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시대, 법당이 모두 없어지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그런데 이제 온라인으로 전환이 되면 지역 법당이 모두 개인 법당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지역 법당의 중요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개인 법당에서는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됩니다. 자기 수행을 비롯한 모든 수행을 개인 법당에서 하고, 모든 전법도 다 개인 법당에서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정회원보다 인격적인 면이나 시간적인 면에서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온라인 불교대학과 온라인 경전대학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으려면 그걸 진행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지기 때문이에요.또한 전법 활동가에 해당하지 않는 일반 회원들의 폭은 더 넓어져야 합니다. 회원은 광범위하게 참여하도록 하고, 전법 활동가의 기준은 더 높여서 온라인 불교대학과 경전반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해야 합니다.

 

 

전법 활동가와 광범위한 회원들

 

이렇게 바뀔 때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정회원 중에서 전법 활동가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현재의 정회원 다수가 전법 활동가의 자격을 취득하게 되겠지만, 더 높은 수준의 봉사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회원으로 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말에 열린 전국 대의원 회의 때까지 이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 통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이번 재편이 끝나고 나면 앞으로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새로 오는 사람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수행자를 지향하면 회원이 되면 되고, 시간적 여유가 되고 의지가 있을 경우 전법 활동가 신청을 해서 교육을 받으면 전법 활동가가 되면 되니까요. 다만 이번 재편 과정에서는 그동안 정토회의 중심 역할을 해왔던 정회원들이 전법 활동가와 회원으로 분화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어떤 절차를 거쳐서 진행할지가 가장 큰 쟁점이었던 겁니다.

 

만일결사준비위원회(이하 만준위)에서 제안한 방법은 현재 전법 활동에 의지가 있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으로만 먼저 전법 활동가 모둠을 구성하고,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6개월간의 교육 과정을 거쳐서 합류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전법 활동가와 회원, 두 가지로 분화되는 절차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준위가 그런 내용을 담은 1안을 제안했는데, 막상 공청회를 해보니 이 방식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2안을 냈습니다. 현재의 정회원 중에서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같이 가되, 6개월을 지나보고 본인이 의지가 없거나 자격 요건을 충분히 갖추지 않은 사람은 그때 가서 빠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1안을 더 폭넓게 수용해서 나온 것이 2안입니다. 3안은 본인이 희망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현재의 정회원을 모두 전법 활동가 모둠으로 편성해서 출발하되 6개월 후에 재선거를 하자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안을 두고 투표를 했더니 4:4:2가 나왔습니다. 3안은 득표율이 가장 낮으니 일단 제외하고, 전국 대의원 회의에서는 1안과 2안을 갖고 다시 투표를 했습니다. 그 결과 원래 1안과 2안의 득표수가 40:42로 비슷비슷하게 나왔던 게 이번에는 55:44로 나왔어요. 1안의 득표수가 역시 더 많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의 3분의 2를 넘지 못했습니다.

 

 

전법 활동가의 자격이 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는 후속적으로 합류한다는 게 1안의 골자예요. 자격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다 같이 출발하자는 게 2안입니다. 2안의 맹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러다 중간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이 맡고 있던 부문에도 차질이 생기기 쉽다는 문제가 있어요. 둘째, 2안대로 한다면 이번에 편성하는 모둠의 구성원들이 선거까지 참여하게 되는데, 중간에 빠질 사람이 선거에 참여해서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동안 정토회가 운영되어 온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안은 전원이 전법 활동가로 전환해서 간다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하면 2안과 같은 모순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방식으로는 6개월까지만 임시로 운영하고, 6개월 후에 다시 정식 편재를 하자는 것이 3안입니다.

 

 

1안과 3안의 공통점은 책임을 질 사람들로 편재를 한다는 거예요. 다만 1안은 지금 출발하고, 3안은 임시 편재했다가 6개월 후에 재편재를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2안과 3안은 지금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다 함께 가자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1안은 전법 활동가로 전환하기를 원하지만 당장은 자격 요건에 미달되거나 책임을 지기 어려운 사람은 나중에 합류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두 안과의 차이점입니다. 3안을 채택할 경우 1안과 2안의 공통점을 포괄할 수 있지만, 본인이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1안과 2안의 지지율이 80퍼센트나 되기 때문에 이런 대중의 의견도 고려해야 해요.

 

정리하면, 모두 함께 가자는 것이 3안입니다. 본인이 원해야 한다는 것이 2안이에요. 최종적으로는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1안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결합해서 결국 이렇게 수정안을 만들었습니다.

 

‘전법 활동가를 희망하는 사람은 다 지금 출발하되 8월에 다시 재선임을 한다’

 

그 내용이 지난 전국 대의원 회의와 서원행자 회의에서 최종 통과가 된 겁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좋은 법을 전하기 위해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분 모두가 전법 활동가가 되는 교육에 참여를 하시라는 겁니다. 나는 도저히 못 하겠다는 사람은 빠지고, 몸이 안 좋거나 시간이 안 되는 사람도 빠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두가 다 전법 활동가 교육에 참여하시라는 거예요. 그래서 8월까지는 전법 활동가가 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신속하게 진행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시간을 좀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5개월 동안은 임시 운영을 해볼 예정이에요. 뭐든지 시운전을 좀 해봐야 하잖아요. 약도 개발하려면 3차까지 임상실험을 하듯이 온라인정토회로 전환하는 것도 5개월 정도 시운전을 해보고 ‘오케이, 좋다’ 하면 그대로 가고, 수정을 좀 해야겠다고 하면 수정을 해서 8월에 정식으로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1년 반 정도 운영을 해보고 나서 부족한 부분은 더 수정을 해서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할 때에는 앞으로 30년 동안 운영될 시스템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에요

 

이렇게 1차 임상실험, 2차 임상실험을 거쳐서 최종적인 운영안을 마련하면, 조금 속도가 늦어지기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온라인 시대에 새로운 의사결정 방식

 

“정토회에서는 모둠장, 지회장, 지부장, 전국 대표를 추천 방식으로 온라인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추천 단위가 어디이고, 선거 방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모둠원들이 모둠장을 선출합니다. 선출된 모둠장들이 지회장을 추천합니다. 추천된 후보를 놓고 전체 모둠원들이 투표를 해서 지회장을 최종 선출합니다.

 

지부장 선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회장들이 지부장을 추천하고, 모둠장들이 모여서 투표를 통해 지부장을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전체 회원이 모여서 결정된 지부장을 승인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전국 대표는 지부장들이 추천을 하고, 지회장들이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마지막으로 전국 모둠장들이 모여서 승인하는 절차를 거쳐 최종 결정됩니다.

 

추천하는 단위가 있고, 그 아래에 의결하는 단위가 있고, 그 아래에 승인하는 단위가 있는 겁니다. 중요한 안건은 마치 국민투표처럼 더 아랫 단위의 의사를 물어서 최종 승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유지해온 수평적 권력 분립이 아닌 수직적 권력 분립이라는 새로운 방식이에요.

 

 

이런 과정은 모두 온라인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특별히 어려울 게 없습니다. 온라인 투표는 결정이 금방 나게 돼요. 후보 한 명이 추천되었을 때는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야 당선이 되고, 두 명 이상이 추천되었을 때는 누구든지 과반수를 얻으면 됩니다. 한 명을 추천했을 때는 선택권이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찬반 투표에서 3분의 2를 얻지 못하면 부결되기 때문에 선택권이 있는 겁니다. 반대하는 사람이 3분의 1만 있어도 당선되지 못합니다. 절대 다수가 지지해야 당선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명 이상이 추천되었을 경우에는 선택권이라는 개념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투표 결과 낙선한 사람은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는 선거는 딱히 선거라기보다는 추대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두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고, 세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고, 한 명을 추천해주는 게 좋겠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다만 한 명을 추천할 때는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하고, 두 명 이상 추천할 때는 과반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어서 전법 활동가와 회원 사이의 이동 문제에 대한 질문도 나왔습니다.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회원 체제로 전환

 

“전법 활동가의 자격이 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회원으로 있던 사람이 다시 전법 활동가로 돌아오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별한 절차가 있다기보다 예전과 달리 이동이 자유로워졌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불교대학 진행자 자격을 취득했는데 일이 있어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합시다. 예전에는 실제 활동을 하지 않아도 자격을 그냥 계속 유지했는데 이제는 이동이 자유로워집니다. 불교대학 진행을 못하면 전법 활동가 모둠에서 빠졌다가, 본인이 또 할 수 있게 되면 다시 신청하면 돼요. 신청했을 때 다른 자격은 다 갖추어져 있다면, 그사이에 바뀐 부분에 대해서 점검 교육만 받으면 전법 활동가 자격이 바로 회복됩니다. 요즘은 불교대학 진행 관련 세부사항이 자주 바뀌니까 점검 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꾸 들어왔다가 나갔다가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면 준비가 확실하게 되었는지 좀 더 꼼꼼히 확인하는 정도의 작업이 있을 겁니다.

 

현재 정회원들은 일단 전법 활동가 자격을 취득하면 그걸 기본으로 해서 이동이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처음 자격을 얻을 때는 최소한 3년 동안은 불교대학 진행자 역할을 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해요.”

 

“네,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정토회는 모든 것을 다 이렇게 자유롭고 투명하게 진행하려고 해요. 전법 활동가가 되는 것도, 서원행자가 되는 것도, 결사행자가 되는 것도, 법사가 되는 것도 이렇게 공고가 나가면 원하는 사람이 직접 신청하는 방식으로 갈 거예요. 필요할 때마다 공고가 나갑니다. 그러면 자격이 되는 사람은 신청하고, 신청을 했는데 자격이 안 되면 ‘이러저러한 것이 미흡하니 자격을 갖춰서 오세요’라고 안내를 받습니다. 미흡했던 부분을 채웠다는 확인이 되면 교육에 들어가고, 교육을 마치면 심사를 거쳐 자격을 취득하고, 활동을 못하게 되는 사정이 생기면 사표를 내고 회원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되면 또 전법 활동가 신청을 하면 돼요.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원 규정도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해집니다. 본인의 자발성에 기초해서 선택하되, 일단 선택을 하면 그에 대한 책임이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전번 활동가가 되면 당신에게 이러이러한 책임이 있습니다.’

‘스태프가 되면 당신은 이러이러한 역할을 최소 6개월 동안 책임져 줘야 합니다.’

 

이렇게 책임져야 할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해 줄 겁니다. 그것을 이수하기만 하면 자격이 갖춰지는 겁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자는 일인데, 억지로 하지 말고 좀 가볍게 해 나가자는 취지예요.

 

꼭 전법 활동가가 되지 않아도 회원으로서도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고 대우받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전법에 의지가 있어서 전법 활동가가 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전법 활동가가 될 필요가 없어요.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보시를 많이 하는 분들은 회원으로서 그분의 뜻을 굉장히 존중하고 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법 활동가 모둠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법 활동가는 직접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진행해야 합니다. 전법 활동가란 진행자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시면 돼요.”

 

 

스님은 온라인 전환은 정토회가 처음 출발할 때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하며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강조했습니다.

 

다시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로

 

“이제 정토회는 온라인이라는 기술과 결합하면서 ‘내가 사는 곳이 법당이다’ 하는 원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원칙을 져버린 것이 아니라 원칙에 더 맞게 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간을 마련하고 법당을 꾸미면서 어느덧 우리는 기존의 불교를 조금씩 닮아가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 아닌 스님이 되고, 절 아닌 절이 되는 구조로 점점 변화되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방향으로 오히려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수행자로서 자기 수행을 하면서 자기가 사는 주변부터 전법하는 이런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겁니다. 부처님의 전법 선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가지 말고 홀로 가라. 처음도 중간도 끝도 조리 있게 법을 설해라’

 

사회나 집단의 발전 정도를 평가하는 방법

여러분들은 정토회의 미래를 짊어진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오늘은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나라가 처음 발전할 때, 한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 한 나라가 쇠망할 때, 각각 지도력이 어떻게 다른가 살펴보겠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을 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앞을 내다봅니다. 그래서 대중이 지도자 그룹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지도자 그룹은 미래를 보고 끊임없이 새로운 안을 제안하고 준비하는데 대중은 현실의 문제만을 갖고 계속 얘기하니까 여기에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절대적 지지를 받지는 못해요. 이렇게 지도자는 대중의 의사나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뒤로 숨어서는 안 됩니다. 앞을 내다보면서 비록 지금은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해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한 발 앞서 나가야 합니다. 사회지도층이 이렇게 할 때 그 사회는 성장하고 많은 부분이 재창조되는 길로 나아갑니다.

 

어느 정도 성장을 하게 되면 대중도 의식이 올라오는 국면에 진입합니다. 그런 사회를 보통 태평성대라고 하는데 그때는 선각자들이 이루어놓은 성장의 과실을 먹고사는 거예요. 이때는 지도자가 대중의 뜻을 받들어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합니다. 그래서 대중의 지지는 굉장히 높지만, 성장은 멈추게 돼요. 꼭 경제적 성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장이 멈추고 사회가 정체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태평성대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가 쇠퇴할 때는 지도자 그룹이 대중보다 의식 수준이 떨어져서 대중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성장기에는 대중이 지도자 그룹에 불만이 있다가도 조금 있으면 해소가 되는 것을 반복했다면, 쇠퇴기에는 갈수록 불만이 커져요. 대중을 끌고 가는 힘도 없고, 심지어 대중보다 지도자 그룹이 뒤처집니다. 그래서 대중이 볼 때 이해되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지도자 그룹이 하게 됩니다.

 

꼭 경제적인 척도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도자 그룹이 어떠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지금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대중보다 앞서가는지, 대중과 같이 가는지, 대중보다 많이 뒤처지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면 됩니다. 대중이 봐도 이해되지 않는 엉뚱한 행동을 한다면 쇠퇴기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에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

 

그래서 여러분들도 대중의 여론을 항상 수렴해야 하지만 대중의 여론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반해서 가도 안 되지만, 거기에 안주해도 안 됩니다. 대중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해서 할 바에야 대의제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전 회원이 투표해서 결정하면 되지 굳이 이렇게 여러분들을 뽑아서 대의제도를 둘 필요가 없잖아요. 또 회원들의 의사를 대변하라고 여러분들을 뽑아 놓은 것인데 여러분들이 거기에 반해서 엉뚱하게 간다면 그것 또한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중들의 뜻을 그대로만 반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대중의 뜻을 고려하되 대중보다 한 발 앞서가는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 국면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현재 우리가 하는 행위를 보면, 발전 국면에 있는지, 정체 국면에 있는지, 쇠퇴 국면에 있는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 또는 단체를 이끄는 리더들이 회원의 수준보다 조금 앞서가는지, 같이 가는지, 뒤에 가는지를 보면, 어느 국면에 놓여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정토회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응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니까 어리둥절한 국면에 직면한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가능하면 대중의 낙오가 적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변화 국면에서는 한 명도 낙오가 없도록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낙오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낙오를 최소화할 것이냐?’ 그리고 ‘안전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이렇게 접근해야지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갈 길을 못 간다면 변화에 제대로 대응을 못 하게 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여러분들이 회의를 하시면 좋겠어요. 충분하게 논의해보니 아직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면 변화를 보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방향이 정해졌고, 여론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서 결론이 났다면, 신속하게 재편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길게 봤을 때 더 좋게 평가될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때 그렇게 재편하길 잘했다’, ‘빨리 재편하기를 잘했다!’ 이렇게 평가하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직위가 없어질까 봐 걱정이 된다면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토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개인의 거취나 개인적인 이해관계, 또는 살아온 습관에 너무 안주하면 진취적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내려놓고 어떻게 하면 정토회가 좀 더 발전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공청회를 여러 번 해보니까 대중들 중에는 마음속에 마치 회사가 구조조정을 해서 실직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분들이 일부 있는 것 같아요. 만약 그런 분이 있다면 그런 생각을 딱 버리셔야 합니다. 원래 내가 정토회에 처음 참여할 때는 수행자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두 가지예요.

 

첫째, 내가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도움이 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전법입니다. 다만, 어린아이들이나 장애우, 극빈자, 이런 사람들은 법을 배워서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는 전법을 넘어서서 그들을 보살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활동을 비롯해 공동체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이 땅에 실현해야 할 사회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한가?’입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도 이 좋은 법을 만나서 행복하도록 내가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입니다. 수행자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이 핵심에 추가적으로 사회적 정의가 붙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런 중간 간부 개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규모가 커지고 행정 체계가 잡히면서 직위라는 게 자꾸 생겨나게 된 거예요. 작금의 불교계를 보면, 심지어 출가를 한 스님들 사이에서도 돈이 되는 절과 그 절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주지라는 직위를 갖고 다툼이 계속 일어나지 않습니까?

 

 

코로나 사태와 온라인 전환으로 큰 변화가 우리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가 이번 기회를 통해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지부장이나 회계 역할이 필요해서 그 소임을 맡으라고 하면 기꺼이 ‘알겠습니다’ 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되, 그런 소임도 항상 한시적으로 하는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만든 법당도 용도가 없으면 과감하게 폐기하듯이 우리가 갖던 지위도 조직이 개편되고 용도가 다하면 당연히 가볍게 내려놓아야 해요. 항상 우리의 중심은 수행자입니다. 수행자의 핵심은 자기 정진과 전법 이 두 가지가 근본입니다. 거기에 추가로 환경 실천이라든지,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라든지, 평화라든지, 이런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활동도 함께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주어진 과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와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끼리 충분히 토론한 뒤에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의문점이나 어려운 점이 있으면 또 대화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수고들 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재 법문이 끝나고 대의원들은 한 손을 들고 대의원의 다짐을 함께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준비된 안건에 대한 보고와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전국 대의원 회의의 주된 안건은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을 심도 있게 심의하는 것입니다.

 

 

먼저 상임위원회 회의 결과를 보고 받은 후 행정처 사업 보고와 예결산 보고를 듣고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이어서 2차 만일결사준비위원회로부터 온라인 정토회 사업방향과 조직개편안에 대한 발표를 듣고 다시 모둠 토론을 100분 간 했습니다.

 

오늘은 활발한 모둠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만 가진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충분한 토론 후 중요한 의결 사항은 내일 진행될 예정입니다.

 

 

해가 지고 저녁 7시 30분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12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2021년이 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오늘이 1월 마지막 법회네요. 어릴 때는 세월이 안 가는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빨리 가는 것 같아요. 연초에 일 년 중 언제 강의하고, 언제 수련하고 일정을 적다 보면 12월까지 하루 만에 다 가버리는 기분입니다.

 

현재 정토회는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정토회가 지역에 있는 법당 중심이었다면 온라인 정토회는 각자 사는 공간이 곧 법당이 됩니다. 이제 정토회 회원들은 전 부 다 지역 법당에서 개인 법당으로 이동을 해요. 이런 변화에 좋은 점도 있고, 또 안 좋은 점도 있어요. 좋든 싫든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같이 추운 날에는 개인 법당이 더 좋아요. 제가 있는 문경 수련원은 오늘 아침에 영하 15도까지 떨어졌습니다. 저는 머리털이 없으니까 지금 법문 하는데 머리가 선뜩선뜩 해요. 털모자를 쓰고 법문을 할까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보기 안 좋다고 말려서 모자를 안 썼습니다. (웃음) 그럼 이제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몸집이 왜소한 아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괴로워요

“저는 키가 작습니다. 몸집도 아주 작은 편입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저를 닮아서 키가 작고 몸집도 작습니다. 지금 대학생인데 제 눈에는 꼭 중학생처럼 보입니다. 아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무지 애를 쓰고 기도도 하지만, 막상 멀리 있던 아들이 집에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힘듭니다. 아들의 존재는 저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에 아들을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보고 싶은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고 기쁘게 아들을 볼 수 있을까요?”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르면 제가 깨우쳐주면 되는데 아는 데도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에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다음 생에는 키가 크게 태어나길 비는 수밖에 없네요. (웃음)

 

 

옛날에 산에 있는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 먹고 살 때는 모계 사회라고 해서 여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여자라고 불편한 것이 별로 없었어요. 그러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노동을 하게 되니까 남자가 유리해졌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가 이루어졌고, 특히 요즘은 디지털 사회가 되면서 몸집이 작거나, 키가 작거나, 힘이 약하다고 해서 불리한 것이 하나도 없어졌어요. 몸집이 작다고 자판을 못 누르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 터치를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몸집이 작다고 해서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포크레인 운전을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여성들이 하등 불리한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직도 큰 기계는 남자가 다룬다는 관습적인 문제가 남아서 그렇지 지금은 포크레인을 운전하든, 차를 운전하든, 기관차를 운전하든, 비행기 운전을 하든, 여성이라고 해서 못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하물며 사람이 키가 작다고 못할 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질문자의 걱정은 힘이 중요한 사회, 소위 농경사회라면 좀 걱정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그런 것을 걱정할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이렇게 걱정을 하고 있으니까 어떡하겠어요? 그러니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방법이 있다면, 질문자가 정신을 차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런 불편할 이유가 없는데 과거의 관습에 의해서 불편하다고 생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무슨 성씨냐 이런 것 때문에 불이익이 하나도 없는데 상놈 성을 가져서 불리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여자라고 해서 아무런 차별도 없는데 여자라고 불리하다는 얘기를 한다면 방법이 없잖아요. 지금 질문자는 과거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다리를 못 쓰거나 하면 병신이라고 차별을 했잖아요. 그리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벌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는 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장애는 어떤 징벌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만 장애가 있으면 좀 불편할 뿐이에요.

 

더군다나 요즘은 불편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과학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비행기를 발명했고, 호랑이보다 속도가 더 빠른 자동차를 발명했어요. 그런 것처럼 장애로 인한 불편함은 앞으로 과학기술을 통해 전부 다 개선이 될 겁니다. 사고로 팔을 잃었다면 의수를 하면 되고, 다리를 잃었으면 의족을 하면 됩니다. 현재 기술력으로는 의수나 의족이 육체의 손발보다 기능이 못하기 때문에 핸디캡이 되지만, 앞으로는 의수와 의족이 훨씬 더 육체의 팔보다 힘도 더 세고 기능도 더 좋아질 거예요. 디지털 눈이 개발되어서 육체의 눈보다 훨씬 더 잘 보이게 되면, 보통 사람도 멀쩡한 눈을 빼고 디지털 눈으로 교체할 겁니다. 처음에는 사고가 나서 개선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보통 사람도 멀쩡한 팔을 자르고 의수를 하게 될 거예요.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성형이 그렇잖아요. 성형이라는 것은 원래 다쳐서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복원하기 위해서 나온 기술이에요. 그런데 성형 기술이 점점 발달하다 보니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도 얼굴을 예쁘게 하려고 너도나도 성형을 하기 위해 난리잖아요. 지금의 성형은 더 이상 의술이 아니라 미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앞으로 이런 문제가 곧 생깁니다. 이런 인간을 ‘사이보그’라고 해요. 지금 사이보그 기술은 거의 실용 단계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도 더 이상 핸디캡이 아닙니다.

 

시골에 가 보면 관절이 좋지 않아서 다리를 못 쓰는 어르신들이 전동차에 앉아서 가는 경우가 많아요. 이분들은 제가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갑니다. 다니는 데 아무 불편이 없어요.

 

이런 시대에 살면서 지금 그런 얘기를 하니까 제가 볼 때 좀 한심해 보이네요. 내일부터 정토회 오지 말고 어디 다른 절에 다니면 어떨까요? 정토회에 다니고 있다는 게 창피할 정도예요.” (웃음)

 

 

“저도 제가 좀 한심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스님이 봐도 한심한데 본인도 그걸 알아야죠. 질문자의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고 동거해서 사는 사람이 프랑스에서는 전체 인구의 절반입니다. 장애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장애인’이라는 말도 요즘은 쓰지 않고 ‘장애우’라는 말로 사용하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질문자가 너무 욕심이 많은 겁니다. 건강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해요. 만약 아이가 자신에 대해 너무 왜소해서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해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시대가 바뀌었다. 옛날 같으면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렇게 격려를 해줘야 해요. 아이는 멀쩡하게 잘 지내는데 엄마가 자꾸 그렇게 하면 결국 엄마로 인해 아이에게 열등의식이 심어지게 됩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한 번 보세요. 나폴레옹도 그 시대에 키가 아주 작았어요. 등소평은 150센티미터 수준이었어요. 그런데도 13억 중국을 호령했잖아요.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성공시킨 박정희 대통령도 키가 작았잖아요. 꼭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가지고 논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질문자가 외모를 갖고 평가하는 잘못된 소비주의에 물들어서 괴로운 겁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가도 불법을 탁 듣고 나면 정신을 차려야죠. 불법이 무엇입니까. 불생불멸 불구부정이잖아요.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습니다. 넓은 것도 없고, 좁은 것도 없습니다. 무거운 것도 없고, 가벼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비교에 의해서 그렇게 규정될 뿐입니다. 이렇게 불교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정신을 차리세요.” (웃음)

 

“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노력할 것도 없어요. 딱 한 생각만 바꾸면 됩니다.

 

‘아!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다 존엄하다.’

 

이번에 젊은이들을 위해서 나온 새로운 책이 <나는 괜찮은 사람입니다>입니다. 그 어떤 것도 열등한 것이 없어요. 그냥 풀은 풀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나무는 작은 나무대로, 양지 식물은 양지 식물대로, 음지 식물은 음지 식물대로, 다 서로 다를 뿐이지 모두 존엄합니다. 인종도 키가 큰 인종이 있고, 작은 인종이 있고 또 같은 인종 안에서도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질문자가 키가 작은 문제는 한국에서 좀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됩니다. 통일이 되면 남한 인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북한 사람들은 키가 질문자의 아들만큼 작아요. 왜냐하면 북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영양 부족으로 키가 남한의 초등학생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북한 아이들은 직접 만나보면 굉장히 똑똑해 보여요. 겉보기에는 키가 작으니까 일곱 살, 여덟 살이겠구나 싶은데, 실제 나이는 열 두세 살이니까요.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참 똘똘해서 나이를 물어보면 벌써 고등학생 나이예요.

 

그러니 질문자가 지금 딱 깨달아서 해결이 안 되거든 하루빨리 통일이 되도록 모든 일을 제쳐두고 통일운동을 하세요.” (웃음)

 

아들은 뇌사 판정을 받고 하늘로, 저는 암 환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14살 아들이 뇌종양으로 투병 중 뇌압 상승으로 뇌사 판정을 받아 연명치료를 중지하고 하늘의 별로 보냈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니 잔인한 부모라는 생각에 고통스럽고, 이런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저 또한 아이가 투병 중에 유방암 4기 환자가 되어 자식도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곧 아들의 생일이 다가와 더 그립고 보고 싶어 집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아픔을 누가 대신할 수도 없고, 참 힘드실 것 같아요. 먼저 위로를 드립니다. 여기 모인 대중들도 다 같이 함께 위로를 드리겠습니다.”

 

스님은 합장을 하고 잠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방청객들도 함께 두 손을 모았습니다. 질문자는 흐느껴 울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자리가 불교인들끼리 모임이라면 제가 영가를 위해서 해탈주라도 독송해 드리겠는데, 오늘 자리는 종교적인 자리가 아니고 일반 국민들과 함께하는 자리여서 종교적인 의식은 하지 않는 점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미 일어난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운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빈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고, 돈을 많이 준다고 아들이 다시 살아올 수도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일인데, 이걸 갖고 계속 슬피 울면 첫째, 나한테 큰 고통입니다. 둘째, 남편, 부모, 다른 자식들을 비롯해 나를 보는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부처님 말씀 중에 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2의 화살은 맞지 마라이런 말씀이 있어요. 아들이 병사한 것이 제1의 화살이라면, 그로 인해서 질문자와 가족들이 또 제2의 화살을 맞고 있습니다. 1의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2의 화살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슬퍼한다고 살아오거나, 괴로워한다고 살아오거나, 보고 싶다고 살아온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해도 이 일은 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라면, 지금부터 나라도 잘 살아야 됩니다. 나라도 잘 살아야, 남편이나 부모, 다른 자식들이 슬퍼지는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제 말이 맞는데, 지금 질문자는 슬픔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제 말이 귀에 안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같은 슬픔이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3년 지나도 계속 유지될까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나아질까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죠.”

 

그럼 아들이 살아와서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어요?”

 

그대로인데 나아졌습니다.”

 

그대로인데 3년 후에는 나아진다면, 3년 슬퍼하다가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 나아지는 게 좋아요?”

 

지금요.”

 

그래요. 바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굳이 3년을 슬퍼한 뒤에 나아지는 것보다 지금 바로 나아지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종교적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들이 빨리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보내줘야 됩니다.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사실은 아무도 몰라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죠. 종교에 따라 천당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극락에 간다고 하기도 하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 천당에 가든, 극락에 가든, 환생을 하든 빨리 어디론가 가야 되는데, 엄마가 계속 울면 미련이 남아 못 가겠죠.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면 무주고혼이 됩니다. 이것은 아들에게 2차 가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아들이 빨리 가라고 보내줘야 돼요. 그래야 극락을 가든 천당을 가든 환생을 하든 할 거 아닙니까?

 

어떻게 돌아가셨든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잘 가! 안녕하고 인사를 해줘야 돼요. 이것을 천도라고 합니다. 천도란 돌아가신 분을 빨리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입니다. 지금 엄마가 해야 될 일은 우는 것이 아니고 빨리 가라고 아들을 떠나보내주는 겁니다. 아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낼 때도 아쉽지만 떠나보내잖아요. 그곳이 좋은 곳이니까요. 그것처럼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아쉽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거예요. 딸이 시집을 갈 때도 아쉽지만 더 좋은 곳으로 가니까 떠나보내잖아요. 이렇게 더 좋은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헤어짐이 덜 슬픕니다.

 

만약 질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우리 아들이 천당에 갔다라고 믿고, 불교인이라면 극락에 갔다라고 믿고, 윤회를 믿는 사람이라면 병든 몸 대신 건강한 몸을 받아서 환생한다라고 믿으셔야 합니다. 헤어짐은 아쉽지만 아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니까 엄마는 기뻐하면서 보내줘야 됩니다. 그럼 저를 따라 해 보세요. ‘아들, 잘 가!’ 이렇게 한 번 해보세요.”

 

 

아들, 잘 가!” (질문자 울먹임)

 

질문자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흐느끼며 울었습니다.

 

계속 잡고 계실래요? 오도 가도 못하게 잡고 있기 때문에 무주고혼이 되는 거예요. 아들을 무주고혼으로 만드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게 나아요?”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것이 낫습니다.”

 

엄마라면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죠.”

 

질문자는 용기를 내어 큰 목소리를 인사를 했습니다.

 

아들, 잘 가!” (질문자 울음)

 

큰 목소리에 화면 속 방청객들이 큰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방청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딱 떠나보내고 울지 마세요. 울면서 잘 가라고 인사하는 것은 가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이제부터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 됩니다.

 

아들이 뇌사한 상태에서 산소 호흡기를 뗀 것이 엄마의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존중이란 생명의 원리대로 살도록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거나,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는 것은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뇌사를 했거나 이미 늙어서 죽었는데 산소호흡기를 사용해서 억지로 살리는 연명치료는 생명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잘하신 거예요.

 

연명치료는 육신을 붙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죽었으면 땅에 묻어야지, 내가 아직 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방안에 놔두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땅에 묻으면 안 되고 방에 놓아두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냄새나는 것 밖에 더 있겠어요. 아무리 사랑해도 이미 죽은 사람은 장례를 치러야 됩니다.

 

뇌사를 했으면 산소호흡기를 떼주는 것이 환자를 위해서도 좋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서도 좋아요. 그것은 털끝만큼도 잘못한 일도 아니고,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닙니다.

 

그리고 질문자 자신도 암이라고 했잖아요. 보통은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같이 죽고 싶죠?”

 

.”

 

 

그렇다면 질문자는 안 그래도 같이 죽고 싶었는데 잘 됐잖아요. 죽고 싶다고 억지로 죽으려고 해봐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죽으려고 노력을 안 해도 가만히 있으면 죽게 돼요.

 

자살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인생은 자살할만한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살하려면 일이 많잖아요. 약 사 와야지, 먹어야지, 괴로워해야지, 또 천장에 목을 매달려면 밧줄 사 와야지 걸어야지 일이 많아요. 살아 있는 것은 살게 해주는 것이 쉽지, 죽으려면 힘이 들어요. 반대로 죽을 때가 되었는데 살리려는 것도 힘이 듭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쉬워요.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은 살아있을 때는 살게 하는 것이고, 죽을 때는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암에 걸린 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죽은 뒤에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 생길까요?”

 

살아있을 때요.”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질문자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1년을 살 지 10년을 살 지 모르지만, 암이 심하다면 자연수명에 비해서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더 오래 살 것 같아요?”

 

좀 빨리 죽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보다 짧게 살게 되겠죠. 그러면 그 짧은 인생을 이렇게 괴로워하면서 살다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다른 사람들은 좀 괴로워하더라도 인생이 기니까 괜찮지만, 나는 인생이 짧으니까 더 웃으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1년 안에 죽는다고 하면서 계속 울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아니면 하루를 살더라도 웃다가 죽는 것이 나아요?”

 

웃다가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웃어요. 질문자는 남보다 빨리 죽을 사람이니까요. 다른 사람이 너는 암 걸렸다면서 왜 그렇게 웃냐?’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아무래도 내가 너보다 좀 짧게 살 거 같아서 그런다. 너는 성질 낼 시간도 있고, 울 시간도 있지만, 나는 지금 웃다가 죽어도 시간이 모자란다. 그러니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고 오늘부터 웃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쉽지는 않아요. 그러나 제 말은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웃음)

 

 

인생이 짧을수록 웃어야 돼요. 내일 죽는다면 오늘은 하루 종일 웃어야 돼요. 울고 성질 낼 시간이 없어요. 웃을 시간도 부족하니까요. 1년을 살더라도 늘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울 시간이 없어요.”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종교적으로 생각하면 질문자가 1년 후에 죽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아들을 빨리 만날 수 있으니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일도 아니에요.

 

오래 살면 오래 산 대로 현재 있는 가족과 같이 보내서 좋고, 때가 돼서 하늘나라로 가면 아들을 만나게 되어서 좋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에요.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지금처럼 바보 같이 울면서 살지 말고 웃으면서 사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관점을 한 번 바꿔보세요.”

 

.”

 

대답을 하면서 웃어야지요. 대답을 안 해도 웃는 게 중요한 거예요. 두 가지를 꼭 기억하세요. 첫째, 아들한테는 잘 가! 안녕인사를 해야 됩니다. 둘째, 나는 짧은 인생을 사니까 더 웃고 살아야 된다. 다시 한번 해볼까요? ‘아들아, 잘 가! 안녕해봐요.”

 

아들아. 잘 가! 안녕.’

 

. 그다음에는 짧은 인생 웃고 살자해봐요.”

 

"짧은 인생 웃고 살자!"

 

, 모두 손뼉 쳐 주세요. 질문자도 웃으세요. 이제 입가에 약간 미소가 도네요.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데,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어요.” (웃음)

 

스님도 크게 박수를 치며 질문자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실시간 댓글 창에도 질문자를 응원하는 댓글이 빗발쳤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노동으로 인한 소득이 아니라 불로 소득을 갖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자 수익, 주식 수익, 부동산 수익을 많이 갖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별로 문제의식이 없고, 그런 방식으로 자산을 늘려나가는 것을 정상적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춰 보았을 때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경제적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느냐는 질문에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 하는 것이 노동가치설입니다. 노동가치설은 두 가지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자연환경이 생산하는 것을 무시하고 인간의 노동만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노동에 의한 이윤 창출이나 성장만을 가치로 보는 관점은 환경파괴의 주원인이 됩니다. 환경의 가치까지 계산하면 노동가치설은 맞지 않습니다. 둘째,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업무가 자동화되면서 경제적 가치가 노동에 의해서만 생산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입니다.

 

 

부의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하신 문제는 노동가치설보다 부의 재분배 차원에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불로소득이라는 관점보다는 부의 재분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노동가치설이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회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로봇이나 자동화, 인터넷 등에 의해 경제적 가치가 생산된다면 오히려 노동가치설은 소수의 창조적 사람에게 부가 과다하게 집중되는 것을 용인하는 결과를 빚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노동가치설을 얘기했던 당시에는 생산자에게 돈이 적게 가고 자본가에게 돈이 너무 집중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사회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서 돈이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즘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의해 늘어난 부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노동해서 버는 월급보다 많다고 하잖아요. 이건 분명히 잘못됐죠.

 

 

부동산이나 주식에 돈이 몰리는 현상이 이미 투자의 범위를 넘어 투기가 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돈 있는 몇몇 사람들이 돈을 투기해서 번다’ 이렇게 이해했는데,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재벌만이 아니라 중산층과 심지어는 20대나 30대 젊은 층과 초등학생까지 주식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오르는 장세이니까 어떻게 투자해도 돈이 벌리기 때문이에요. 눈 감고 투자해도 돈이 벌린다는 거죠. 지금은 인구 10명 당 3명꼴로 주식 투자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즉문즉설에까지 계속 질문이 올라오거든요. 요즘은 벼락부자가 아니라 벼락 가난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니 자기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난뱅이가 되어있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이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풀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식이나 부동산이 오르는 현상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투기의 시작은 돈 있는 사람들이 했는데, 온 국민이 빚을 내서 따라붙은 겁니다. 부동산도 처음에는 강남 일부나 서울만 좀 오른다 하다가, 이제는 전국이 다 투기열풍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즉문즉설에서는 어떤 공무원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20년 넘게 월급을 저축해서 집을 사려다가 정부에서 사지 말라고 해서 안 사고 기다렸는데, 그 사이 두 배 넘게 집값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사정없이 하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묻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지금 상황이 그렇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분명히 이 상황은 투기입니다. 이런 투기 과열을 꺼트리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국민이 투기에 참여하면 정치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투기 과열을 꺼트리려고 할 때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정부가 인플레이션(물가상승)으로 문제를 풀면 투기를 안 한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통화량이 늘어나고 물가가 상승하니까 내가 가진 돈의 가치가 줄어드니까요.

 

지금 투기 열풍이 부는 이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이 막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내려가기 시작하면 폭락하게 됩니다. 그럴 때 투기한 사람 중에 이익이나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대부분 후발 주자들이 손해를 보죠. 그런데 지금은 투기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까 인플레이션으로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투기 바람이 일어나는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간다면 현금 가치가 떨어지니까 그에 대비해서 땅이나 금, 부동산 등 무엇이든 물건으로 갖고 있어야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투기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어요.

 

코로나 사태로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정부에서 돈을 엄청나게 풀었는데, 지금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부 빚을 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것을 회수하면 서민들이 죽어나니까요. 지금 미국도 금리를 올리지 못하고 제로 금리 상태입니다. 거기다 계속 돈을 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돈을 푼다고 경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가게 운영이 힘든 사람에게 천만 원을 지원해주면, 이 사람이 천만 원을 갖고 어떤 곳에 사용하느냐면 대부분 건물세를 냅니다. 정부가 푼 돈이 결국 건물주와 같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 다 가게 되는 겁니다. 풀린 돈이 한 번 돌고 나면 다 돈 있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서민을 살리려고 지원을 해줬는데 돈은 돈 있는 사람이 버는 거예요.

 

가게가 망해야 건물주도 따라서 망하는데, 가게를 살리려고 하다 보니 건물주가 더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건물주는 그 돈을 갖고 부동산이나 주식 시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은행은 금리가 낮으니까 투자할 곳이 주식과 부동산밖에 없는 거예요. 금리를 올리면 돈이 저축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 그러면 대출한 서민들이 힘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풀기가 굉장히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잘못했다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에요. 결국 이 문제는 코로나 사태 때문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긴 문제입니다.

 

 

사회정의 측면에서 보면, 부의 불평등이 빠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걸 개선하려고 노력하는데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죠. 온라인 관련 사업은 수요가 폭발하고 있고, 여행업이나 구멍가게는 망해갑니다. 아직은 물가가 안 오르고 있는데 곧 전부 오를 거예요. 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올라가야 되는데, 아직 안 오르는 이유는 손해를 보면서도 공급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입니다. 짜장면 값도 아직 그대로인데 이런 품목은 공급하는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정부가 다 공급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벌써 채소값은 많이 올랐다고 해요.

 

이런 현상들을 보면, 사회적 정의란 개인이 아껴 쓰고 열심히 산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적 차원에서는 ‘세상이 그렇든 말든 나는 편안하게 산다’ 이렇게 마음을 가지면 되지만,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그것만 갖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사회적 정의 측면에서는 부를 재분배하는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나에게 좋다

수행을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수행을 가르칠 때도 ‘검소하게 살면 다음에 부자 된다’ 이렇게 가르쳐서도 안 됩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인연 과보를 인과응보로 잘못 알고, 수행을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하는 개념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 정의를 위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겁니다. 검소하게 살면 내가 좋은 것이지 복을 받거나 부자가 되는 것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변화의 핵심은

 

지금 변화의 핵심은 ‘온라인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정토회는 오프라인 정토회예요. 이제는 온라인 정토회로 바뀐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정토회의 이념과 목표는 그대로이지만 오프라인에서 실천하던 것을 이제는 온라인으로 실천하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선택한 큰 방향입니다.”

 

스님은 지난 공청회에서 나온 의견들을 종합해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충분히 설명을 했지만 여전히 의문점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의문점이 질문으로 나왔습니다.

 

그중 하나는 온라인으로 전환하면 전법 활동가의 역할이 중요해지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전법 활동가인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는 어떤 사람인가요?

“온라인 전법 활동가의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지 못하는 사람은 떼어놓고 가려는 것이 아닌지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는 조건에는 ‘거기에 준하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들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전법 활동가 역할을 능히 할 수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이 사람은 지금 불교대학 진행을 맡기면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다만 업무상 그 일을 안 했을 뿐이다.’

 

이렇게 진행자 역할을 최근 몇 년 사이에 안 했지만 거기에 준하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하면 전법 활동가 모임에 편재를 하는 거예요. 정토회는 가능한 많은 사람과 같이 가는 걸 중요시하지, 떼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떼어내겠어요? 가능한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야죠.”

 

온라인 진행의 특성

 

그러나 오프라인 진행과 온라인 진행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은 유념해야 합니다. 온라인 진행은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이 그 사람이 진행을 도맡기 때문에,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진행을 하게 하면 불상사가 생길 수 있어요. 또 진행이 너무 서툴면 학생이 떨어져 나가 버려요. 오프라인 법당에서 수업을 할 때는 진행이 좀 서툴러도 법당에 가면 총무님도 있고 대의원도 있어서 인격적인 감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에서는 학생이 만나는 사람이 진행자 한 명밖에 없어요.

 

이처럼 온라인 상에서는 진행자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진행자를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되는 기준은 기존에 정회원이 되는 기준과는 달라요.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천일결사에 입재하고, 회비를 내고, 봉사를 하면, 정회원이 된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인데, 자꾸 같은 것으로 생각하니까 이해가 어려운 거예요. 온라인 전법 활동가는 사람을 책임지는 활동가이고, 정토회의 얼굴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온라인 전법 활동가가 정토회의 대표와 다름없는 거예요. 어떤 면에서 정토회는 온라인 전법 활동가에게 대표의 역할을 전부 위임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이런 중요한 역할을 사사로운 정을 갖고 결정하면 안 돼요.

 

한 명이라도 더 함께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보시를 많이 했다’, ‘이 사람은 새벽마다 나와서 기도를 한다’, ‘이 사람은 수련원에 와서 농사를 도맡아 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자꾸 온라인 전법 활동가 모임에 소속을 시켜 달라고 하는데, 그분들은 그것대로 정토회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들에게는 어떤 지위를 줄 것인지는 별도로 논의를 해야 됩니다.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들도 연수 교육을 시켜주고, 지위도 주자는 제안은 온라인 전법 활동가에 대한 논의가 끝난 다음의 얘기예요. 이런 회원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완책을 세우면 됩니다.

 

지금 우선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온라인 전법과 온라인 전환이에요. 이제는 법당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온라인이라는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에 맞는 시스템을 지금 도입하자는 얘기예요. 이미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왜 활동을 못하게 하겠어요? 활동가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데요.”

 

 

인간관계에 갈등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직장에서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람들과 갈등이 생깁니다. 스님께서는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하셨는데요. 상사, 동료, 후배들도 자기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주장하지만 저도 제 나름대로 타당한 근거가 있어서 주장을 합니다. 서로 인정할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간혹 제 생각이 옳다고 끝까지 주장할 때가 있어요. 서로 자기주장만 하다 보면 결국 갈등을 하게 되고 감정이 상해서 관계가 불편해집니다. 어떻게 하면 갈등 없이 슬기롭고 지혜롭게 인간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서로 믿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 다르기 때문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야 소소한 갈등 없이 살 수 있어요. 내가 보통사람이라면 소소한 갈등 정도는 웃으면서 그냥 ‘사는 게 다 그렇구나’하고 넘기면 돼요. 그런데 갈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직장생활도 가정생활도 힘들고 살기가 어려울 정도라면 자기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스트레스받지 않는 게 중요해요

 

사람은 서로 다를 뿐인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고 지나치게 고집하면 상대와 부딪칩니다. 결국 내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내 주장도 일리가 있고 상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라고 인정하면 갈등은 있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습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다 양보하라는 뜻이 아니에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에요.

 

예를 들어 내가 ‘이번 휴가에 설악산 가자’라고 했는데 아내는 ‘제주도에 가자’라고 합니다. ‘너는 내가 산에만 가자하면 바다 가자고 한다’라고 짜증이 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예요.‘내가 산에 가고 싶어 하듯이 아내는 바다에 가고 싶어 하는구나’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인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면 여러 가지 길이 있어요.첫째, 내가 산을 포기하고 ‘그래, 바다에 가자’ 이렇게 아내를 따라 주면 됩니다.둘째, 산에 가고 싶으면 ‘여보, 내가 진짜 산에 가고 싶다. 이번만큼은 당신이 양보해줘.’라고 사정을 하면 됩니다.

 

내가 양보하는 방법은 단번에 할 수 있어요. 상대에게 양보를 요구하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미리 겁내지 말고 일단 상대방에게 물어보면 돼요. 상대가 ‘싫어’라고 하면 ‘알았어요’ 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바다로 가면 됩니다. 그래도 산에 가고 싶다면 한 번 더 얘기해보면 돼요. 이때 아내가 자꾸 이야기한다고 성질을 팍 내면 ‘알겠어요’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도 산에 가고 싶으면 또 얘기해보고요. 이럴 때 누가 스트레스를 받겠어요?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나는 안 받아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지레 포기하게 되지만, 스트레스를 안 받으면 세 번 네 번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결론이 나도 좋고, 안 나면 휴가를 따로따로 갈 수도 있어요. 부부라고 휴가를 꼭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이들한테도 ‘아빠는 산에 가고 엄마는 바다로 갈 건데 너희들은 어디로 갈래?’ 이렇게 물어서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면 돼요.

 

이렇게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이런저런 해결책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화가 나서 지레 포기해 버리거나 상대를 미워하거나 싸우게 돼요. 핵심은 양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상대를 인정했는데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내 주장대로 해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양보해 보기도 하고, 각자 자기 주장대로 해보기도 하면 돼요. 다양하게 해 보는 겁니다.

 

밀당이라고 들어봤어요? 인생살이라는 게 다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 사는 거예요. (웃음) 꼭 내식대로 다 되어야 좋은 것도 아니고, 뭐든지 다 양보해야 좋은 것도 아니에요. 싫어도 한번 양보해줘 보고, 양보할 마음이 있어도 한번 당겨도 보고 이렇게 재미있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놀이도 심각하게 하면 싸움이 되고, 싸움도 재미로 하면 놀이가 되잖아요.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사람들과 견해가 다를 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부부도, 부모 자식도 견해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사예요. 그런 현실 속에서 ‘다름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 것인가’가 모든 사람의 과제입니다. 차이를 놀이처럼 재밌게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문제를 양변에서 어느 한변에 치우치지말고 양변을 화합하여 중도로 해결하라)

 

 

 

 

 

 

 

 

 

 

 

 

 

 

 

 

 

 

 

 

 

 

 

 

 

 

 

 

 

 

 

 

 

 

 

 

 

 

 

 

 

 

 

 

 

 

 

 

 

 

 

 

 

 

 

 

 

 

 

 

 

 

 

 

 

 

 

 

 

 

 

 

 

 

 

 

 

 

 

 

 

 

 

 

 

 

 

 

 

 

 

 

 

 

 

 

 

 

 

 

 

 

 

 

 

 

 

 

 

 

 

 

 

 

 

 

 

 

 

 

 

 

 

 

 

 

 

 

 

 

 

 

 

 

 

 

 

 

 

 

 

 

 

 

 

 

 

 

 

 

 

 

 

 

 

 

 

 

 

 

 

 

 

 

 

 

 

 

 

 

 

 

 

 

 

 

 

 

 

 

 

 

 

 

 

 

 

 

 

 

 

 

 

 

좋은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직장에서 한 지점에 장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습니다. 리더십 강의에서 섬기는 리더니 봉사하는 리더니 여러 이야기를 많이 듣기는 들었는데 좋은 리더가 무엇인지 막연하게 느껴져요. 저와 함께 일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한 직장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으면 법륜스님 강의 열풍이 불어서 온갖 회사나 단체에서 저를 초빙했을 겁니다. 지금 오라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래도 질문을 하셨으니 제가 생각하는 리더에 대해 편안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의 책임자가 되면 책임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있어요. 기본 역할은 업무를 사람들에게 분산해서 나눠주고, 그 성과를 수렴해서 상부로 올려주는 일입니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책임자를 세우는 거예요. 예를 들어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팀장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맡기고, 또 팀장들 중 한 명에게 과장을 맡고, 과장들 중 한 명에게 부장을 맡겨요. 이렇게 조직을 구성하는 이유는 백 명을 한 사람이 직접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
책임자가 되면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업무를 관리해야 하고, 둘째, 그 업무를 하는 사람을 관리해야 합니다. 업무관리와 인사관리라고 할 수 있겠죠. 책임자가 사람이 좋아서 사람들과 화합만 하다 보면 업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책임자가 업무의 효율만 중요하게 생각해서 사람들에게 빡빡하게 일을 시키면 초기에는 성과가 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지쳐서 다 나가떨어져요. 거꾸로 업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업무도 효율적으로 하고, 사람들과 화합도 해야 해요. 불교적으로 말하면 효율과 화합의 중도를 찾아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 비중이 높아지면 나중에는 결국 두 가지 모두 놓칠 수 있어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고 싶다면 항상 일의 분산과 수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서원일 때는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책임자는 자기만 열심히 한다고 일이 되는 게 아니에요. 부서원 전체가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 책임을 져주면 안심을 하고 과감하게 일을 합니다. 반대로 자꾸 책임을 물으면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일을 하게 돼요. 사람들이 공무원을 보고 복지부동한다고 하는데, 한 개인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묻다 보니까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주어진 일만 적당히 하고 중간만 가도 되는데, 공연히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면 책임을 져야 하잖아요. 조직의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한 개인에게 책임을 너무 과하게 물으면 복지부동하기 쉽고 그렇다고 책임을 묻지 않으면 부정부패로 나아가기 쉬워요. 여기에서도 중도가 필요해요.

그래서 책임자가 되면 외부의 바람을 막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부서원이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책임자가 책임을 져주지 않고, 책임을 모두 부서원에게 돌려버리면 부서원들이 힘들어해요. 책임을 져주는 자세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좋은 의도로 하다가 잘못된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져주겠다.’

책임자가 이렇게 책임을 져줘야 사람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책임은 내가 져주되 성과는 부서원에게 돌려줘야 해요. 어떤 책임자는 부서에서 성과가 나면 다 자기 성과로 가져가서 자기가 승진하고, 자기가 상을 받아요. 이러면 부서원은 기운이 빠집니다.

‘우리가 죽어라고 일해 봤자 저 사람 좋은 일 시키는 것 밖에 안 되는구나.’

부서원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책임자가 항상 성과는 나누고, 책임은 짊어져주는 자세를 가져야 부서원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일을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부서원들이 좋은 뜻으로 했는데 결과가 나쁠 때는 너무 문책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인생은 늘 실수할 수도 있고, 실수를 통해서 더 좋은 결과를 찾아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은퇴하고 외롭지 않으려면
관공서에서 높은 자리에서 일하다가 은퇴했던 사람들도 가끔 즉문즉설에서 질문을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식 결혼할 때 자기 옛날 부하들이 아무도 안 찾아왔다고 해요. 그분이 배신감을 느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일이에요. 앞에서 사람들이 굽신굽신 할 때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자리를 보고 숙이는 거잖아요. 이제 자리가 없어졌으니까 굽신거릴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책임자가 책임자로서 역할을 다 해야 하지만, 밥을 같이 먹거나 사석에서도 책임자로 굴면 안 되는 거예요. 사석에서는 부서원들과 친구가 되고, 공석에서는 딱 공적으로 업무를 해야 해요. 그런데 사석에서 친구처럼 지내다 보면 공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까지 사적으로 처리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사람들과 너무 공적으로만 지내다 보면 밥 먹는 자리에서도 공적으로 대하기 쉬워요. 그러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관계를 맺어야 나중에 지위가 없어져도 서로 연락을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돕고 살 수 있어요. 이 정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회원의 활동방향은?


“일반회원의 활동 방향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정토회가 온라인으로 모두 전환되면 ‘정회원’이나 ‘일반회원’이라는 말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정토회의 창립취지에 동의하면 ‘회원’이 됩니다. 정토회의 창립취지가 뭘까요?

‘우리는 수행자다. 수행자는 수행하고 보시하고 봉사한다.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뜨려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창립취지에 동의를 하면 누구나 정토회의 일원으로 참가할 수 있어요.

회원이 되면 누릴 수 있는 권리
온라인 시대에는 정토회 회원이 되면 ‘수행, 보시, 봉사하라’, 이렇게 권장은 하지만,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활동하면 됩니다.

우선 수행 차원에서는 정기적으로 법문을 들을 권리가 생기고, 필요하면 교육 연수를 받을 권리가 주어지고, 명상수련에 참여할 권리도 생기고, 천일결사에 참여할 권리도 생기고, 수련원에 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생깁니다. 이제는 이게 의무가 아니라 전부 권리사항이 됩니다.


회원의 비전
온라인 정토회에서 회원들의 비전을 굳이 말씀드리자면, 첫째, 자신의 수행에 관계된 법문을 온라인으로 집에서 자유롭게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가 원하면 뭐든지 정토회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하면 봉사도 할 수 있고, 원하면 보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봉사가 권장사항일 뿐이지 의무사항은 아닙니다.

 

셋째, 지역별 수련원에 가서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갖고 있던 ‘절’이라는 개념이 조금 더 확대가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수련원에 가서 숙박을 할 수도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수행할 수 있는 등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집니다.

전법 활동가가 되면 주어지는 의무
그렇게 활동하던 중에 ‘나도 전법 활동가가 되고 싶다’ 하고 원이 생기면 신청을 하면 돼요. 전법 활동가는 일정한 인격과 일정한 역량을 갖추고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진행하는 사람입니다. 신청하신 분에게는 전법 활동가에 필요한 자격 요건이 갖추어졌는지 확인합니다. 경전 대학을 졸업했는지, 깨달음의장을 다녀왔는지, 명상수련을 했는지, 천일결사 수행은 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합니다.

이런 조건을 충족하면 교육 및 연수를 받고 나서 일정 기간 스텝으로 참여해서 경험을 쌓은 후 진행자의 자격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진행자로 활동하다가 본인이 바빠서 활동을 못하게 되면 사표를 내면 됩니다. 전법 활동가는 마치 선생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정예화하는 훈련이 필요해요. 온라인 시대에는 지역 법당 중심에서 개인 법당 중심으로, 총무 중심에서 전법 활동가 중심으로 운영의 중심이 옮겨가게 됩니다.”


자발성만으로는 역부족이지 않을까요
“온라인 시대에 정토회는 더욱더 자발성에 기초해서 운영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의 경우를 보면 100퍼센트 저의 자발성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지는 않거든요. 가끔 물러서는 마음도 있었고,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지만,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 있었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너무 자발성에만 맡겨두면 가능성이 있는 활동가들이 자칫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요? 활동가를 양성하려면 끌어주는 힘이 되어줄 장치를 마련하는 작업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의견이에요. 현실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온라인은 오프라인과는 특성이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법당에 나와서 같이 일도 하고 고생도 하다 보니 중간에 활동하고 싶지 않았다가도 또 마음이 바뀌어서 활동을 계속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는 그러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온라인에서는 활동가를 양성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해요. 가령 불교대학의 경우, 오프라인에서는 10명이 입학하면 밀착 관리를 해서 5명이 졸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온라인에서는 20명을 받아서 8명을 졸업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10명이 입학해서 5명을 졸업하면 50퍼센트입니다. 20명을 받아서 활동가 8명이 졸업하면 40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졸업생 수를 놓고 보면 5명보다 8명이 훨씬 많죠. 이처럼 온라인은 효율은 조금 떨어지지만 접근성이 넓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손실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더 밀착해서 수행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도록 지원하고 함께하는 측면이 강했지만, 온라인이 되면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그중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요. 아무리 우리가 보완을 해도 온라인에서는 활동가를 키워낼 확률이 오프라인일 때보다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은 확률이 떨어지는 대신 양을 크게 늘리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들도 전법 활동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컴퓨터를 한 번도 다뤄보지 않았던 60대 보살님들은 온라인 교육을 받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연세가 드신 분들은 더욱 신경 써서 교육 기간을 늘린다거나 컴퓨터 기본 교육을 좀 받은 다음에 전법 활동가로 참여할 수 있게끔 하면 안 될까요?”

“옛날에 절에 가면 사찰예절을 배웠던 것을 기억나세요? 절은 어떻게 하고, 방석은 어떻게 놓고, 출입은 어떻게 하고, 향이며 초는 어떻게 켜고, 청수를 올릴 때는 어떻게 한다는 사찰예절을 배웠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정토회에서는 불교대학이든 봉사 활동이든 신청하면 온라인 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컴퓨터 활용법과 에티켓을 배워야 해요. 어디를 클릭해서 어디에 들어가는지, 검색은 어떻게 하는지, 화상회의는 어떻게 하는지, 음소거는 어떻게 하는지, 이런 것을 전부 훈련받아야 해요.


그러니 아무리 신심이 있고 정토회에 애정이 있어도 이런 기술을 안 익히면 안타깝지만 진행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분들이 있다면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다른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온라인 전법 활동가로서 활동하려면 컴퓨터 기술을 익혀야 합니다. 나누기도 해야 하고, 안내사항도 전달해야 하고, 문서도 보내야 하니까요. 전법 활동가로서 활동하려면 컴퓨터 활용법을 익혀야 해요.

‘아이고, 내가 이 나이에 그거 익혀서 뭐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일을 맡아서 하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 정토회로 바뀌게 되면 모든 기존의 조직을 다 해체되고 가능한 모두 전법의 현장으로 가야 합니다. 온라인 현장에서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일이 정토회의 중심 활동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모둠장이다’, ‘내가 지회장이다’, ‘내가 지부장이다’ 이런 지위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가 전법 활동을 하는 것인데, 그중에 필요한 경우에 ‘아, 당신이 당분간 지부장을 좀 해주시오’ 이렇게 요청을 받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는 직급은 큰 의미가 없고, 모든 활동가가 전법사의 역할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각 지부마다 충분히 질의응답하는 시간을 가진 후 마지막으로 스님은 회원들에게 얼마나 이해가 되었는지 물어보고 앞으로 남은 절차를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여러 선택지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건지는 여러분이 결정하면 돼요. 그러면 방향은 이해가 됐어요? 이해가 됐으면 손으로 표시를 해봐요.”

모두 화면 속에서 오케이 표시를 했습니다.

“좋습니다.”


“충분히 토론하고 의견 수렴도 했으니까, 이제 다음 주에는 진행상의 여러 가지 선택지를 놓고 여러분이 투표를 해주세요. 현재 정토회의 시스템에서는 결정 권한이 전국대의원회의에 있어요. 그러니 대의원들이 대중의 여론을 수렴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우리의 의사를 투표를 통해 표시해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투표한 결과를 첨부한 제안서를 전국대의원회의에 올립니다. 대중의 여론을 참고해서 결정해달라는 뜻입니다. 아직까지는 결정 권한이 전국대의원회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온라인 방식으로 모두 바뀌면 사업의 많은 부분에서 활동 회원들의 결정권이 더욱 커집니다. 지금은 전국대의원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서원행자들이 승인하면 끝나는데, 앞으로는 지부에서 어떤 사업을 결정해도 그 아래에 지회장이나 모둠장이 그 결정을 승인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어떤 안건은 그 아래 회원들 전체의 승인을 받는 식의 절차를 거치도록 시스템이 바뀌게 돼요. 온라인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대중의 직접적 의견을 훨씬 더 많이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려고 합니다.


온라인 시대에 정토회는 전법 활동을 주로 하게 되기 때문에 의사결정이라고 해도 대부분 전법 활동에 관련해서 결정할 일밖에 없습니다. 그 외에 달리 결정할 게 별로 없어요. 지역별 수련원에서 농사를 어떻게 짓고 이런저런 일을 어떻게 하느냐는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주가 되어 수련원 단위에서 의사결정을 해나가면 됩니다.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구조는 지역별 수련원 단위에서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우리가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점차적으로 보충해 나가려고 해요.

 

온라인 정토회를 재창립한다는 마음으로
지금 우리가 의논하는 내용은 지금까지의 오프라인 정토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지역 중심의 정토회를 계속 생각하면서 ‘이건 어떡하냐, 저건 어떡하냐’ 하지만, 사실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내용은 온라인 정토회라는 새로운 정토회를 재창립하는 작업입니다. 이념과 방향은 그대로이지만 모든 회원, 구조, 의무, 조직 방식, 의사결정 방식에서 온라인 정토회를 새로 구축해나가는 과정에 시야를 좀 더 넓게 가져 주었으면 합니다.”


저녁 7시가 넘어 법회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8시, 정초법회 (청년)
8시부터는 청년 정회원들을 만났습니다. 그동안 청년들이 모여 공청회를 한 결과를 발표하고, 스님에게 온라인 정토회 개편 방향에 대해 전체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청년은 청년들만 따로 모아 청년특별지부를 구성하지 않고 지역에 편재하면 청년부가 약해질 것 같다고 우려했습니다. 이에 대해 스님은 수행을 가장 우선해서 활동해야 한다고 짚어주었습니다.


“청년부 조건을 35세로 제한하니 여러분들은 답답할 수도 있을 거예요. 30세에 정토회 청년부 활동을 시작하면 정회원이 되었을 때 35세를 넘어버려서 청년부를 그만두어야 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저도 그런 실정을 알고 있습니다. (웃음)


수행자들의 모임
그러나 여러분이 청년부에 앞서 한 사람의 수행자이고, 수행자의 모임인 정토회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방향 하에 그렇다면 청년들에게는 불법을 어떻게 전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해요. 청년부를 더 강조해버리면 정토회가 부차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청년부 대표 역할을 했던 사람 중에 지금까지 정토회에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한 명의 수행자가 먼저 되는 게 아니고 그냥 활동하는 재미만 추구하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청년부 활동이 끝나게 되면 정토회 활동도 그만두어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수행자로서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이고 수행자가 사회를 정화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이지 사회 운동을 하기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우리는 수행이 목표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도 함께 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읽는 경전에는 아시타 선인의 조카가 부처님을 찾아와 집 있는 곳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가 성인의 길을 가고자 한다면,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깨달음의 길로 가려는 수행자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상황이든 저런 상황이든 마음이 한결같아야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평정심이라고 합니다. 남이 비난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남이 칭찬한다고 해서 좋아서 우쭐대지 않는 것이 평정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군가가 비난하면 성질이 나고, 누군가가 칭찬하면 기분이 좋아서 우쭐댑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세 가지 지침
그러나 수행자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욕망을 멀리 떠나야 해요. 오늘 읽은 경전에는 수행자는 욕망을 떠나야 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욕망을 떠나게 하기 위해서 수행자에게 부처님이 내린 지침이 세 가지예요.


첫째, 먹는 욕망은 참 뿌리가 깊습니다. 세상에 살 때는 맘껏 먹으니까 자기는 먹는 욕망이 없는 것 같은데, 단식을 하거나, 명상 수련 때 소식을 하거나, 수행공동체에 들어와서 정해진 음식만 먹으면, 무슨 수행자가 저러나 할 만큼 먹는 것에 집착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먹는 욕망을 딱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 수행자들에게 걸식을 하도록 했습니다. 걸식을 하는 이유는 먹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입는 욕망입니다. 여러분들은 입는 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입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수행자들에게 버려진 옷을 주워 입으라고 하셨어요. 음식도 남이 버리는 것을 주워 먹고, 옷도 남이 버리는 것을 주워 입어라는 거예요.

셋째, 자는 욕망이에요. 여러분들은 집 사고, 집 꾸미고, 침대 사는 것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사는 게 굉장히 어려웠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라고 하면 더 어렵겠지요.

저도 여러분들이 이렇게까지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부처님 가르침의 기준이 딱 여기에 있다는 것만 자각하고 살아도 우리는 삶에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아무리 음식을 못 먹어도 얻어먹는 것보다는 낫고, 아무리 옷을 못 입어도 분소의보다는 낫고, 한 방에 여러 명이 자든 어떻게 자든 나무 밑이나 동굴보다는 낫잖아요. 이걸 알면 생활하는데 무슨 불만이 생기겠어요. 이런 자세를 기본적으로 딱 가져버리면 우리는 이 세속적인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
우리의 삶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요? 자기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과거의 자기 습관을 고집해서 힘든 겁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지금 경제가 더 어려워졌는데도 선진국 사람들보다 어려움을 덜 느끼고 있습니다. 원래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코로나 19 때문에 너무 걱정이 돼서 인도 불가촉천민인 둥게스와리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연락을 해 보면, ‘스님, 우리 마을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원래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오히려 코로나 사태 덕분에 정부 지원금이 지급되어서 살기가 더 나아졌다고 해요.

그런데 유럽이나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지금 난리잖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난리이고, 못 다니게 한다고 난리입니다. 이것을 보면 어떤 객관적인 상황이 어려워진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되지 않으니까 죽는다고 난리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렵다 할 때는 어제보다 어렵다는 얘기예요.

둘째, 남하고 비교해서 남보다 어렵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사는 것 자체는 큰 불편이 없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힘든 거예요. 요즘 여러분들이 제일 많이 느끼죠. 지금 월급도 그대로 있고, 집도 그대로 있는데, 요즘 옆에서 ‘부동산이 몇 배로 올랐다’, ‘주식을 사서 어떻다’ 이런 소문을 들으니까 갑자기 본인이 가난해진 것 같잖아요. 주위에 벼락부자가 생겨나니까 나는 벼락 가난뱅이가 된 기분이에요.

이런 게 다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지난날과 비교해서 가난해진 거예요. 결혼 생활이 힘든 이유도 혼자 살 때보다 귀찮아서 그렇고, 이혼을 하거나 사별을 해서 힘든 이유도 같이 살 때보다 외로운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습관을 고집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런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가 않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더 근본은 마음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즉 평정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 욕망이에요. 욕망대로 되면 기분이 좋고, 욕망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쁩니다. 좋고 싫음이 늘 있으니까 마음이 널뛰기를 하는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리면 마음의 널뛰기가 줄어들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서 지금 널뛰기를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의 삶 속에서 오늘 널뛰기를 얼마나 했는지, 평정심을 얼마나 잃었는지, 이런 것을 돌아보면서 하루하루 정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수행일까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자유롭고 행복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에 맞기 때문에 정토회를 좋아하는 거잖아요.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 자기 생각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겁니다. 자기 생각에 맞으면 정토회를 좋아하다가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정토회가 싫어지는 거예요. 내 마음에 들면 법륜 스님을 좋아하다가 내 마음에 안 들면 법륜 스님도 싫은 겁니다. 그게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살고 있지요. 그러나 그 정도 갖고는 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은 마음을 한결 같이 유지하는 거예요. 정토회에 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이유가 뭘까?’ 하면서 궁금해 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문제라고 규정하는 것은 수행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발전이 가능할까요?

스님의 역할은 대중들에게 정토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법문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대중들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어려운 점을 호소하는 것이고요. 여러분은 이 사이에서 중도의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가야 할 길만 너무 강조하면 현실을 외면하게 되고, 현실만 너무 강조하면 가야 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중과 함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길이 더 바른 길인지 항상 연구해야 해요. 그래야 발전이 가능합니다.”

 

 

주말에 정초법회를 더 해 본 후 쟁점사항에 대해 초안을 잡아보고, 다음 주 수행법회 때 전 회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해보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법회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유 시간이 30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갑자기 뭔가 잊어버린 게 있다며 말했습니다.

 

“아참, 깜박 잊고 밥솥에 전원을 안 눌러 놓고 왔어요. 저녁을 굶게 생겼네요.” (웃음)

 

자취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며 한바탕 웃은 후 이어서 금요 정기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1100여 명의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스님은 따뜻해진 날씨 이야기를 하며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마치 봄날 같아요. 문경 수련원에 쌓였던 눈도 다 녹았고, 오늘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는데 마치 봄비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매섭던 추위도 이렇게 몇 주 만에 봄날같이 따뜻해지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힘들 때는 그 상황이 영원히 갈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별 일 아니에요.

 

그렇다고 추위가 다 지나간 것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봄이 왔나 싶지만 다시 매서운 추위가 또 몰아닥칩니다. 그래도 지난번 추위보다는 좀 덜해요. 지난번 추위보다 덜 하면 기분 상으로는 견딜 만합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영하 20도까지 내려간 상황을 견디고 나니까 이제 영화 5도 정도는 아주 따뜻한 봄날 같은 그런 느낌이잖아요.

 

어려움이 닥쳐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이유

그래서 어려움을 겪어 보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심한 어려움을 겪어 보면 오히려 인생살이가 아주 수월해집니다. 108배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3000배를 한번 하고 나면 108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녁에 명상 30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4박 5일 동안 명상을 하고 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요.

 

 

그래서 어려운 것을 너무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움을 한번 극복하고 나면 ‘세상이란 게 참 별거 아니구나’ 하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어려워서 우리가 어렵다고 느끼는 게 아니에요. 망설이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실은 인생이 힘든 겁니다.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 명이 먼저 죽거나 헤어져서 혼자 살게 되면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데, 사실은 힘들 이유가 없어요. 원래 혼자 살았잖아요. 우리는 늘 이렇게 순간순간 힘들어 하지만 지나 놓고 보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한여름 밤의 꿈과 같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에요.

 

오늘도 힘들어 죽겠다고 질문들을 하실 텐데, 시작하자마자 스님이 인생살이가 별거 아니라고 해서 질문할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웃음) 그래도 한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분노가 치솟는 것이 또 인생이에요. 그럼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이어서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에게 나쁜 마음이 일어난다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빌려간 돈을 못 갚는 시동생, 알거지가 되면 좋겠어요

 

“남편이 은행에서 대출한 삼천만 원을 시동생에게 빌려줬습니다. 그 돈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제가 갚아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홀가분하게 그 대출금을 갚으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한편으로는 그냥 제가 갚자는 마음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동생이 다음 생에는 알거지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나쁜 마음도 일어납니다. 이렇게 마음의 기복이 심한 저 자신도 싫어요.”

 

 

“만약 동생이 교통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서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동생이 알거지가 된다면, 남편이 돈을 줄까요? 안 줄까요?”

 

“줄 것 같습니다.”

 

“질문자는 계속 시동생에게 돈을 더 줄 궁리를 하고 있네요. 질문자 본인은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얘기를 자꾸 하는데, 스님이 보기에는 돈이 더 나갈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천만 원 빌려간 사람이 돈을 벌어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안 갚으면 기분 나빠하는데, 사실은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어요. 잘 사니까 이제 더 이상 돈을 빌려갈 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그 사람이 못 살아야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잘 살면 기분이 더 나빠져서 그 사람이 못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떨까요? 만약 내가 삼천만 원을 빌려줬는데도 시동생이 계속 알거지로 산다면, 안쓰러워서 돈을 더 줘야 해요. 그러니 시동생이 빌려 간 돈을 갚든, 안 갚든, 지금 잘 사는 것이 나에게 이익일까요? 못 사는 게 이익일까요?”

 

“스님 말씀을 들으니, 그래도 시동생이 잘 사는 게 이익일 것 같습니다.”

 

 

“그래요. 시동생에게 삼천만 원을 빌려주어서 앞으로는 돈을 빌리러 안 오게 되었다면 그걸로 고마운 거예요. 그리고 시동생은 돈을 빌려 가서 안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큰돈을 빌리러 못 옵니다. 만약에 한 번도 안 빌려 갔다면 급한 일이라면서 1억 정도 빌리러 올 수도 있고, 남편이 결국 빌려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한 번 빌려줬고, 그걸 못 갚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남편이 적은 돈을 줄 수는 있어도 큰돈을 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 질문자는 더더욱 안 빌려주겠죠. 이렇게 더 큰 손실을 막았기 때문에 길게 보면 손해가 아닙니다.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앞으로 더 큰돈을 빌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이 있어서 시동생은 더 이상 요청을 못 할 것이고, 요청하더라도 빌려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시동생에게 돈을 줬다고 생각하고 끝내세요. 그게 결코 큰 손해가 아니라는 걸 아시면 됩니다. 삼천만 원에 집착해서 ‘망해라! 거지돼라!’ 하고 기도하는데, 만약 실제로 망하거나 거지가 된다면 돈을 더 줘야 해요. 이해하겠어요?”

 

“네. 이런 역전이 있을 줄 몰랐어요.” (웃음)

 

 

“이치를 알겠죠? 내 돈을 빌려가서 잘 되면 기분이 약간 나쁘지만 그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리고 잘하면 빌려간 돈을 받을 가능성도 조금은 생기게 되고, 안 받아도 더 이상 손해날 일은 없어집니다. 기분이 조금 나쁠 뿐이에요.

 

그렇다고 안 받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속으로는 ‘이제 손해날 일은 없겠다’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겉으로는 계속 ‘돈 갚아야지?’ 하고 가끔 말해야 해요. 그 말은 진짜 갚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이렇게 가끔 말하면 과거에 돈을 못 갚았기 때문에 빌려 달라는 소리를 다시는 못 하게 돼요. 이해하셨어요?”

 

“네,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돈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라는 게 아니라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겁니다. 기분 나빠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미워하고 원망하면 더 큰 손해가 계속 이어집니다. ‘더는 손해날 일은 없다’ 하고 마음에서는 돈 받을 생각을 내려놓고, 대신에 가끔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하세요.

 

‘빌려 간 돈 갚는다고 해놓고 왜 안 주세요? 나 좀 힘든데 좀 주지?’

 

 

이 말은 돈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다시는 더 달라는 소리를 못 하게 하는 예방책입니다. 그러다 보면 혹시나 시동생이 알아서 돈을 조금씩 갚을 수도 있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돈을 갚으면 그때마다 고맙다고 말해야 합니다. ‘어려운데 안 잊어버리고 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인사를 해야 돈을 주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지, 싸우면 독심이 생겨서 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 버리고, 있어도 안 줍니다. 결국 돈도 못 받고 인심도 잃게 돼요.”

 

“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삼천만 원은 모으기 힘든 돈이라서 자꾸 그 크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돈을 빌려줬다는 것은 그 돈이 없이도 살 수 있는 여유가 된다는 말 아니에요?”

 

“대출해서 주었습니다.”

 

“대출을 했든 어떻게 했든 굶어 죽지 않고 산다는 말 아닙니까?”

 

“어쨌든 맞벌이하고 있으니까 굶어 죽지 않고 살고는 있습니다.”

 

 

“빌려준 사람은 이유가 어떻든 그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얘기이고, 빌려간 사람은 그 돈이 없어서 빌려간 것 아닙니까. 돈을 빌려가서 안 갚은 것만 따지면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나보다 형편이 더 어려워서 빌려간 거예요. 물론 백 명 중 한 명은 사기꾼인 경우도 있지만, 동생도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갚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남의 돈을 빌려 가면 대부분 그 돈을 갚지만, 형제지간에는 돈을 빌려가도 고맙게는 생각하지만 ‘이걸 꼭 갚아야 하느냐’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돈을 빌려주고 나서 원수가 되는 건 대부분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사이입니다. 남과는 원수가 잘 안 돼요. 남과는 반드시 영수증과 보증서를 쓰고 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제간에는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아요. 그걸 갖고 나쁜 놈이라고 하는데, 심리적으로 보면 인간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형제간이나 친구 사이에는 돈거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돈을 주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거래를 하지 말라는 거예요. 거래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은 괜찮습니다. 삼천만 원 빌려달라고 한다면 ‘삼천만 원 빌려줄 상황은 안 되고, 네가 어렵다고 하니 오백만 원을 줄게’ 하고 그냥 주면 됩니다. 형제간에는 대부분 빌려줘도 다시 갚기가 어렵고, 계약서도 주고받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중에 재판해봐야 근거도 없어요. 그리고 형제나 친구에게 빌리러 올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빌려봤지만 도저히 안 돼서 마지막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갚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돈거래를 하지 말고 그냥 주라는 겁니다.

 

질문자도 그냥 주었다면 문제가 안 되는데 빌려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 그냥 줬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겉으로는 가끔씩 ‘빌려간 거, 왜 안 주지?’ 하고 웃으면서 얘기하세요.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는 빌려달라는 소리를 못하도록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그렇게 얘기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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