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시작한 지 8주가 되었으니까 56일이 지났네요. 백일 중 절반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결심을 하고 3일이 못 간다는 말이 있는데 56일간 꾸준히 수행을 하셨으니 장한 일이에요.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의 작용이에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내 마음의 습관에 의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해야 한다는 생각의 작용입니다.

 

한국에는 콩으로 만든 된장이라는 게 있는데요. 한국 사람은 보통 이 된장 냄새를 맡으면 바로 먹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서양 사람들은 된장 냄새를 맡으면 역겨워서 싫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된장 그 자체가 역겨운 게 아니라 살아온 습관에 의해서 좋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냄새가 역겨워도 몸에 좋으니까 먹어야 한다또는 너무 먹고 싶지만 먹으면 건강에 나쁘니까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건 생각이에요. 이때 의지가 강한 사람은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먹지 않거나, 먹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먹습니다. 그러나 의지로 마음을 억누르면 사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먹고 싶고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면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의지가 꺾입니다. 그래서 각오하고 결심해서 시작했다가 결국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아요. 여러분도 매일 일찍 일어나서 절을 하면 좋다고 하니까 시작을 했지만 과거에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저항이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수행이란 절을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에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습관에 종속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 습관을 거슬러 갈 수 있는 연습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꾸준히 하면 몸에 밴 습관이든, 생각의 습관이든, 마음의 습관이든, 나에게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은 능히 멈출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손실을 가져오는 습관을 무조건 참고 의지로 억누르라는 말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은 의지가 강하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단계까지 가야 수행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습관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어요.

 

인생을 살면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동으로 늘 좋고 싫은 감정, 하고 싶고 하기 싫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감정과 욕구에 매이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감정과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울 일이 없어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죽어서 천국에 가느냐 안 가느냐, 다음 생에 태어나서 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괴로우냐, 안 괴로우냐가 핵심 과제예요. 지금 내가 괴롭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중요해요.

 

 

지금 괴롭지 않으면 과거도 미래도 괴롭지 않게 됩니다. 수행자는 내생이 있든지 없든지 윤회를 하든지 안 하든지 지옥 가든지 천당 가든지 이런 것이 도무지 관심사가 아닙니다. 내생이나 윤회는 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나온 관념들입니다. 수행을 하면 인생에 두려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가 과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여러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마음의 실체가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무슨 뜻인가요?

“스님을 뵙고 저는 불교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공사상’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천일결사 기도 수행문에도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에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됩니다. 마음이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어떻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되나요? 저와 같은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서 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목적지로 가는 길

예를 들어 시카고를 간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여쭸어요.

 

시카고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면 됩니까?’

 

질문한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산다면 부처님은 동쪽으로 가라고 하실 겁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이라면 서쪽으로, 애틀랜타에 사는 사람이라면 북쪽으로 가라고 하실 거예요. 질문자가 있는 위치에 따라 방향이 다 다릅니다. ‘그럼 시카고로 가는 방향은 도대체 어느 방향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느 방향이라고 정해서 말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가는 방향이 없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가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정해지려면 질문자의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다면 방향이 동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있다면 서쪽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부처님은 질문자의 위치에 따라 방향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질문자의 대화를 모아 놓은 것이 경전입니다. 어떤 경전에는 시카고로 가는 길이 동쪽, 어떤 경전에는 서쪽, 어떤 경전에는 북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경전을 두고 어느 방향이 맞는지 논쟁을 하거나 어느 방향이 더 좋은지 논쟁을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후대에 많은 학파와 종파가 나누어진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 질문하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냐를 고려하지 않고 시카고로 가는 절대적인 하나의 방향을 자꾸 주장한 거예요.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는 언제나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든 부처님은 그 질문자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길을 인도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면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시카고 가는 방향이 어떤 방향입니까?’

 

이렇게만 물으면 정해진 길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다면 방향은 동쪽으로 정해집니다. 애틀랜타에서 출발한다면 북쪽으로 정해집니다. 방향은 인연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선불교에서는 이것을 중도(中道), 근본불교에서는 무아(無我),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다만 그것일 뿐

다른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컵과 컵 받침대를 보십시오. 제가 있고, 컵이 있고, 컵 받침대가 있습니다.

 

 

컵은 받침대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큽니다.”

 

 

컵은 법륜스님보다 큽니까, 작습니까?”

 

작습니다.”

 

이 컵은 큽니까, 작습니까?”

 

“Nothing.”(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 컵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질문을 바꿔서 이 컵은 무겁습니까, 가볍습니까?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습니다. 이 컵은 비쌉니까? 쌉니까? 비싼 것도 아니고 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교를 하면 이 컵은 크다고 불리기도 하고 작다고 불리기도 합니다. 비싸다고 하기도 하고, 싸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크다 작다, 비씨다 싸다, 가볍다 무겁다는 성질은 컵에 있는 거예요? 내가 인식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예요?”

 

, 인식하는 방법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에서 작다고 인식을 한 건데, 컵 자체가 작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했다고 보고 컵이 작은 게 사실이라고 객관화시켜요. 존재 자체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내가 어떤 것과 비교해서 인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어떤 사람을 보고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 옳고 그른 시비 분별은 다 내가 일으킨 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나는 이 컵을 작다고 보는데 다른 사람이 크다고 하면 틀렸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이 컵을 크다고 인식하는구나이렇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 다르게 인식한다고 해서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누구는 시카고 가는 길이 동쪽이라고 하고 누구는 서쪽이라고 하면 어느 게 맞는지 따질 필요가 없어요. 서쪽이라고 하면 , 저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구나.’라고 이해하면 되고 동쪽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보스턴에 살고 있구나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제가 너무 길게 얘기했는데 이해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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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이 생기는 근본 원인

 

기도 잘하셨습니까? 요즘 우리는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Sutta Nipāta)를 독송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주로 분노와 탐욕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집착하고 내 것에 집착합니다. 내 견해에도 집착합니다. 내 견해가 옳다고 집착하면 분노가 일어나고, 내 것에 집착하면 탐욕이 일어납니다. ‘에게 집착하면 어리석음이 생깁니다. 경전에는 이런 나에 대한 집착이 고통이 생기는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자기 견해를 고집할 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믿음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라고 집착하는 거죠. 종교 간 분쟁도 믿음에 대한 집착이 근본 원인입니다. 둘째, ‘생각입니다. 자기가 사유한 것, 즉 자신이 아는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거예요. 학문적 논쟁이나 정파적 갈등은 생각에 대한 집착이 근본 원입니다. 셋째, 좋고 싫은 자신의 감정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 견해에 집착을 하면 논쟁을 하고, 상대를 비난하고 화를 냅니다. 논쟁에서 이기면 교만해지고, 논쟁에서 지면 기가 죽어요. 자기 견해에 집착을 하면 이렇게 여러 가지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특히 자기가 경험하고 믿고 아는 것만이 옳다는 집착이 수많은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부처님 살아계신 당시에도 육사외도, 62견해 등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기의 주장은 옳고 다른 사람의 주장은 틀렸다고 논쟁을 했습니다. 심지어 상대를 비난하고 해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부처님도 모함을 많이 받으셨어요.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다른 학파의 사람들이 부처님을 시기 질투해서 음모를 꾸미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잘못된 견해에 대해 법문을 하신 적이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기

진리는 스스로 체험해서 검증해야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교리, 경전, 윤리, 도덕, 관습, 습관에 의해서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괴로움이 생겼다면, 먼저 현재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지 알고, 직접 실천해야 해요.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사물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덟 가지 바른 길 중에서 첫 번째가 정견(正見)이에요. , 바르게 보라는 것입니다. 바르게 본다는 말은 바르게 안다는 얘기입니다. 바른 앎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바른 앎입니다.

 

 

'삿된 견해'란 잘못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뇌는 어떤 상황을 인지하고, 같은 상황이 두세 번만 반복되면 ', 이것은 이렇구나' 하고 단정하는 고정적인 관념이 생겨버립니다. 이 고정관념은 일상생활에 편리한 점도 있어요. 그러나 현실이 바뀌면 바뀐 상황을 인식해야 하는데, 먼저 생긴 고정관념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대승불교에서는 '상을 짓는다'라고 말해요.

 

사람들이 견해에 집착하고 싶어서 집착하는 건 아닙니다. 자기가 아는 것이 나름대로 객관적 사실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이게 사실인데 틀린 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잖아요. 장님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어보면 다 달라요. 코를 만져본 사람은 '뱀같이 생겼다'라고 하고, 귀를 만져본 사람은 '부채같이 생겼다', 다리를 만져본 사람은 '기둥같이 생겼다', 꼬리를 만져본 사람은 '빗자루같이 생겼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요.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 코끼리 이렇게 생겼구나.' 정형화시킨다는 거죠.

 

전체를 보면 틀렸지만, 부분만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경험한 범위에서는 모두 진실인 거예요. 이것을 단견(短見) 또는 편견(偏見)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만 보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기 경험을 가지고 그 사람의 이미지를 정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미지 또는 연애할 때 이미지를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살아보면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도 보이잖아요.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모습인데, 사람들은 상대가 '변했다, 배신했다.'라며 갈등하고 괴로워해요.

 

 

늙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젊을 때 자기의 모습이 마음속에 정형화되어 있습니다. '원래 내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든지 '나는 이만큼 일할 수 있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요. 그래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는 데도 자기 얼굴을 보면서 '이건 내 얼굴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늙는다고 괴로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변한 것을 변한 대로 보지 않고 과거의 생각으로 보니까 늙음이 한탄스럽게 느껴지는 거예요. 일을 할 때도 자기 머릿속 관념과 나이 든 현실이 달라졌기 때문에 여러 가지 괴로움이 생깁니다. 남을 보면서는 '저 사람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잘 들어요. 정작 본인은 늙었다는 말을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늙어도 마음은 다 청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모순이죠. (웃음)

 

모든 것은 변화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사람들이 깨달았을 때 항상 나오는 구절 있습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한다

 

어떤 사물이든 사람이든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그냥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에 딱 다가오지 않죠. 그런데 깨달으면 자기가 안고 있었던 많은 번뇌와 괴로움이 사라져 버려요. 그래서 항상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하는 말이 '형성된 것은 모두 소멸한다'라고 거예요. 그리고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이것은 마치 덮인 것을 벗겨내어 보여주심과 같다.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심과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주심과 같다. 어두운 밤에 등불을 탁 밝혀주심과 같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변하고 있는데, 우리의 생각은 어느 한 부분에 딱 고정되어있습니다. 마치 카메라가 움직이는 사물의 한 장면만 딱 포착해서 찍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계속 현실하고 안 맞는 거예요. 그나마 변화가 느리면 덜 혼란스러운데, 변화가 빠르면 굉장히 혼란스럽습니다. 안과 밖이 안 맞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이 혼란스럽다'라고 이해합니다. 세상은 혼란스러울 게 없어요. 세상은 늘 변하는데 내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워지는 거예요. 내가 가진 생각의 틀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늘 변화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 깨어 있어야 아무런 편견 없이 현실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현실에 기초해서 인생을 산다면 괴로울 일이 없어요.

 

숫타니파타(Sutta Nipāta)는 초기 경전이기 때문에 경전의 형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건이 있어서 부처님이 법문을 하셨는데, 그 사건은 없고 법문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즉문즉설을 하면, 그 중에서 몇 구절만 뽑아서 희망편지를 만들어 내보내지 않습니까? 왜 이런 법문을 했는지 배경은 없고 교훈적인 이야기만 있어요. 이런 형식은 법문을 짧게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배경이 없으니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앞으로도 며칠간 경전에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해탈할 수 없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른 종파나 학파에서 계속 부처님을 모함하고 논쟁했던 사건들이 있었던 후에 해주신 법문들이에요. 매일 아침마다 제가 하나하나 해설을 다 못하더라도 그런 배경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독송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괴롭지 않게 사는 길

부처님은 인생의 괴로움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인생을 괴롭게 살아갈까?’

 

부처님은 깊은 탐구 끝에 결국 화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지 않고,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괴로움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인도어로 니르바나(Nirvana, 열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본인도 안온하게 사셨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를 해결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르침은 한쪽은 불교라는 종교로 흘러갔고, 다른 한쪽은 불교철학이라는 학문으로 흘러갔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어떤 것을 믿는 종교도 아니고, 사유하는 철학도 아니고, 바로 실천하고 체험해서 자기 삶을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공부는 내 마음을 다스려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엇인지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지금보다 내가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을 강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 속에서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을 한 번 같이 찾아보자는 뜻으로 대화를 해봅시다.”

 

이어서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의 마음의 계절은 다 달랐습니다. 그중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 때문에 괴롭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편이 화가 나면 며칠 동안 말을 안 해요

“제 남편은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말도 많이 하고 농담도 하지만,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며칠이고 말을 안 합니다. 예전에 화가 나면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제가 풀어보려고 말을 걸어봤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편 성격을 알아서 화가 났다 싶으면 반발을 하지 않고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도 기분이 몹시 가라앉습니다. 며칠 지나서 남편이 화가 풀리면, ‘네가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났다’며 다시 말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제 기분이 남편 기분에 따라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죠?”

 

.”

 

 

질문자도 기분이 좋으면 좀 친절해지고, 기분이 나쁘면 말하기 싫어지잖아요?”

 

.”

 

본인이 그렇듯 남편도 똑같아요. 남편도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기분이 나쁘면 며칠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똑같긴 한데 남편이 너무 오래 동안 말을 안 하고 화를 내면 제가 많이 힘듭니다.”

 

오십보백보란 말이 있잖아요. 오십보 가나 백보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얘기예요. 기분이 좋으면 입 안에 있는 것도 내줄 듯이 하고, 기분이 나쁘면 줬던 것도 도로 뺏는 것이 사람입니다. 질문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사람이에요. 사람이니까 화를 낼 줄도 알고, 사람이니까 말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겁니다. 질문자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질문자가 남편을 볼 때, ‘왜 그만한 일에 화를 내고 말을 안 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 자주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질문자를 보고, ‘왜 그만한 일에 괴롭다고 그러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 알겠습니다. 스님께서 예전에 한 즉문즉설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가 말을 하면 개구리가 운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남편을 개구리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죠.(웃음) 개구리 하고 같이 산다고 하면 질문자가 창피하죠. 질문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개구리 하고 살 수준은 넘지 않아요?”

 

, 넘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개구리라고 하면 남편을 욕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 본인을 욕하는 셈이에요. 자기 가치를 좀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편을 볼 때 법륜스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웃음)

 

질문자가 매일 제 법문을 듣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남편 말을 제 말처럼 믿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웃음)

 

노력하면 안 돼요. 항상 이렇게 기도하세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남편이 감정에 기복이 있는 것은 남편이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안 되는 거예요. 남편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내가 남편에 대한 기대가 큰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마음이 좀 언짢은 거예요. 남편이 화도 좀 덜 내고, 갈등이 생겨도 빨리 풀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 주면 좋겠죠?”

 

.”

 

그런데 내 남편이 그만큼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뭐든지 줄 것처럼 하고, 기분이 나쁘면 토라져요. 토라지는 시간이 조금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로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첫째, ‘우리 남편은 사람입니다이렇게 생각하세요.

 

둘째, ‘남편은 사람 중에도 부처님이다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남편의 말을 부처님 말씀을 듣듯이 들으면 남편이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 남자가 부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남편은 부처인 거예요. 남편을 부처로 보면 질문자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기독교인에게 불상은 부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으로 볼 것 같습니다.”

 

불교인에게는 불상이 뭐예요?”

 

부처님입니다.”

 

그 불상이 부처인지 우상인지는 본래 정해져 있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우상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겠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기독교인은 불상을 우상으로 봐도 상관이 없죠. 절에 안 다니니까요. 그런데 매일 절에 다니는 불교인이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면 본인이 불행하겠죠. 다른 사람은 질문자 남편을 나쁜 남자라고 해도 괜찮아요. 같이 안 사니까요. 그런데 질문자는 그 남자하고 같이 살잖아요.”

 

. 평생 같이 살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누구 손해예요?”

 

제 손해입니다.”

 

질문자가 남편과 같이 못 살겠다고 했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예요. 남편 성격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것이 괜찮으니까 같이 사는 거죠?”

 

. 맞습니다.”

 

남편이 건강도 안 좋고, 돈도 못 벌고, 성격도 안 좋고, 애들한테도 잘 못 하고 다방면으로 나쁘다면, 저에게 이런 신세타령을 안 하겠죠. 스님한테 묻지도 않고 벌써 이혼해 버렸을 거예요.”

 

. 벌써 이혼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성격 빼고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남편이 이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한 가지 고치려다가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부처로 볼 거냐 우상으로 볼 거냐 하는 문제와 같아요. 기독교인들이 우상 숭배라고 할 때, 왜 우상이냐고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는 것은 네 자유다. 그래 봐야 네 마음만 허전하지 나는 매일 봐야 되니까 부처님으로 본다라고 하면 돼요. 그처럼 질문자에게 남편은 내가 매일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잖아요. 아이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인 게 좋아요, 나쁜 사람인 게 좋아요?”

 

훌륭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런 마음을 내어보세요. 설령 아이들이 아빠 성격이 문제야이렇게 얘기를 해도, ‘성격 빼고는 다 훌륭한 분이다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누구한테 좋다고요? 남편한테 좋아요, 질문자에게 좋아요?”

 

저한테 좋습니다.”

 

“‘훌륭한 남자하고 산다이런 관점을 가지면 자기에게 자긍심이 생기는 거예요. ‘남자가 성격이 나빠서 잘 삐지고 화를 낸다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저런 사람하고 평생 살아야 되나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남편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성격은 나하고 좀 안 맞지만 다른 건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나하고 안 맞는 거지, 그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행복하려면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내면 질문자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고 남편에게도 좋아요.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예요. 이 좋은 길을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할 때 왜 상대의 성격이나 생활습관은 안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결혼할 때 주로 무엇부터 봅니까? 첫째, 인물을 보죠.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면 인물은 더 이상 안 봐요. 아침에 눈 떠서 남편이나 아내를 딱 보니 인물 때문에 진짜 구역질이 나서 같이 못 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능력을 보죠. 어느 대학을 나왔냐, 월급은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 집안은 어떠냐,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게 능력을 보는 겁니다. 물론 연애를 좀 오래 하면 성격을 보긴 합니다. 그런데 생활 습관은 아예 안 봐요.

 

그런데 같이 살아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생활 습관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딪치는 것이 성격이고 세 번째가 능력입니다. 인물은 아예 해당도 안 돼요. 그러니까 결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보는 조건과 살면서 부딪히는 조건이 정 반대입니다. 같이 살기 좋은 사람보다 보기에 좋은 사람을 골라서 결혼을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같이 살려면 생활 습관이 잘 맞는지가 중요한데 다른 조건만 맞춰보고 결혼을 하니까요.

 

우리 일상도 그렇습니다. 경치 좋은 바닷가나 계곡에 가면 여기 집 하나 지어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한번 살아봐요. 습기도 많고 바람도 많고 소리도 시끄럽고 여러 가지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다고 반드시 생활에 좋은 것이 아니에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을 때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갈등은 대부분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닌 다른 것을 자꾸 문제 삼기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상대를 선택했을 때 인물을 봤다면 평생 인물만 논하고, 능력을 봤으면 평생 능력만 논해야지, 정작 같이 못 살겠다고 불평할 때는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논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남편의 성격을 자꾸 논하지 말고, 남편의 그런 성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요. 남편은 그렇게 생긴 걸 어떡합니까. 남편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남편에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서 정 못 살겠다면 저한테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묻기 전에 알아서 결정을 해버리죠. 저한테 물었다는 것은 남편에게 좋은 점이 많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이런 점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내 마음에 들도록 할까요?’ 이것이 고민이 되어서 묻거든요. 자기 힘으로 안 고쳐지니까 저에게 묻는데, 남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세요. 산에 가면 나무가 많지만 기둥하기에 좋은 나무는 드뭅니다. 목수가 가져와서 필요에 맞게 조금 다듬어야 됩니다. 결혼생활도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지, 딱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룸메이트나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맞춰가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봄

올 겨울이 유난히 추웠죠? 35년 만에 가장 추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따뜻한 미국 텍사스 주에도 영하 18도까지 떨어지는 한파가 몰아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는 봄은 막을 수가 없네요. 벌써 한국의 남부 지역에는 담장 밑에 난초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봄은 오고 있습니다.

 

 

봄이 왔건만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절은 봄이 되었는데, 마음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계절의 봄은 해가 점점 길어지면서 어김없이 오지만, 우리 마음의 봄은 수행정진을 해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계절의 봄과 함께 마음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공부를 좀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럼 마음공부는 어떻게 할까요?

 

괴롭지 않게 사는 길

부처님은 인생의 괴로움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인생을 괴롭게 살아갈까?’

 

부처님은 깊은 탐구 끝에 결국 화내지 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근심 걱정하지 않고,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괴로움 없이 편안한 상태를 인도어로 니르바나(Nirvana, 열반)라고 합니다. 부처님은 본인도 안온하게 사셨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닙니다. ‘괴로워하는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를 해결하는 가르침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가르침은 한쪽은 불교라는 종교로 흘러갔고, 다른 한쪽은 불교철학이라는 학문으로 흘러갔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원래 가르침은 어떤 것을 믿는 종교도 아니고, 사유하는 철학도 아니고, 바로 실천하고 체험해서 자기 삶을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마음공부는 내 마음을 다스려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가 무엇인지 이론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지금보다 내가 조금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자 합니다. 어떤 종교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어떤 철학을 강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의 삶 속에서 좀 더 가볍게 살 수 있는 길을 한 번 같이 찾아보자는 뜻으로 대화를 해봅시다.”

 

이어서 8명이 질문을 했습니다. 질문하신 분들의 마음의 계절은 다 달랐습니다. 그중 감정 기복이 심한 남편 때문에 괴롭다는 분의 질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편이 화가 나면 며칠 동안 말을 안 해요

“제 남편은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합니다. 기분이 좋으면 말도 많이 하고 농담도 하지만,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며칠이고 말을 안 합니다. 예전에 화가 나면 너무 오랫동안 말을 안 해서 제가 풀어보려고 말을 걸어봤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남편 성격을 알아서 화가 났다 싶으면 반발을 하지 않고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도 기분이 몹시 가라앉습니다. 며칠 지나서 남편이 화가 풀리면, ‘네가 어떻게 해서 내가 화가 났다’며 다시 말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제 기분이 남편 기분에 따라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도 기분이 좋을 때가 있고 나쁠 때가 있죠?”

 

.”

 

 

질문자도 기분이 좋으면 좀 친절해지고, 기분이 나쁘면 말하기 싫어지잖아요?”

 

.”

 

본인이 그렇듯 남편도 똑같아요. 남편도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 하고, 기분이 나쁘면 며칠간 말을 안 하는 거예요.”

 

똑같긴 한데 남편이 너무 오래 동안 말을 안 하고 화를 내면 제가 많이 힘듭니다.”

 

오십보백보란 말이 있잖아요. 오십보 가나 백보 가나 비슷비슷하다는 얘기예요. 기분이 좋으면 입 안에 있는 것도 내줄 듯이 하고, 기분이 나쁘면 줬던 것도 도로 뺏는 것이 사람입니다. 질문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편이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사람이에요. 사람이니까 화를 낼 줄도 알고, 사람이니까 말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는 겁니다. 질문자도 사람이니까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질문자가 남편을 볼 때, ‘왜 그만한 일에 화를 내고 말을 안 하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 자주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질문자를 보고, ‘왜 그만한 일에 괴롭다고 그러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잖아요.”

 

, 알겠습니다. 스님께서 예전에 한 즉문즉설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상사가 말을 하면 개구리가 운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남편을 개구리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안 괜찮죠.(웃음) 개구리 하고 같이 산다고 하면 질문자가 창피하죠. 질문자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개구리 하고 살 수준은 넘지 않아요?”

 

, 넘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개구리라고 하면 남편을 욕하는 게 아니라 질문자 본인을 욕하는 셈이에요. 자기 가치를 좀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이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어떨까요?”

 

, 기분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남편을 볼 때 법륜스님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웃음)

 

질문자가 매일 제 법문을 듣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남편 말을 제 말처럼 믿고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웃음)

 

노력하면 안 돼요. 항상 이렇게 기도하세요.

 

남편은 부처님입니다

 

 

남편이 감정에 기복이 있는 것은 남편이 사람이라는 증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내가 원하는 수준은 안 되는 거예요. 남편은 특별히 훌륭한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고 그냥 사람인데, 내가 남편에 대한 기대가 큰 겁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마음이 좀 언짢은 거예요. 남편이 화도 좀 덜 내고, 갈등이 생겨도 빨리 풀고,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도 해 주면 좋겠죠?”

 

.”

 

그런데 내 남편이 그만큼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단지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뭐든지 줄 것처럼 하고, 기분이 나쁘면 토라져요. 토라지는 시간이 조금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십보백보로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러니 첫째, ‘우리 남편은 사람입니다이렇게 생각하세요.

 

둘째, ‘남편은 사람 중에도 부처님이다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남편의 말을 부처님 말씀을 듣듯이 들으면 남편이 진짜 부처가 됩니다. 그 남자가 부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남편은 부처인 거예요. 남편을 부처로 보면 질문자도 덩달아 훌륭해집니다. 기독교인에게 불상은 부처일까요, 우상일까요?”

 

우상으로 볼 것 같습니다.”

 

불교인에게는 불상이 뭐예요?”

 

부처님입니다.”

 

그 불상이 부처인지 우상인지는 본래 정해져 있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면 우상으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는 것이 나에게 좋을까요?”

 

부처로 보겠습니다.”

 

 

불교를 안 믿는 기독교인은 불상을 우상으로 봐도 상관이 없죠. 절에 안 다니니까요. 그런데 매일 절에 다니는 불교인이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면 본인이 불행하겠죠. 다른 사람은 질문자 남편을 나쁜 남자라고 해도 괜찮아요. 같이 안 사니까요. 그런데 질문자는 그 남자하고 같이 살잖아요.”

 

. 평생 같이 살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누구 손해예요?”

 

제 손해입니다.”

 

질문자가 남편과 같이 못 살겠다고 했으면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예요. 남편 성격이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것이 괜찮으니까 같이 사는 거죠?”

 

. 맞습니다.”

 

남편이 건강도 안 좋고, 돈도 못 벌고, 성격도 안 좋고, 애들한테도 잘 못 하고 다방면으로 나쁘다면, 저에게 이런 신세타령을 안 하겠죠. 스님한테 묻지도 않고 벌써 이혼해 버렸을 거예요.”

 

. 벌써 이혼했을 것 같습니다.”

 

 

남편이 성격 빼고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남편이 이것만 고치면 참 좋겠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한 가지 고치려다가 전부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부처로 볼 거냐 우상으로 볼 거냐 하는 문제와 같아요. 기독교인들이 우상 숭배라고 할 때, 왜 우상이냐고 논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상을 우상이라고 보는 것은 네 자유다. 그래 봐야 네 마음만 허전하지 나는 매일 봐야 되니까 부처님으로 본다라고 하면 돼요. 그처럼 질문자에게 남편은 내가 매일 같이 살아야 할 사람이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잖아요. 아이들 아버지가 훌륭한 사람인 게 좋아요, 나쁜 사람인 게 좋아요?”

 

훌륭한 사람이 좋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에게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이런 마음을 내어보세요. 설령 아이들이 아빠 성격이 문제야이렇게 얘기를 해도, ‘성격 빼고는 다 훌륭한 분이다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그런 관점을 가지면 누구한테 좋다고요? 남편한테 좋아요, 질문자에게 좋아요?”

 

저한테 좋습니다.”

 

“‘훌륭한 남자하고 산다이런 관점을 가지면 자기에게 자긍심이 생기는 거예요. ‘남자가 성격이 나빠서 잘 삐지고 화를 낸다자꾸 이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저런 사람하고 평생 살아야 되나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남편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 성격은 나하고 좀 안 맞지만 다른 건 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세요. 나하고 안 맞는 거지, 그 성격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내가 원하는 만큼 안 될 뿐입니다. 행복하려면 긍정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마음을 내면 질문자에게도 좋고 아이에게도 좋고 남편에게도 좋아요.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거예요. 이 좋은 길을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할 때 왜 상대의 성격이나 생활습관은 안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은 결혼할 때 주로 무엇부터 봅니까? 첫째, 인물을 보죠.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면 인물은 더 이상 안 봐요. 아침에 눈 떠서 남편이나 아내를 딱 보니 인물 때문에 진짜 구역질이 나서 같이 못 살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둘째, 능력을 보죠. 어느 대학을 나왔냐, 월급은 얼마냐, 재산이 얼마냐, 집안은 어떠냐,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게 능력을 보는 겁니다. 물론 연애를 좀 오래 하면 성격을 보긴 합니다. 그런데 생활 습관은 아예 안 봐요.

 

그런데 같이 살아 보면 서로 제일 많이 부딪히는 것이 생활 습관입니다. 두 번째로 많이 부딪히는 것이 성격이고 세 번째가 능력입니다. 인물은 아예 해당도 안 돼요. 그러니까 결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보는 조건과 살면서 부딪히는 조건이 정 반대입니다. 같이 살기 좋은 사람보다 보기에 좋은 사람을 골라서 결혼을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같이 살려면 생활 습관이 잘 맞는지가 중요한데 다른 조건만 맞춰보고 결혼을 하니까요.

 

우리 일상도 그렇습니다. 경치 좋은 바닷가나 계곡에 가면 여기 집 하나 지어 살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잖아요. 한 번 살아봐요. 습기도 많고 바람도 많고 소리도 시끄럽고 여러 가지가 안 좋습니다. 그래서 보기에 좋다고 반드시 생활에 좋은 것이 아니에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속담이 있잖아요. 물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을 때도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갈등은 대부분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닌 다른 것을 자꾸 문제 삼기 때문에 생깁니다. 상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상대를 선택했을 때 인물을 봤다면 평생 인물만 논하고, 능력을 봤으면 평생 능력만 논해야지, 정작 같이 못 살겠다고 불평할 때는 성격이나 생활 습관을 논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남편의 성격을 자꾸 논하지 말고, 남편의 그런 성격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해요. 남편은 그렇게 생긴 걸 어떡합니까. 남편의 성격을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사실 큰 문제는 아닙니다.

 

남편에게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아서 정 못 살겠다면 저한테 이런 질문을 안 합니다. 묻기 전에 알아서 결정을 해버리죠. 저한테 물었다는 것은 남편에게 좋은 점이 많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이런 점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내 마음에 들도록 할까요?’ 이것이 고민이 되어서 묻거든요. 자기 힘으로 안 고쳐지니까 저에게 묻는데, 남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기 관점을 조금만 바꿔보세요. 산에 가면 나무가 많지만 기둥하기에 좋은 나무는 드뭅니다. 목수가 가져와서 필요에 맞게 조금 다듬어야 됩니다. 결혼생활도 서로 맞춰가면서 사는 것이지, 딱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룸메이트나 친구도 마찬가지예요.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맞춰가며 살아보면 좋겠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을 개설한 이유

불교대학 공부를 마쳤다면 기본적인 수행에 대한 관점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만교라는 아주 오래된 종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주와 인생을 탐구하는 우파니샤드 철학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주 발달된 종교도 있었고, 아주 발달된 철학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종교를 믿고 그런 철학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처님이 성 밖에 나가서 주변을 보니까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당시 사회는 계급 사회, 즉 노예제 사회이다 보니까 인구의 90%가 노예였습니다. 상위 계급은 10%, 하위 계급이 90%인 사회였습니다. 노예는 병이 들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버립니다. 늙어도 쓸모가 없어서 버렸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쓰레기를 갖다 버리듯이 시체를 숲에 갖다 버렸어요. 그래서 인도에는 큰 마을 또는 대도시 주위에 공동묘지처럼 시체를 갖다 버리는 숲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인도어로 시타림이라고 합니다.

 

 

늙으면 보호를 받아야 되는데, 병들었으면 치료를 받아야 되는데, 죽었으면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장례를 치러줘야 되는데,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또 전쟁이 끝없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살상을 당하고, 식량부족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존의 종교인 브라만교에서는 브라만 신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브라만 신한테 기도하면 소원이 다 성취된다고 하는데, 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느냐?’

 

이런 삶의 현실을 버려 놓고, 인생이 뭐고 우주가 뭐냐를 탐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부처님은 깊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삶이 도대체 뭔지, 고통은 왜 일어나는지, 이런 것들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혼자서는 문제 해결이 안 돼서 스승을 찾았고,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도 해답을 못 찾아서 다시 홀로 정진해서 본인 스스로 그런 고뇌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부처님은 종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물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라고 하지 않고, 철학이라고 하지 않고, ‘수행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어리석음, 자기의 욕망, 자기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 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간직하고 보존할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부처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분이 높냐 낮냐는 계급을 가리지 않고, 늙었나 젊었나 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피부색이 검으냐 희냐 하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는 국적을 가리지 않고, 어떤 경험을 했느냐는 과거에 상관없이,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가르침을 펼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 부처님이 비판했던 복을 비는 종교로 한 무리가 흘러갔고, 부처님이 비판했던 관념론적이고 사변적인 철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불교라는 종교와 불교라는 철학으로 나아갔고, 온전히 수행적 관점을 지키는 자가 드물어졌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대승불교가 일어났고, 그것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와 철학으로 변질됐습니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서는 선불교라고 해서 다시 원래의 부처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지 내용은 이미 수행과 멀어졌습니다. 또 설령 내용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법의 가피를 입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도록 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너무나 어렵고 힘들고 우리 생활과 멀뿐만 아니라 수행을 하려면 모든 걸 다 버리고 각오하고 결심해야 되는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은 부처님 당시로 돌아가서 부처님의 법을 나에게 적용시켜 아주 체험적으로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는 곳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 있는 자, 와서 보라! 네가 눈을 감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눈만 뜨면 그냥 여기 있는 거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쉽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누구나 다 가능하다.’

 

 

이런 가르침을 오늘 우리가 다시 현실에 맞게 살려내기 위해서 정토불교대학이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늘 정진을 해도 남자다 보면 남자의 까르마가 남아있고, 한국 사람이다 보면 한국 사람의 까르마가 남아있듯이, 정토회도 불교문화가 갖고 있는 까르마를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종교적인 요소도 좀 남아있고, 일부 철학적인 요소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비는 종교가 목적이 아니고, 연구만 하는 철학이 목적이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내 삶을 변화시켜 이 조건 속에서도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길을 우리가 지금 가고자 하는 겁니다.

 

경험과 체험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념화됐을 때 우리는 그 진리라는 관념도 버려야 참 진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살아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불교인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이런 모습을 볼 때 진리라는 이름만 갖는다고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거로부터 전승된 윤리나 도덕, 관습이나 습관, 경전이나 계율에 근거해서 진리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학문은 늘 과거로부터 전승된 것들을 근거로 진의 논쟁을 하지 않습니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서 검증을 해야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서에 의해서,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경전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초기에 일어날 때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는지를 공부하게 됩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육조단경을 공부해서 대승불교, 선불교를 일으킨 분들의 문제의식을 배우는 것은 수행에 많은 도움을 됩니다. 그러니 경전대학에도 한번 입학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잘못 공부하면 심오한 철학처럼 받아들여서 불교 철학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학자가 되려고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항상 그것을 내 삶에서 경험하고 체험하는 수행적 관점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불교대학을 졸업한 후 해야 할 일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봉사입니다. 제일 큰 봉사가 전법입니다. 불교대학에 다른 사람도 다닐 수 있게 인연을 맺어주는 게 제일 가벼운 봉사입니다. 어떤 분들은 스님, 감사합니다. 목도리 하나 짜드릴게요. 양말 선물드릴까요?’ 이렇게 말하는데, 양말이나 목도리보다 더 큰 선물은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 불교대학에 와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스님에게 고마움이 있다면 그 표시를 전법으로 해주셔야 스님이 가장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마음으로 전법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권유했는데도 상대가 안 온다면, 그들을 위해서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기분 나빠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인연을 맺어 줄 뿐이고, 하고 안 하고는 언제나 그들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강제로 하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나서 지역 법당이 없어지는 대신에 광역자치단체마다 문경수련원이나 천룡사처럼 야외 공간을 가진 수련원이나 절이 하나씩 마련되었습니다. 주말에는 거기에 가서 마음껏 농사도 짓고, 꽃밭도 만들고, 절도 하고, 뭐든지 마음껏 하시면 됩니다.

 

법당을 도시마다 만든 이유는 불교를 가까이서 공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어요. 공부하러 멀리까지 가는 건 너무 시간 낭비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집에서 걸어와서 불교를 배울 수 있게 생활공간 가까이인 읍면동에 수행 도량을 만들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시군구까지는 지역 법당을 만들었는데 온라인 시대가 되면서 이제는 그보다 더 가까운 자기 집에서 수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지역 법당은 이제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자기 방이 여러분들의 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도시에 있는 법당은 철수하고 대신에 여러분들이 사는 데서 차로 1시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수련원을 마련한 겁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듣더라도 야외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필요하니까요.

 

이제 불교대학을 졸업하시면 정토회 회원에 가입하셔서 정기법회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일결사 기도에 참여하셔서 매일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자기 수행을 하면서 불교대학에 주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안내해 주세요. 그리고 경전대학까지 졸업한 뒤에 나도 정토회에서 불교대학을 진행하시는 분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좀 도움을 줘야 되겠다이런 마음이 드시면 전법활동가 신청을 하세요. 그러면 일정한 교육과 실습 훈련을 받은 뒤에 진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의 앞길이 열려 있습니다.

 

 

정토회는 100퍼센트 자원봉사로만 운영되는 모임입니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거짓말 같지만 100퍼센트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을 공부할 수 있는 것도 누군가가 월급 받고 가르치거나 도와준 게 아닙니다. ‘정말 이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하는 그 한 가지 염원으로 자기 시간을 내고 자기 재능을 기부하고 보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가능한 겁니다.

 

그러면 정토회 회원 신청을 하신 분들은 정기법회 때 보고요. 경전대학에 입학한 분들은 경전대학 입학식 때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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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불교 안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종교로서의 불교, 철학으로서의 불교,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있습니다.

나부터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종교로서의 불교는 믿음을 중요시하고, 철학으로서의 불교는 이해를 중요시합니다. 반면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실천과 체험을 중요시합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 안에도 종교적인 요소와 철학적인 요소가 조금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더라도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수행을 하더라도 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철학으로서의 불교에 치우치게 되면 실천이 따르지 않고 사변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종교적인 불교는 믿음은 있지만 기복적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수행으로서의 불교는 복(福)을 비는 믿음이 아니라 법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사변적인 이해가 아니라 원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기초로 합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만드는 실천을 하고, 나아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수행으로서의 불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 또는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만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 나부터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지면 우리 아이도 행복해지고, 내가 행복해지면 남편과 아내도 행복해집니다. 내가 자유로워지면 우리 부모님도 자유로워집니다.


나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나부터’ 하면 주위 사람들도 모두 좋은 영향을 받게 됩니다. 가족들이 하지 않더라도 남 탓하지 말고 나부터 행복하기를 해야 합니다. 또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앞으로도 꾸준히 정진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웃으면서 살기에도 너무나 짧은 인생

한 세상을 사는 게 굉장히 긴 것 같은데 지나 놓고 돌아보면 눈 깜짝할 새에 지나온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지나온 시간이 짧고 남은 시간이 많다 보니 인생이 너무 긴 것 같이 느껴지지만, 연세가 많은 분들은 이미 다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일생이 너무 짧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인생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 놓고 돌아보면 인생이 너무 짧아요. 인생이 이렇게 짧기 때문에 화목하게만 지내기에도 부족하고, 웃으면서 살기에도 부족해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건 인생의 너무 큰 낭비입니다. 짧은 일생 동안 좋은 일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해요. 남을 해치고 살만큼 인생이 길지가 않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서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등 너무 순간순간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에는 좋았던 것이 지나 놓고 보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고, 그 순간에는 어려웠지만 이겨내고 나면 오히려 큰 이익이 될 때가 많아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건 대부분 순간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지나 놓고 보면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니 너무 순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나 놓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에 우리는 목숨을 걸 때가 많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해가 되어도 그 순간이 닥치면 과거의 방식대로 자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알고 있어도 행동으로는 잘 안 되죠. 그래서 늘 연습해야 하는 거예요. 평정심을 유지해서 순간에 끌려가지 않도록 자기를 제어해야 합니다. 이를 악물고 참으라는 게 아니라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서 자기를 잘 보존해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경전반을 졸업하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변화는 혼란이 아니라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이번 경전반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수업의 절반을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 절반은 온라인으로 했습니다. 즉, 여러분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예요. 앞으로 새로 입학하는 사람들은 온라인으로만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하니까 원래부터 온라인인 줄 알 겁니다. 여러분보다 앞서서 경전반을 다녔던 사람들은 오프라인으로만 공부했으니까 계속 그런 줄 알 거예요. 여러분은 법당에서 오프라인으로 수업을 하다가 온라인으로 옮긴 경험까지 있으니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경험을 해서 혼란스럽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세대를 낀 세대라고 합니다. 나는 시집살이를 다 했는데 막상 며느리는 시집살이를 시키지 못하고, 회사에서도 선배를 하늘같이 모시는 시대에 살았는데 나는 그런 대접을 못 받는 세대예요. 이렇게 낀 세대는 아랫사람일 때는 전통적으로 다 해야 했고, 정작 본인이 어른이 되고 나면 대우를 못 받고 평등하게 지내야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불평을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두 가지 경험을 다해봐서 좋은 세대라고 봅니다. 어른들 모시고 사는 경험도 해보고, 평등하게 사는 경험도 해보았으니까요.

즉문즉설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님은 어떻게 해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그렇게 잘 압니까?’ 하고 묻는데, 저는 두 가지 경험을 다 해봐서 그렇습니다. 저는 어릴 때 목화를 직접 심는 것도 보고, 거기서 다래 순을 따먹기도 하고, 목화로 물레를 돌려서 실을 뽑고 베를 짜서 옷을 해 입는 경험도 했습니다. 삼을 하나씩 찢어서 무릎에 비비고 실을 만들어서 삼베옷을 해 입기도 했어요. 이런 모습은 거의 신라시대 때 옷을 해 입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신라시대 삶의 방식을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요즘처럼 온라인으로 회의를 하는 건 최첨단 기술을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젊은 세대는 앞으로 50년을 살아도 기술이 발달된 이후의 50년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육체적 나이는 비록 70살이지만 경험으로 치면 천 년을 산 것과 마찬가지예요. 게다가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으니까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로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이나 필리핀 원주민 마을을 많이 다녔습니다. 거기에 가보면 300년 전 우리가 살았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 경험할 수 있어요.

이런 걸 경험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인간의 삶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꾸 쉬운 것을 생각하면 어렵게만 느껴지고, 자꾸 질서를 생각하면 변화가 혼란스럽게만 느껴지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관점을 조금 달리 보면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앞으로 진행자가 되면 온라인 수업의 장점과 오프라인 수업의 장점을 모두 수렴해서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겁니다. 온라인만 경험한 사람은 온라인 수업의 경험만 갖고 있고, 오프라인만 경험한 사람은 오프라인의 경험만 갖고 있는데, 여러분은 두 가지를 모두 다 해봤으니까 경험이 풍부해서 더 좋아요. 이렇게 낀 세대야말로 아주 좋은 세대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줄 알기


저는 어릴 때 농사의 경험도 해보고, 젊을 때 산업화 시기도 살아보고, 늙어서는 서비스업이 팽창하는 시기도 살아보고, 지금은 서비스업조차 사라지는 온라인 시대도 살아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보면 인생이라는 게 그때그때의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이 갑자기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야 한다면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러나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은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고, 혼자가 되면 혼자서도 살 수 있고, 둘이 되면 둘이서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혼자서 살 때의 습관 때문에 둘이서 같이 살면 힘들어합니다. 둘이서 같이 사는 게 연습이 안 되어서 그래요. 그래서 지지고 볶다가 결국 못 살겠다고 하면서 헤어집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먼저 죽게 되면 외로워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둘이서 같이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혼자서 못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수행이란 혼자서 살아도 좋고, 둘이서 살아도 좋고, 걸어 다녀도 좋고, 차를 타고 다녀도 좋고, 오프라인으로 해도 좋고, 온라인으로 해도 좋고, 농사를 짓고 살아도 좋고, 공장에 가서 제품을 만들고 살아도 좋고, 장사하고 살아도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봄도 좋고, 여름도 좋고, 가을도 좋고, 겨울도 좋은 삶이에요. 그것이 해탈입니다. 그것이 자유로움입니다.

여러분은 남편하고 못살겠다고 하다가 남편이 갑자기 병들거나 교통사고로 죽으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라고 하죠. 아이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또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항상 지금이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행복해진 만큼 저절로 하게 되는 전법


이런 공부를 하면 자연스럽게 삶이 이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인생이 행복해지고 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 법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듭니다.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법하는 게 아니에요. ‘이 법을 알아서 눈 한 번 뜨고 나면 저렇게 아웅다웅 안 하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에 저절로 전법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배가 아프다가 약을 먹고 나으면, 다른 사람이 배 아픈 모습을 볼 때 ‘이 약만 먹으면 다 나을 텐데’ 하는 마음에 그 약을 주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전법에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먼저 공부를 해보았기 때문에 자기가 느낀 좋음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불교를 믿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자비심과 연민의 마음으로 내가 경험한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면, 상대방이 응해도 좋고 응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그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꼭 응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편안하게 이야기한 후에 이번에 안 하면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또 이야기를 해보면 됩니다. 만약 나를 위해서 전법을 한다면 상대가 응하지 않을 때 기분이 나쁘지만, 그를 위해서 전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응하는 것은 그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전법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수행도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수행도 마치 돈을 벌 듯이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에 부담을 갖고 하는 것 같거든요. 전법도 ‘아, 전법을 못해서 어쩌나’ 이러면서 하는데, 그러지 말고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교대학을 권유할 때도 너무 눈치 보지 말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경전반 졸업이 수행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법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깊은 이해가 남았습니다. 이해한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도 남았어요. 내가 받은 이익을 세상과 나누어 갖는 과정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다들 이사 준비하느라 바쁘시죠?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할 건물도 가능하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우리가 직접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건물 짓는 기술까지는 갖고 있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전문가에게 위탁해서 건물을 짓긴 하였지만, 이사 가는 것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가능하면 우리 손으로 직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행자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
무엇보다 새로 지은 건물에서 사는 것은 수행자의 원칙에 맞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건물을 아예 쓰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요.


수행자의 원칙에 맞지 않지만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이 많이 모일 공간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둘째, 외부 공간을 빌려 쓰니까 경제적으로 임대료가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저기 공간을 빌려서 내는 월세를 계산해보니 건물을 짓는 비용이 오히려 적게 든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셋째, 정토회가 사회활동을 보다 활발히 하기 위해서는 외부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을 본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정토회의 본부는 문경 수련원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일종의 서울사무소 혹은 사회활동을 위한 문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건물의 용도로 보면 정토사회문화회관입니다. 가능하면 대부분의 공동체 대중들은 문경 수련원이나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하고, 서울에는 꼭 필요한 최소 인원만 남고, 이 건물은 대중이 주로 쓰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새 건물은 정토회 본부라고 보면 안 되고 정토회의 사회활동에 필요한 공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검소하게 사는 것이 원칙입니다. 건물은 새로 지었지만 대신 책상이나 내부 시설은 일절 새로 구입하지 말고 쓰던 물품을 사용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불단이나 부엌 시설도 재활용을 하면 좋은데, 규격이 안 맞아서 몇몇 시설은 새 것을 구입해서 설치하게 됐습니다. 그 외에는 쓰던 것을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재활용해서 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160개 법당을 모두 철거하면서 두북 수련원에 이미 많은 물건이 들어와 있고, 앞으로도 많은 비품이 들어올 거예요. 그 물건들을 가져다 쓰면 됩니다. 모양이 안 맞으면 두북 수련원에 목공소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규격에 맞게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사용하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소비를 줄여야 합니다.


크게 보면 우리는 이미 수행자의 기본 원칙을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수행자들이 나무 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비가 자꾸 오거나 이런저런 문제가 생기니까 초막을 지었어요. 초막에도 또 문제가 생기니까 결국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2백 년 정도 지난 후에는 건물을 짓게 됐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나무 밑에 잘 수는 없더라도 초막 정도만 짓고 살아야 되는데, 세상에 발맞추다 보니 건물을 짓게 된 거예요. 대중성이라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수행에는 단점도 됩니다. 자꾸 대중의 요구를 따라가게 되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소비주의에 물들고 효율을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것을 늘 경계하면서 생활해야 됩니다.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전환되면 앞으로 공동체는 지역으로 내려가서 더 검소하게 생활하며 더 정진에 힘쓰고, 세상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꼭 필요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들을 더욱더 많이 해나가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가
이렇게 새로 지은 건물에 대한 기본 입장이 분명해야 됩니다. 혹시라도 남에게 정토회를 자랑할 때 건물을 이야기하는 일은 없도록 부탁드립니다. 자랑을 할 때 인물, 학벌, 돈, 건물,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은 콤플렉스의 소산이에요. 수행자는 항상 수행 정진해서 행복해지는 것으로 자랑을 삼아야지 숫자가 많다든지, 건물이 있다든지, 시설이 좋다든지, 세력이 있다든지, 이런 걸로 자랑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바르게 정진하는 사람이 수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고, 대중이 모여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은 대중들이 십시일반 보시해서 만든 건물입니다. 정부나 기업 등 외부의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정토회 회원들의 보시금으로만 만든 거예요. 그러니 이 건물은 대중을 위해서 지은 것이라는 인식을 꼭 해주세요. 혹시 대화를 하다가 마음 속에 건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가 소비주의에 물들고 있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발표한 4박 5일 동안의 명상수련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명상의 목표는 무념무상의 상태입니다. 무념무상이란 아무런 상념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다만 뚜렷한 알아차림만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화두선에서는 오직 ‘이 뭐꼬’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고, 호흡 알아차림에서는 다만 호흡만 알아차리는 것이고, 느낌 알아차림에서는 다만 느낌만 알아차리는 거예요. 마치 서치라이트를 딱 비추듯이 그냥 비추고만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비추고 있다는 생각도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호흡 알아차림의 세 단계

 

명상의 단계를 굳이 나눈다면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상을 시작할 때는 지금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의도가 약간 들어가게 돼요. 처음에는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 하면서 코끝에 집중을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지나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의도를 갖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겁니다. 즉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에서 ‘호흡을 알아차린다’로 넘어가는 거죠. 그다음에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자도 없어져야 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다만 호흡을 할 뿐이에요.

 

첫째,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

둘째, 호흡을 알아차린다.

셋째, 호흡을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단계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면서 알아차리는 것도 지금 안 되잖아요. 연습을 꾸준히 해서 호흡이 뚜렷이 알아차려질 때 호흡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그 의도도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다만 호흡을 알아차릴 뿐이에요. 더 나아가면 호흡만 하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지금 출발점에 서서 바라보면 목표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보입니다. 이제 출발점에 서게 된 여러분들은 상념이 떠오르고, 상념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망상을 피우죠. 그러나 망상을 피우는 걸 합리화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합리화하는 것은 목표가 없어진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의미 부여하지 않기

 

그렇다고 해서 ‘망상을 피우는 건 나쁘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됩니다. 방금 출발한 내 수준에서는 나도 모르게 망상에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나도 모르게 망상으로 끌려가는 건 ‘잘했다’, ‘잘못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일부러 망상을 피우면 건 잘못한 거예요. 그러나 나도 모르게 망상에 끌려가 버릴 때가 많습니다. 어느 순간 망상을 피우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는 다시 호흡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망상으로 가 있으면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이걸 꾸준하게 연습해야 됩니다.

 

어떤 때는 저만큼 갔다가 돌아오고, 어떤 때는 이만큼 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러나 연습하는 시간이 자꾸 많아질수록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요. 자꾸 연습하다 보면 상념은 일어나지만 스토리는 만들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욕구가 있다 보니까 자꾸 의미 부여를 하게 됩니다. 의미 부여를 하기 때문에 자꾸 스토리를 만들게 되고, 스토리를 만드니까 거기에 골똘히 빠지게 되는 거예요. 결국 명상을 하는 게 아니라 사색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나쁜 건 아니에요. 결과적으로는 이런 것도 소득이 되는 이유는 ‘내가 이런 것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끌려가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여기에 집착하고 있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쁘다’, ‘좋다’ 이렇게만 볼 게 아니에요. ‘내가 이런 점에 상처가 있었구나’ 하고 체크할 수 있는 소득이 분명히 있습니다.

 

넘어진 김에 동전 줍기

 

그런데 상처가 떠오르더라도 그것대로 소득이 있다고 제가 법문을 하니까 여러분 중에는 ‘왜 나는 상처가 없을까?’ 이렇게 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들으면 안 됩니다. 넘어지더라도 반드시 나쁜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넘어진 김에 동전을 주울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왜 나는 안 넘어져서 동전을 못 주울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넘어지지 않는 게 목표이지만 하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잖아요. 넘어진다고 해서 꼭 나쁜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말귀를 자꾸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다리가 안 아프면 좋죠. 일부러 다리가 아파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일부러 다리를 아프도록 해놓고 아픈 걸 이겨내야 한다면 그건 고행이에요. 그렇다고 다리가 안 아파야 된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건 쾌락주의예요. 다리가 아픈 것은 명상을 할 때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등산을 하면 쭉 오르막만 있든지, 오르막 내리막이 있든지, 평지로 쭉 가다가 막판에 오르막이 있든지, 그건 산마다 다 다르잖아요. 출발할 때 평지이면 ‘이 산 등반하기 좋다’ 이랬다가 막판에 오르막이 나타나면 ‘이 산 등반하기 어렵네’ 이랬다가 하는데, 오르막은 언제 나타나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산은 1부 능선에서 가파르게 올라갈 때도 있고, 어떤 산은 1부 능선까지는 편안하게 오르다가 2부 능선에서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도 있고, 막판에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도 있는 거예요.

 

일상 속에서 평정심 유지하기

 

졸리는 것도 몸이 피곤하니까 졸리는 거예요. 졸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졸리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다리가 아픈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망상이 일어나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수많은 연습을 통해 그런 것에 대해 구애를 받지 않게 되어야 남이 욕설을 하는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이익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지위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되고, 죽음 앞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살다 보면 온갖 것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잖아요. 우리는 거기에 끄달려서 울고, 웃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귀찮아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고,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개수로 따지면 수백 수천 가지예요. 여러분들은 거기에 다 의미를 부여해서 ‘누가 죽어서 슬프다’, ‘뭐 해서 화났다’ 늘 이러고 있는 겁니다.

 

다리가 아픈 가운데도, 졸음이 오는 가운데도, 과거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도, 미래 생각이 떠오르는 가운데도, 호흡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거기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꾸준히 연습해 가면 됩니다. 앉아서 호흡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안 가는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서 운동을 하는 게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몸이 건강해진다는 것이 중요하죠. 그것처럼 호흡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리 말씀을 마치고 10분 간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경 수련원에는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온 후 8시 50분부터 온라인 설 명상수련 회향식이 이어졌습니다. 청법가와 삼배를 한 후 참가자들은 스님에게 회향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4박 5일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 왜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는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거친 비바람과 폭풍이 지나가면 다시 밝은 해가 비치고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그것처럼 지난 5일을 돌아보면 첫날은 졸음의 폭풍이, 그다음에는 다리 통증의 폭풍이, 그다음에는 번뇌와 망상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지나갔습니다.

 

그때는 못 견딜 것 같고, 그만두고 싶고, 이런다고 되나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사실은 다 일어날 일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몸이 피곤하니 졸음이 오고, 평소에 이런 자세로 앉지 않았기 때문에 몸의 저항이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고, 오지도 않는 미래를 염려하면서 근심 걱정을 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왜 편안하지 못할까요?

 

제가 편안하게 있으라고 누누이 이야기했지만 여러분은 편안하게 있지 못하고 난리를 피웠잖아요. 조금만 살펴보면 이게 다 나 스스로 혼자서 난동을 피운 것과 같단 말이에요. 잠꼬대하면서 난리를 피운 것과 같습니다. 명상 중이 아니고 일상생활이었다면 전부 다 남편 탓, 아내 탓, 자식 탓, 부모 탓, 친구 탓, 세상 탓이 되었을 거예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늘 남을 탓하고 살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도 안 만나고 가만히 있으면 편안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편안해지지가 않잖습니까?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도 편안해지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 가운데 편안해질 수가 있겠어요?

 

 

이 모든 괴로움이 자기 문제임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 명상을 할 때는 외부를 차단하는 거예요. 명상수련을 할 때 깊은 숲 속이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는 이유는 이게 다 내 문제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깨달아도 다시 바깥으로 나오면 관점이 또 흔들려요. ‘내 문제가 아니고 네 문제다’ 이렇게 됩니다. 이치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하루 만에 깨칠 수도 있고, 삼일 만에 깨칠 수도 있고, 일주일 만에 깨칠 수도 있고, 한 달 만에 깨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선사들의 경우에는 다 3년 안에 깨쳐야 될 내용이에요. 그런데 그게 일상에서는 잘 유지가 안 됩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보림(保任)’이란 말이 있어요. 어떤 사람을 만나도, 어떤 환경에 처해도, 평정심이 유지되도록 연습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보림을 할 때는 주로 거지 생활을 많이 합니다. 남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다녀 보면 엄청나게 천대받습니다. 천대받는 중에도 마음이 편안해야 돼요.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해봅니다. 시장에서 생선 가게 종업원도 해봅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온갖 천한 직업을 다 해보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도 마음이 여일한가를 확인해보는 게 보림입니다. 깨닫는 시간은 짧으면 하루이고 길어야 3년이에요. 그런데 보림은 보통 10년 내지 20년을 합니다. 육조 혜능 대사도 언하에 깨쳤다고 하잖아요. 스승한테 인가를 받는데도 6개월밖에 안 걸렸어요. 그런데 보림은 16년을 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

 

그런 측면에서 보면 여러분들은 정말 좋은 조건 속에 있어요.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이 보림이잖아요. 스님은 보림을 하기 위해 새로 결혼도 해보고, 애도 키워보고, 사업도 해보고, 이러면서 잘 되는지 연습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들은 벌써 보림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이 보림부터 먼저 하고 있는 거예요. (웃음)

 

 

자꾸 남편 탓, 아내 탓만 하지 마세요. 그런 남편, 그런 아내, 그런 자식, 그런 부모, 그런 환경, 그런 직장에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겨울을 탓하거나 여름을 탓할 게 아니라, 겨울에 내가 어떻게 대비하고, 여름에 내가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음식에 맛이 있니 없니 불평하지 말고, 그 음식은 그대로 두고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돈을 빌려주었더니 안 갚는 사람이 있다면, ‘그놈은 나쁘다’ 이러지 말고, 상대가 안 갚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포기하는 게 좋겠는가? 어떻게 해야 받아낼 수 있겠는가? 돈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을 것인가? 돈도 사람도 다 잃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관점을 갖는 것이 주인 된 자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 노릇을 못하고, 늘 경계에 끄달리며 남의 속박을 받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명상을 하는 거예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게 명상의 목적이겠어요? 온갖 장애가 있는 가운데서도 호흡이 뚜렷하게 알아차려진다는 것은 온갖 경계에 부딪쳤을 때도 평정심을 유지해서 나를 딱 지켜낸다는 겁니다. 내 호흡을 알아차리고, 내 기분을 알아차리고, 내 욕망을 알아차리고, 내 성냄을 알아차려서 거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거예요. 거기에 휘둘려봐야 나만 손해잖아요. 온갖 장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 사회는 그가 브라만 계급인지, 크사트리아 계급인지, 바이샤 계급인지, 수드라 계급인지 혈통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되고, 또 전생에 의해 모든 게 결정된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이걸 부정하셨습니다.

 

‘자유와 행복은 신에 의해서도 아니고, 전생에 의해서도 아니고, 혈통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직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내거나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과거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내가 살아온 삶의 습관이 지금의 사고와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을 다겁생래로 지어온 업장이라고 표현하는데, 인도 사람들은 전생을 믿었기 때문에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사람도 그것을 전생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 사람들은 사유 체계가 그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의 삶이 오늘의 삶을 규정짓고, 오늘 내가 한 행동이 내일의 삶을 규정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형성된 습관 중에 지금 나한테 괴로움이 되는 것은 멈출 줄 알아야 됩니다. 과거에 너무 매이면 안 돼요. 맹목적으로 반응해서도 안 됩니다. 충동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과거의 습관에 노예 노릇을 하는 거예요. 나의 현재와 미래가 과거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나는 현재와 미래를 주인으로 살아가야 됩니다. 즉 자유와 행복을 늘 간직해야 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면 나의 자유와 행복이 없어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다리를 못 쓰면 휠체어에 앉아서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하는 거예요. 허리를 다쳐서 누워 있다면 누워 있으면서도 자유와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4일 동안 명상 잘하셨습니까? 침묵을 하면서 편안한 가운데 다만 호흡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호흡에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죠? 몸은 이렇게 가만히 있지만 우리의 생각은, 시간적으로는 먼 과거로부터 먼 미래까지, 공간적으로는 이 세상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이 돌아다니는 마음을 코끝에 딱 잡아서 한 곳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 즉 지금 여기에 뚜렷이 깨어 있는 것이 명상입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괴로울 일도 없고, 화날 일도 없고, 슬퍼할 일도 없고, 초조하거나 불안할 일도 없고, 근심 걱정할 일도 없고, 미워할 일도 없고, 원망할 일도 없고, 그저 한가하고 조용합니다. 이것을 옛 선사들은 '적멸(寂滅)'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번뇌가 다 소멸하고 고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렇게 안 되죠? 명상을 하고 있으면 어쩌면 눈뜨고 생활하는 것보다 더 생각이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처음 연습하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정진해 나가면 조급함과 불안함이 놓아지면서 편안함과 한가함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번 명상수련을 통해서도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저런 증상이 나타났을 겁니다. 오늘은 그런 증상이나 의문들에 대해 한 번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통증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죠?

“통증을 그냥 지켜보는 평정심은 어떻게 키울 수 있나요? 명상 중 너무 심한 통증이 올라오는데 이것을 외면하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명상을 하면 가슴을 쪼이는 것 같고 칼로 휘젓는 것 같은 그런 통증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통증이 너무 심하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리에 통증이 있으면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가슴이 아프면 ‘가슴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옆구리에 통증이 있으면 ‘옆구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머리에 열이 나면 ‘머리에 열이 나는구나’ 이렇게 알 뿐이고, 뒷골이 당기면 ‘뒷골이 당기는구나’ 이렇게 알 뿐입니다. 그렇게 알 뿐 그냥 호흡에 집중하면 돼요. 그러면 통증을 피하려고 할 때보다는 조금 더 평정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항상 평정심을 갖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하셔서 그 연습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통증이 너무 심하니까 자꾸 외면하고 싶어 집니다.”


“평정심은 ‘가슴이 쪼이는 것 같구나’,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구나’, ‘머리에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 통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유지되는 겁니다. '아, 힘들어 죽겠어. 어떻게 하면 안 아프지?' 이러면 긴장을 하게 되기 때문에 평정심을 잃게 돼요. 다만 통증을 통증인 줄 알면 평정심이 유지가 되지만, 통증을 싫어하는 데에 끄달리면 평정심을 놓치게 됩니다.”

“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평정심이 유지되는 기술이 따로 없습니다. 어떤 통증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면 평정심을 잃은 것이고, 통증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싫어하거나 좋아하는데 집착하지 않으면 평정심은 저절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통증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지 못합니다. 통증이 오면 딱 싫어하는 감정이 앞서버리니까 마치 상대가 얘기할 때 기분이 탁 나빠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평정심이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욕설이 나오는 거예요. 상대가 욕을 하더라도 '아,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바라볼 수 있으면 부처님처럼 빙긋이 웃을 수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평정심이 유지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어요.



어떤 물건을 보고 먹고 싶은 생각이 탁 났다면 평정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코끝으로 냄새가 지나가서 먹고 싶은 욕망이 탁 일어났을 때 '아, 내가 냄새에 끄달리는구나' 이렇게 딱 알아차린다면 평정심이 유지된 것입니다. 그런데 통증이 너무 심하면 자동으로 그것을 싫어하게 되어 질문자처럼 대부분이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요. 통증이 싫으면 그냥 다리를 펴버리면 되는데, 다리를 펴지 않으려고 이를 악 다물고 참고 있으니까 평정심을 잃고 긴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과정입니다. 처음 명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리가 아프면 펴버리거나, 이를 악 다물고 참거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욕을 하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초심자입니다. 상대가 욕을 하면 '아, 저 사람이 욕을 하네' 이렇게 보지 말고 '아, 저 사람이 화가 났구나' 이렇게 이해하고 봐야 합니다. 그것처럼 통증이 일어날 때도 '어떻게 하면 안 아프지?' 이렇게 보지 말고 '통증이 있구나' 이렇게만 봐야 합니다.

'이 통증은 자세를 평소에 이렇게 안 했기 때문에 생기는 몸의 자연스러운 증상일 뿐이다'

이렇게 신체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면, 통증이 있더라도 점점 긴장을 덜하게 됩니다. 만약 칼로 도려내듯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 참겠으면 다리를 좀 풀면 돼요. 다리를 푼다고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연습 기간이 더 길어져야 할 뿐이에요. 다리를 풀어버렸다는 건 그 고비를 못 넘어갔다는 겁니다. 만약 그 고비만 넘어가면 마음은 훨씬 편해집니다. 또다시 통증이 일어나도 예전보다는 훨씬 덜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도 참았는데 이 정도는 뭐'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마음의 긴장이 점점 완화됩니다.



단식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을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나고, 그래서 쓰러지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해지고 평정심을 잃게 되거든요. 그런데 몇 번 이것을 경험하면 '배고픈 건 맞지만 그만한 일에 죽는 건 아니다', '현기증이 일어난 건 맞지만 그만한 일에 죽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없다' 이렇게 됩니다. 신체의 원리를 탐구해보면 에너지가 공급이 안 되니까 현기증이 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3일 정도만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까요? 이것도 신체적으로 연구해보면, 밖으로는 음식을 안 먹지만 내 몸의 고기를 먹고 에너지를 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체중이 줄어드는 겁니다.

이렇게 신체에 대한 작용을 이해하고, 그런 현상을 몇 번 경험하게 되면, 배는 고프지만 마음의 평정심은 잃지 않게 됩니다. 절을 할 때나 등산을 할 때나 명상을 할 때 다리가 아픈 것은 신체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신체의 원리를 모르면 '이러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병이 나지 않을까?’, ‘몸에 열이 나는데 괜찮을까?' 이렇게 걱정하게 되는데, 몇 번 경험하고 나면 '아, 이건 그냥 몸의 반응이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몸에서 열이 난다고 해도 명상이라는 것은 육체를 움직이고 뛰는 게 아닌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요?



내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몸에 고장이 난 것이라면 원래 억제되어 있던 저항들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모르던 병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어요. 내가 무감각하고 예민하지 못해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마음이 편안해지고 긴장이 풀어지고 예민해지니까 내분비 기관에서 일어나는 통증 같은 것을 지속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명상이 끝나고 검사를 해보면 몸의 이상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통증이 일어난다는 것은 신체적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좋은 일이에요. 통증이 없으면 우리 몸이 썩어도 모르잖아요.

'여기 문제가 있다, 고장 났다, 빨리 와라.'

통증은 이렇게 몸의 병을 알려주는 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고가 들어와서 막상 가보면 진짜 고장 난 것도 있고, 오류가 난 것일 수도 있는데, 다리 아픈 것 정도는 오류가 난 것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길을 새로 포장하려고 길을 뜯어서 지금 고치고 있는 중인데, 그걸 잘못 보고 어떤 사람이 차가 다니기 힘들다고 신고할 수도 있잖아요. 지금 차가 다니기는 불편한 상황이지만 고치고 있는 중이니까 신고는 받되 개선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느끼는 통증은 그런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명상을 할 때 왜 묵언을 하나요?

저는 명상을 할 때 묵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혼자 속으로 말을 하는 것은 묵언으로 봐도 되나요? 단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것을 묵언이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거나 글로 써서 상대에게 표현하는 것도 하지 않아야 묵언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말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웃음) 말을 하면 관심이 밖으로 향하게 됩니다. 만약 산길을 혼자 걸으면 경치도 느낄 수 있고, 자기 자신도 돌아보게 되는데, 친구와 얘기하면서 걸으면 경치도 무심히 지나치게 되고, 자기 마음을 살피기도 어렵습니다. 명상은 오직 관심을 자기 내부로 두어서 호흡, 느낌, 마음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명상수련에서 묵언을 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말을 하면 관심이 밖으로 향하기 때문에 수행 차원에서 자기에게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중얼중얼하거나, 쪽지에 써서 전달하거나, 눈짓 몸짓 손짓으로 표현하는 것은 묵언의 본래 의미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묵언 중에는 모든 의사 표현을 중단해야 합니다.

 

둘째, 대중과 함께 수련할 때 묵언이 필요합니다. 내 말이 다른 사람이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으니 조용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때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것을 뜻해요. 그런데 묵언은 조용히 하라는 뜻보다는 근본적으로 오로지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하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셋째, 묵언의 진정한 의미는 시비 분별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잘했느니 잘못했느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시비를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묵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비하는 마음으로 낸 소리가 아니라면 소리를 냈더라도 묵언을 한 것이 됩니다.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도 시비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묵언을 어긴 것이 돼요.

 

이렇게 묵언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기 위해 묵언을 한다면 눈짓, 손짓, 글로 써서 표현하는 것도 안 됩니다. 둘째, 대중과 함께 명상수련을 하기 때문에 조용히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눈짓, 손짓, 글로 써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셋째, 시비 분별하지 않기 위해 묵언을 할 때는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아도 마음으로 시비했다면 묵언을 어긴 것이 됩니다. 말을 했더라도 빗자루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등의 알리는 말을 한 것은 묵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묵언에는 세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있습니다. 대중이 모여서 명상을 할 때 묵언은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지금 온라인 명상수련처럼 각자 개개인이 혼자 명상할 때의 묵언은 첫 번째 의미의 묵언을 지켜야 합니다. 한번 입을 떼면 자꾸 입을 떼고 싶기 때문에 명상을 하는 5일 동안은 묵언을 하고,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고, 입을 딱 닫고 살아보는 겁니다.”

 

,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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