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시작한 지 8주가 되었으니까 56일이 지났네요. 백일 중 절반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3일이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56일간 꾸준히 수행을 하셨으니 장한 일이에요.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내 마음의 습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한국에는 콩으로 만든 된장이라는 게 있는데요. 한국 사람은 보통 이 된장 냄새를 맡으면 바로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된장 냄새를 맡으면 역겨워서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된장 그 자체가 역겨운 게 아니라 살아온 습관에 의해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냄새가 역겨워도 몸에 좋으니까 먹어야 한다’ 또는 ‘너무 먹고 싶지만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건 생각이에요. 이때 의지가 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먹지 않거나, 먹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먹습니다. 그러나 의지로 마음을 억누르면 사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의지가 꺾입니다. 그래서 각오하고 결심해서 시작했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도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절을 하면 좋다고 하니까 시작을 했지만 과거에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저항이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수행이란 절을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에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에 종속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 습관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하면 몸에 밴 습관이든, 생각의 습관이든, 마음의 습관이든, 나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은 능히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을 무조건 참고 의지로 억누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계까지 가야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습관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동으로 늘 좋고 싫은 감정, 하고 싶고 하기 싫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감정과 욕구에 매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감정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 다음 생에 태어나서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괴로우냐, 안 괴로우냐가 핵심 과제예요. 지금 내가 괴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중요해요.
지금 괴롭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괴롭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는 내생이 있든지 없든지 윤회를 하든지 안 하든지 지옥 가든지 천당 가든지 이런 것이 도무지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생이나 윤회는 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나온 관념들입니다. 수행을 하면 인생에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과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음의 실체가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무슨 뜻인가요?
“스님을 뵙고 저는 불교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공사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수행문에도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에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나요? 저와 같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서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로 가는 길
“예를 들어 시카고를 간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시카고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질문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실 겁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쪽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하실 거예요. 질문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방향이 다 다릅니다. ‘그럼 시카고로 가는 방향은 도대체 어느 방향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는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정해지려면 질문자의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면 방향이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있다면 서쪽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질문자의 위치에 따라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질문자의 대화를 모아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어떤 경전에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 동쪽, 어떤 경전에는 서쪽, 어떤 경전에는 북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전을 두고 어느 방향이 맞는지 논쟁을 하거나 어느 방향이 더 좋은지 논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대에 많은 학파와 종파가 나누어진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즉, 질문하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냐를 고려하지 않고 시카고로 가는 절대적인 하나의 방향을 자꾸 주장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는 언제나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든 부처님은 그 질문자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길을 인도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면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 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공(空)’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입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다면 방향은 동쪽으로 정해집니다. 애틀랜타에서 출발한다면 북쪽으로 정해집니다. 방향은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그것일 뿐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컵과 컵 받침대를 보십시오. 제가 있고, 컵이 있고, 컵 받침대가 있습니다.
컵은 받침대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컵은 법륜스님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Nothing.”(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네. 컵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질문을 바꿔서 이 컵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이 컵은 비쌉니까? 쌉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를 하면 이 컵은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하기도 하고, 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크다 작다, 비씨다 싸다, 가볍다 무겁다는 성질은 컵에 있는 거예요? 내가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네, 인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을 한 건데, 컵 자체가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했다고 보고 컵이 작은 게 사실이라고 객관화시켜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 옳고 그른 시비 분별은 다 내가 일으킨 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컵을 작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이 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는구나’ 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누구는 시카고 가는 길이 동쪽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쪽이라고 하면 어느 게 맞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서쪽이라고 하면 ‘아, 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고 동쪽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보스턴에 살고 있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는데 이해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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