 사람은 착하게 제도하리라. 

  바다에 빠져서 어렵게 된 사람을 구하리라. 

  등등 32가지 원을 옷에다 써놓고 조이와 속이는 부둥켜안고 죽고 말았어요. 

  한편 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집안에 들어서면서 기분 좋게 

  조이야....! 속이야....! 귀여운 내 자식, 어디에 있느냐....?면서 

  아들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아들들은 기척이 없고 

  부인은 상복을 입은 채로 슬피 울면서....말하길....

  아아...여보, 이렇게 억울하고 기믹힌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글세... 아이들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비오는 날 바다로 나가기에 

  가지마라고 타일러서 자게 했는데.... 

  다음날 아이들은 없고 ....바닷가에 매놓은 배도 없지 뭡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사람을 풀어서 아이들은 찾아 사방에 수소문을 내었으나

  바다에도....들에도.....산에도 없으니 .... 

  이렇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당신이 없을 때 아이들을 잘 지키고 보호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못했으니 무슨 낯으

  로 당신을 볼 것이며 그 책임을 어떻게 모면하겠습니까?

  그래서 당신이 오면 이 말을 하고 죽으려고 이렇게 칼을 품고 매일 잠을 잤습니다. 

  하고는 품에서 칼을 꺼내어 죽으려는 시늉을 했어요. 

  그러자 남편이 붙잡으면서......울면서.... 

  아, 아...! 아이들이 행방불명이고 당신 마저 죽으면 나는 어찌하란 말이요.....

  당신의 책임이 아니니까, 나를 보아서라도 그러지 마시오.....

  그렇게 그날은 넘어갔으나....

  아버지는 매일 바다에 나와서 혹시 아들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비가 오고 눈이 오고....바람이 불고....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오자

  큰 배를 놓아 샅샅히 바다를 뒤졌는데 .....

  보타락가 무인도 섬에서 백골 2개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 옆에 바람에 펄럭이는 다 떨어진 옷의 글씨를 보니 

  아들들이 틀림없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역시 똑같이 원을 세웠습니다. 

  "이 세상에 어리석은 자들은 내가 다 제도하리라....."

  그리고 아들들을 보타락가산에서 화장을 하고 돌아오니까 

  부인은 이미 뱃사공과 어디로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관세음보살의 전생 인연이었습니다. 

  그때 부친은 석가모니불이었고 

  속이는 후에 대세지라는 대보살이 되었고 

  조이는 관세음이라는 보살이 되어서 

  부처님 도량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안 관세음보살은 즉시 일어나 전생에 세운 원을 다시 세웁니다. 

  그것이 32가지 원인데 

  내용이 주로 일체 중생의 어려움을 언제든지 들어주겠다는 원이었어요. 

  그래서 평생을 부처님 곁에 계시면서 중생의 고충처리를 하다가

  나중에 열반에 들어서 지금은 극락세계에 계십니다. 

  극락세계의 삼존불하면 아미타불,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입니다. 

  절에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에 가면... 큰 절에는 3존불이 있습니다. 

  지장보살님은 달라요. 

  그 분도 기구한 인연이 있는데 

  그 분은 지금 지옥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로 맹세했어요. 

  그래서 10대왕이 계시는 곳에 계십니다. 

  지장전이나, 10왕전에 가보세요.

  거기 계시는 분이 지장보살인데 그 인연은 나중에 말해드릴 께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한 생의 인연이 아닙니다. 

  지나다가 옷깃만 스쳐도....말만 몇마디 하여도 3년간 알고 지냈던 인연이라고 합니다. 

  부부 역시 3년간 알고 지낸 사이라 부부가 되는데...

  옛날 학능라존자라는 분이 중국에 계셨는데

  그분은 5백마리의 학을 몰고 다니셨어요. 

  5백마리 학이 웬일인지 학능라 스님을 따라다닙니다. 

  나중에 도를 깨닫고 보니까 학들은 전생에 자기 제자 500명이었는데 

  스승은 열심히 수행해서 다시 사람이 되었고 도를 이루었으나 

  제자들은 부처님의 밥을 얻어먹기는 하고 수행은 게을리 하여

  낮은 단계인 축생....학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도 전생부터 좋은 인연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좀 부족해도 잘 봐주시고 이 인연 오래 오래가면서
 
  서로 탁마하고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관세음보살이 이런 전생을 알게 되고 신통을 얻은 것을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고 합니다. 

  즉, 이 소리를 누가 듣는가....?

  이 듣는 주인공을 통하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뛰어난 변재를 얻고 나중에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도 하였는데 

  이 반야심경도 부처님을 대신해서 관세음보살이 설한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 첫 머리에 관세음보살은 반야수행을 깊이 하였다고 했어요.

  다른 것은 몰라도 반야수행은 정말 깊이 해야 합니다. 어물쩍 하면 안 되요. 

  성철스님이 꿈 속에서도 잊지말고 공부할 정도로 하라고 한 이유가 바로 

  깊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끈끈한 아교와 같습니다. 

  더럽고 추한 곳에는 더 달려가서 집착해요. 웬만한 수행으로 그것 떼어내기 어려워요.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깊이 닦아놓지 않으면 안되요. 

  깊이 해야 바른 깨달음이 오고 한번 깨달으면 다시는 유혹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선사들이 깨달았나를 시험하는 것도 유혹되지 않나 그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을 잘하여....근사한 격외구를 써서 도를 표현하면 

  인가하겠지 하고 생각하고 찾아가겠지만 

  선사는 아는 것을 묻지 않고....대뜸을 욕을 하여 상대의 반응을 봅니다. 

  얼토당토않게 욕을 얻어먹고 얼굴이 고요하고 아무렇지도 않으면

  그때 좀 말할 상대구나 하고 말하나...

  혹시라도 동요가 있거나 멋적어하는 표정이면 ...즉시 돌아앉으면서 

  가라고 해요.....그런 경지로 도를 논하려고 하다니....하면서 말입니다. 

  이 소식은 여러분이 고요했을 때 아는 것이지 동요하는 마음,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모릅니다. 

  누가 듣는가...? 이것 몰라요. 

  혹 알았다 해도 표현하지 못하고.....선사 앞에서 표현했다 하여도 엉뚱한 것을

  표현할 뿐입니다.  

  이 공부는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대개 알아도 무의식에 다 고꾸라집니다. 

  그렇기 땜에 이왕 수행하려면....

  자기를 버리려면.....

  깊이 해야 해요. 

  염불선을 하는 사람은..... 24시간 관세음보살을 불러야 하고 

  화두를 드는 사람도 24시간 화두만 들리는 경지를 체험해서 

  완전히 무심 삼매....24시간 지속되면 무심삼매라 해요.

  무심삼매라고 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니고요. 

  아무 생각도 없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방편을 잡는 것입니다. 

  그것이 화두입니다. 

  화두로 24시간 줄기차게 지속되는 사람은 

  화두를 들지 않아도 무심이 됩니다. 

  나중에 화두조차 버리고 무심만 남아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화두를 들지만 나중에는 화두도 버리고 무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화두를 버리는 날은 무심을 얻은 때입니다. 

  그때는 유혹되지 않을 때이고요. 참 자유를 얻었을 때입니다. 

  관세음은 깊이 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괴로움을 벗어난 경지를 얻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깊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혜능은 8개월간 했고.... 

  부처님은 6년간 했어요.

  어떤 스님은 3년간.....효봉스님은 1년 6개월간....영가스님은  즉석에서 집중하고

  깊이 했어요. 

  그렇게 짧지만.... 

  모두 깊이 했습니다. 

  오래하려고 하지 말고 짧은 시간을 해도 

  진중하게... 깊게.....전신을 바쳐서.....생명을 바쳐서 하면 

  어찌 어리석음을 떨치고 지혜로움으로 나아가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단 5분을 하여도.....깊이....

  108배를 하여도 깊이 하여 진실에 성큼 다가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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