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은 꼭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절입니다. 절은 두 가지 종류의 절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목적을 가진 호법 사찰이 있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지은 호국 사찰이 있습니다. 가령 사천왕사는 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직 신라가 당나라를 물리치기 위해서 지은 절이기 때문에 호국 사찰입니다. 이런 호국 사찰은 비록 사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종교적으로 보시면 안 돼요. 이런 절은 역사적으로나 국가적인 안목을 갖고 보셔야 합니다. 황룡사 9층 탑도 오직 호국을 위해 지은 겁니다. 주변 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탑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

천룡사도 그런 호국 사찰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 때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樂鵬龜)가 이 절을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라고 했다 합니다. 그 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 사람은 반드시 이 절을 중창해 온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종교적인 목적으로 절을 지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차가 진입할 수 없는 이런 곳은 효용 가치가 전혀 없거든요. 게다가 코로나 사태 이후 정토회는 기존에 있던 법당도 모두 없애고 온라인 방식으로 전부 전환을 했기 때문에 더더욱 절을 짓겠다고 할 이유가 없죠.

 

그러나 이곳은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용성 조사님의 예언에 의하면 앞으로 대한민국은 크게 융성하는 나라가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한 국운의 출발이 이곳 천룡사 복원이라는 것입니다. 그 원년이 2025년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은 그 뜻을 이어받아서 이곳 부지를 매입해서 작은 절을 짓고 평생 천룡사 복원을 위해 노력해 오셨습니다.

 

그게 진짜냐 아니냐 이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기운이 옛부터 서려 있는 곳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호국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니까 혹시 종교적인 의미로만 이 절을 바라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종교적인 이유나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 때문에 이 절을 복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져서 국운이 융창해질 수 있게 한다는 염원을 갖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스님이 하는 일을 돕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런 뜻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자원봉사도 해주고 있고,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런 뜻있는 일에 동참한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어요.

 

 

조선시대 후기에 이 절에 계시던 스님들은 임금이 주인이 아니라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국의 의미를 담아 묘법연화경을 간행했다고 해요. 저 아래에 큰 창고 유지가 발견되었는데, 발굴단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불경을 간행하는 도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을에서 유생들이 올라와서 이 절에 불을 질러 버렸어요. 그래서 이곳이 폐허가 된 겁니다.

 

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곳

당시에 이 절에 계시던 조실 스님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제작한 종을 보호하려다가 불에 타서 돌아가셨고, 조실 스님을 시봉 하는 스님은 조실 스님을 구하려다가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살아남은 그 스님이 이 빈터에서 묵언 정진을 했다고 합니다. 그분을 용성 조사님이 시봉 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이곳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개벽 사상이 이어져 내려왔던 곳이에요.

 

 

용성 조사님 이전에 그 스승인 혜월 화상은 수운 최제우 선생과 인연이 되어 동학을 창시하는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 영향으로 수운 최제우 선생의 제자인 손병희 선생님과 혜월 화상의 제자인 용성 조사님이 의기투합해서 3.1독립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1독립 운동에 기독교가 참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용성 조사님이 손병희 선생님을 설득한 결과입니다. 그 당시 교세로 보면 천도교는 300만의 신자가 있었던 반면 기독교는 아주 미약해서 천도교 입장에서는 기독교와 같이 운동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용성 조사님이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맙시다. 천도교 혼자서 하면 천도교의 독립운동이 되지 국민운동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 기독교와 같이 해야 국민운동이 될 수 있습니다.’

 

윗대 스승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깊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손병희 선생이 용성 조사님의 제안을 선뜻 수용했던 겁니다. 그런 인연이 없었다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겠죠.

 

후손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을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모두 숨겨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록이나 증거를 남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용성 조사님의 공적은 후대에도 그것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속에서 도문 큰스님은 평생 동안 용성 조사님의 유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이 땅을 구입하고 천룡사를 복원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그 누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이런 땅을 구입해서 보전하려고 했겠습니까. 아마 그 돈으로 절을 지었으면 엄청나게 큰 절을 지으셨을 겁니다.

 

 

저도 도문 큰스님으로부터 천룡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간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저는 현대적인 방식으로 전법을 하려다 보니까 망설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서 깊은 정신이 서려 있는 곳을 복원하는 일은 우리가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저도 결단을 내려서 이 일을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저희들이 하는 일에 부족함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대가 후손들을 위해 ‘천룡사 복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징표를 하나 만들어 봅시다. 이곳에는 삼층석탑만 발굴이 되고 다른 것은 아무런 흔적이 없어서 참 안타까웠는데, 얼마 전에 대웅전 터가 발굴이 되면서 굉장한 일이 되었습니다. 발굴을 해보니 대웅전의 모양이 정방형이어서 신라시대 사찰이라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먼 길을 와 준 관계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천룡사 부지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가파른데 길이 정비가 안 되어 있어서 좀 위험해요.”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올해 안에 잘 정비해 놓겠습니다.”

 

 

경주 남산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돌아와 스님이 농사짓고 있는 농장을 함께 둘러본 후 손님들과 헤어졌습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18일 행복학교 특강에서 있었던 즉문즉설 하나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점집에 발길을 끊으니 안 좋은 일들이 생겨요

 

 

 

 

 

“저는 20년 넘게 무속인을 찾아다녔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을 듣고 모든 것이 제 어리석음인 줄 깨닫고 얼마 전부터 무속인 집에 발길을 끊고 스님 참회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아들이 맹장수술을 하고, 작은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공황장애가 생기고, 남편 사업도 잘 안 풀려요. 집안에 안 좋은 일들이 생기니까 제가 무속인 집에 안 가서 그런가 하고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저희 집 거실에 무속인이 차려놓은 업단지가 있는데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물을 갈고 108배 참회기도를 드립니다. 업단지를 없애자니 겁이 나요. 지금은 저희 집 사당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드리는데 괜찮을까요?”

 

“옛날에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다 하늘이 노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뭄이 들면 신하들이 임금에게 본처를 놔두고 후궁에게 너무 마음을 뺏겨서 하늘이 노한 탓이니 참회를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가 많이 오거나 안 오는 것이 어떤 남자하고 어떤 여자가 관계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서 일어나는 걸까요? 며칠 전에 최저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져서 35년 만에 최고 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남자와 어떤 여자가 관계를 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아니오.”

 

“임금이 어떤 행동을 했느냐를 날씨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가뭄이 들었을 때 임금에게 그런 상소가 올라오는 것은 민심이 떠났다는 거예요. 임금이 평소에 선정을 베풀었다면 가뭄이 들었다고 임금의 행실을 문제 삼지 않았겠죠. 임금이 폭정을 해서 민심이 떠나면 가뭄이 임금 탓이 되는 거예요.

 

만약 남편 사업도 잘 되고, 부부 관계도 좋고, 모든 것이 원만한데 아들이 맹장 수술을 했다면, 그냥 ‘아프구나’라고 생각하지 다른 생각을 안 할 겁니다. 사업만 안 되고 다른 문제가 없다면 ‘경제가 안 좋아서 사업이 잘 안 되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두세 가지가 겹쳐서 일어나면 ‘뭐가 문제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해요. 이걸 징크스라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징크스나 운세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때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 심리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굿을 하고 나면 ‘이제 좀 잘 풀리겠지’ 하는 믿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점이나 굿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제로 일이 잘 풀리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심리 치료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들 맹장이 터졌으면 수술을 하면 되죠. 죽은 건 아니잖아요. 별로 큰일이 아니에요. 사업이 잘 안 되는 건 지금 사회 전반적으로 경기가 안 좋아서 그렇지 우리 남편 사업만 안 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요즘 어떤 사업이 잘 된다면, 요행히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상황에서 잘 되는 품목이어서 그렇지, 귀신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작은 아들이 공황장애를 겪는다면 아들에게 불안한 심리가 있었기 때문에 발병한 거예요.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나 어릴 때 엄마가 많이 불안하면 아이에게 이런 증상이 많이 생깁니다. 아니면 아이가 어떤 충격을 받았거나요.

 

질문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별 거 아니에요. 누가 죽은 일도 아니고 집안이 망한 일도 아니에요. 문제를 삼으면, 신발이 하나 떠내려가도 ‘재수 없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길가다가 넘어져도 ‘운수가 안 좋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자가 ‘굿을 한 번 하면 마음이 안정되겠다’라고 생각하면 돈을 들여서 굿을 해도 괜찮아요. 또 굿을 안 해도 돼요. 그건 선택의 문제입니다.

 

저는 굿을 하라거나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거예요. 불상을 모시고 기도를 하나, 업단지를 모시고 기도를 하나, 십자가를 놓고 기도를 하나 아무 차이가 없어요. 불상을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업단지를 미신이라고 해요.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은 불상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업단지를 놓는 사람은 십자가나 불상이나 다 외국에서 들어온 쓸데없는 것이라고 하며 싸웁니다. 그런데 바위 밑에 가서 절을 하나, 바위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서 부처라고 이름 붙이고 절을 하나, 십자가를 그려 놓고 절을 하나 다 같은 돌이잖아요. 부처님 가르침은 그것이 다 같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업단지를 두고 절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업단지를 치워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지금 업단지를 치울 수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업단지를 치웠는데 내일 다리가 부러지면, 질문자는 업단지를 치웠기 때문에 다쳤다고 생각할 겁니다. 저는 다리가 부러지면 그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거예요. 다리 다친 것과 업단지를 연관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연관을 안 시키면 치워도 돼요. 그런데 질문자는 틀림없이 다리 다친 것을 업단지하고 연관시킬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두고 기도를 하라는 거예요. 업단지가 있다고 해도 문제가 없고, 없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불기 2565년,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성도절입니다. 어제 철야 정진은 하셨어요? 정진하고 깨달아서 다 얼굴이 밝아졌습니까?” (웃음)

인사를 나눈 후 부처님이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고 열반하시기까지 일생을 요약하여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6년 간 고행 끝에 마침내 성도에 이르는 대목은 더욱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6년을 고행했지만
“부처님은 시체를 내다 버렸던 시타림에서 6년간 극심한 고행을 하셨습니다. 음식도 제대로 안 먹고, 옷도 안 입고, 추위와 더위에도 상관하지 않고, 속된 말로 하면 죽기 살기로 정진을 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 같이 수행하는 친구들의 눈에도 너무나 존경스러웠어요. 우리가 아는 고행상은 바로 그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몇 년을 밀어붙였는데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자 마음속에서 회의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정진한다고 정말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을까? 그런 경지가 있기나 할까?’

경전에서는 이런 모습을 ‘마왕 파순이 유혹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열반이란 없다. 그런 말만 있지, 실제 그런 경지는 없다. 네가 이곳에서 이렇게 정진하다가 죽어버리면 세상에는 아무도 너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 그건 무의미한 죽음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왕궁으로 돌아가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빌면 앞으로 너는 전륜성왕이 될 수가 있다. 전 인도를 통일하는 왕 중의 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이 바보 같은 짓을 그만해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정진했는데도 열반의 경지가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들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겠죠.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봅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그렇게 지난 삶을 돌아봤더니 출가하기 전 왕자 시절에는 욕망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놀고 싶으면 놀았습니다.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았어요. 실컷 즐겨봤지만, 욕망은 마치 마약 같아서 만족감은 그 순간뿐이고 오히려 갈수록 더 커졌습니다. 욕망을 채워서 얻는 즐거움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거움에는 반드시 괴로움이라고 하는 과보가 따랐습니다.

그러다 출가 사문을 만나고 새로운 희망을 가졌어요. 출가를 한 부처님은 이번에는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고 절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욕망과 싸웠습니다. 배고파도 참고, 벌레가 물어도 참고, 애들이 와서 때려도 참았어요. 욕망을 참을 수는 있었지만, 참느라 늘 몸과 마음이 긴장돼 있었어요. 이 또한 완전히 편안한 상태, 즉 열반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욕망을 따르면 과보가 생기고, 욕망을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생깁니다. 부처님은 이 둘의 모순을 발견하시고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억제하지도 않는 중도(中道)를 발견했습니다. 즉, 욕망을 다만 욕망인 줄 알아차리는 겁니다. 게으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멍청하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뚜렷이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거예요. 편안하면 오래 할 수 있어요. 어떤 시공간을 제한하고 딱 결심하는 게 아니라 알아차림은 가장 편안하고 가장 앎이 분명한 상태이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새로운 길인 중도는 불교에 있어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도를 발견한 부처님은 시타림에서 나와서 우선 지친 몸을 추슬렀습니다. 경전에는 몸에 막 이끼가 끼어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먼저 냇가로 가서 몸을 씻고 나오다가 허기가 져서 쓰러졌는데 수자타가 준 유미죽을 받아먹고 기력을 회복했어요. 같이 수행하던 친구들이 볼 때는 이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극심한 고행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존경했는데, 결국은 목욕을 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아, 고타마가 수행을 포기했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부처님은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자기 정진에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네이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깊은 선정에 들었어요. 경전 여기저기를 살펴보면 보리수 아래에서 49일간 한 번도 일어서지 않고 용맹정진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 공양을 얻어먹었다는 기록이 없으니까요.

마왕의 유혹과 협박
보리수 아래 선정에 든 부처님은 전처럼 막 각오하고 결심하고 긴장하는 게 아니라 편안한 가운데 집중을 했어요. 모든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있다 보니 내면의 욕망들이 올라왔어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고행을 통해 이제는 욕망이 없어진 줄 알았는데, 긴장을 풀고 앉아 있으니까 아직도 그 욕망의 뿌리가 남아있어서 올라왔던 거죠. 여기서 ‘마왕의 세 가지 유혹’이 나옵니다.


독재정권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합니다. 처음에는 돈을 주거나 지위를 주면서 유혹하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잡아다가 고문하고 협박하잖아요. 이게 전통적인 수법이에요. 종교도 대부분 이런 이 두 가지 방법을 씁니다. 첫 번째, ‘이거 믿으면 천당 간다. 돈 번다. 좋은 일이 생긴다’라고 합니다. 이게 유혹이에요. 두 번째,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벌 받는다. 재앙이 닥친다’라고 해요. 이게 협박입니다. 이런 유혹과 협박은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방식인 겁니다.

여러분도 자식들한테 늘 두 가지 방법을 쓰죠. 첫 번째, ‘심부름 다녀와라. 공부해라. 그러면 뭘 줄게’ 이게 유혹이에요. (웃음) 두 번째, ‘이거 안 하면 때릴 거야!’ 이게 협박이에요. 경전에는 마왕의 그것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마왕의 유혹’이라고 말하죠.

내가 유혹과 협박에 놀아나지도 말아야 하지만, 또한 다른 이에게도 유혹과 협박을 하지 마세요. 특히 애들한테 너무 유혹하고 협박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유혹과 협박 속에 자랐기 때문에 크고 나면 또 다른 사람한테 유혹하고 협박하게 되기 쉬워요. 부부도 늘 유혹과 협박 속에 살죠. 살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할 거야!’라고 협박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당신이 뭘 하면 내가 뭘 해줄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부처님은 이런 유혹과 협박을 이겨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왕은 부처님에게 유혹과 협박이 안 통하니까 마지막으로 마왕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합니다. 자재천왕(自在天王), 무엇이든지 다 뜻대로 할 수 있는 마왕의 자리를 주겠다는 거예요. 이건 참 큰 유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뭐든지 뜻대로 다 되니까 중생 구제도 뜻대로 다 될 것이고, 살고 싶은 만큼 수명도 길게 할 수 있을 것이잖아요. 뭐든지 뜻대로 다 된다니까 얼마나 좋은 자리예요?

부처님께서는 마왕의 제안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득(無得)’이에요.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얻을 바가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완전히 번뇌가 없는 경지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법문 하는 저도 아직 얻을 바가 있어요. 저는 아마 한국에 전쟁이 안 나도록 해준다거나, 통일을 할 수 있다거나,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 사태를 해결해 준다면 ‘죽어도 좋다’라고 할지도 몰라요. (웃음)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라는 말로 물리치셨습니다.

깨달은 눈으로 본 세상이렇게 부처님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어요. 우리가 진실을 보지 못하는 건 늘 욕망에 가리어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화가 나도 ‘눈에 뵈는 게 없다’라고 표현합니다. 모두 어리석다는 말이에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니까 눈에 씌어있던 것이 없어지고 세상을 환히 보게 되었어요.

열린 눈으로 본 이 세상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변해갑니다. 형성된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화해서 사라집니다. 고정 불변하는 건 없습니다. 나만의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어요. 그러니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관계 맺어서 형성되고 사라집니다. 이걸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해요. 그래서 부처님이 ‘연기법을 깨달았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실상을 환히 보니까 괴로울래야 괴로울 일이 없었어요. 모든 번뇌와 의문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날을 성도일(成道日)이라고 해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편안함과 기쁨을 만끽하셨습니다. 이걸 법열(法悅)이라고 해요. 그런 다음에 세상을 내려다보니 뭇 중생이 다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혼자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옆에서 막 악몽을 꾸고 잠꼬대를 한다고 난리인 형상과 같았습니다.

‘아, 내가 저들을 깨워줘야 하겠구나.’

부처님이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고 싶었던 사람은 두 분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요. 그래서 자기를 오해하고 떠난 옛 도반들을 찾아가서 이 법을 전했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제자가 된 다섯 비구입니다. 이렇게 교화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성도일을 맞이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합니다. 이 좋은 법을 내가 유용하게 써야 해요. 아는 것에서 그치면 그림의 떡이에요. 내 삶에 적용해서, 나 역시 괴로움이 없는 경지까지는 못 가더라도 괴로움이 줄어드는 경험은 해야 합니다.

기쁘게 전법하기
그리고 이 좋은 법을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야 합니다. 불교로 전할 수 있으면 불교란 이름으로 전하고, 불교라는 이름이 장벽이 되면 불교라는 이름마저도 버리고 법을 전하자는 거예요. 정토회에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게 불교대학이고, 불교라는 이름을 버리고 전하는 게 행복학교입니다. 다가오는 봄에 불교대학도 열고, 행복학교는 매달 진행하고 있으니까 틈나는 대로 법을 전하도록 합시다.

전법은 무거운 의무감으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내가 고질병에 걸렸는데 어떤 약을 먹고 나아서 ‘야, 이 약 참 좋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똑같이 아프다고 할 때 ‘이거 먹으니까 낫더라’ 이렇게 가볍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꼭 제약회사에서 홍보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충분히 소개할 수 있어요. 전법이 잘 안 되는 사람은 아직 자기가 충분히 치료 효과를 못 본 겁니다. 그러면 전법이 자꾸 의무가 되고 무거운 짐이 돼요.

전법을 할 때는 상대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돼요. 그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가볍게 인연을 맺어줄 뿐입니다. 먹고 안 먹고는 그들의 문제니까 그것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까지 간섭하면 또 마음이 불편해져요.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상대가 안 한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지잖아요. 전법은 상대를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의 자유예요. 나는 다만 법을 전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진을 하고 전법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비대면 온라인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이 혼란스럽겠지만 수행자의 자세로 적응해가자고 격려하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정토회는 그동안 법당 중심으로 수행정진하다가 온라인 기술의 덕분으로 이제는 개인 법당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을 하게 되니까 훨씬 활동이 용이하고 확산도 쉬워졌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하는 재미가 좀 떨어지는 면도 있지만, 우리는 수행자이기 때문에 그런 데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해요.

변화하는 과정에서는 좀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 또 적응을 해야 합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살아온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살아온 습관을 막 붙들고 고집한다면 그건 수행의 측면에서도 맞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살아온 습관이 있더라도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그 변화에 가장 적합하게 대응하는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비대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빨리 적응할 것이고, 연세 드신 분들은 그 습관의 벽이 두터워서 적응하는 데 조금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수행자이니까 극복해 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제안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중이 현실에 맞지 않다고 하면 진행을 안 해도 돼요. 그런데 온라인으로 개편하는 핵심은 전법활동에 전념하자는 거예요. 예전처럼 함께 하자고 붙들고 있으면 봉사할 마음을 내고, 그냥 놔두면 봉사할 마음을 안 내고, 이렇게 운영하는 방식으로 가지 말자는 겁니다. 억지로 봉사를 하도록 하지 말고, 항상 열어두고 자발적으로 신청을 받아서 운영하자는 거예요.

 

 

정토회에는 발심행자, 서원행자, 결사행자라는 회원 제도가 있습니다. 이것도 온라인 시대에는 발심행자 조건이 되는 사람을 찾아가서 ‘꼭 해봐라’ 하면서 설득하는 방식이 아니라 본인이 발심행자가 되겠다고 신청서를 내면 교육을 받아 발심행자가 되고, 서원행자도 위에서 추천하는 게 아니라 서원행자가 될 자격 조건이 되는 사람이 본인 스스로 신청하고 교육을 받아 서원행자가 되고, 결사행사나 법사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이 일을 꼭 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하지 말자는 거예요. 온라인 시대에는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신청자가 없으면 그냥 두고 가자는 겁니다.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포기하고 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온라인 시대에는 자율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래야 창조성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법당을 버릴 수는 없었잖아요? 법당이 있는 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온라인 시대에는 법당이 다 없어지고 내 방이 법당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 봉사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면 됩니다. 그렇게 조직을 가볍게 개편해서 가자는 거예요.

 

 

억지로 하는 봉사 vs 자발적으로 하는 봉사

앞으로는 봉사자 모집 공고를 내서 신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그들을 모으고 교육해서 일을 진행해나가면 됩니다. 정토회는 세상에 도움이 되겠다고 원(願)을 세운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발심행자가 되면 봉사를 하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반회원이 되면 봉사를 안 하겠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억지로 끌고 가지 말고, 포기하고 가자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정토회를 그만두는 사람이 생긴다면 정토회의 활동이나 재정 수입이 줄어들겠지만, 대신 지출도 확 줄어들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마음을 내서 봉사를 해야지 억지로 보시하고 봉사하도록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봉사를 할 사람은 마음껏 하도록 해 주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해도 되도록 하자는 겁니다. 일반 회원이 되면 누구나 법회를 들을 수 있고, 수행도 할 수 있도록 다 열어주되, 발심해서 더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은 더 할 수 있게 하자는 방향이에요. 전체 조직을 완전히 개방적으로 개편하려는 것입니다.

 

 

다만 본인이 약속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라는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도 관계되는 것입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듯이 인연을 맺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고, 책임지기 싫으면 참여하지 않으면 된다는 거죠.

 

일반 회원들을 팽개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자는 거예요. 그래야 일을 하는 것이 재미있어집니다. 일이 힘들어도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억지로 하는 것은 수행의 본분과도 맞지 않아요. 그런 관점에서 다시 한번 검토해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돌아보면 상당수 활동가들이 힘들지만 여기까지 온 측면도 있어요. 그것을 인정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가지 말고 자발성에 기초해서 일을 해나가는 방향으로 개편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라인 정토회에서는 대의원제도 또한 불필요합니다. 오늘 공청회를 하듯이 시시때때로 대중들의 의사를 받기 위한 공청회를 열어서 의결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이렇게 온라인 시대에 맞게 체계를 개편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초안도 이번 공청회가 끝나면 다시 수정해서 내려갈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다시 논의하고 수정해서 새로운 안을 만들어 가게 될 겁니다.

 

 

과거에 연연하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여기서 가장 큰 쟁점은 모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같은 모둠으로 편성해서 함께 가자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만약 여러분들이 이 의견에 찬성한다면 저도 아무런 이견이 없습니다. 그렇게 가도 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진지하게 토론해봤으면 해요. 정말 그것이 효과적인지, 여러분들이 과거에 연연해서 제기하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토론해보라는 겁니다.

 

토론을 충분히 해봤는데도 여러분이 그렇게 가기로 결정하면 그렇게 가면 됩니다. 온라인 시대이니까 진행해 나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시 화상회의를 해서 바꾸면 돼요. 과거에는 한번 결정하면 3년은 간다는 원칙을 정했는데, 지금은 그 원칙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지난해 정한 것을 1년도 안 돼서 바꾸려고 논의하고 있잖아요? 반대로 더 좋은 게 있다면 굳이 3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자는 게 아니라 정말 더 좋은 게 있다면 바로 바꾸면 된다는 거예요.

 

법당도 마찬가지예요. 법당을 좀 더 유지하고 싶으면 지역대의원회의에서 자율로 결정하면 됩니다. 법당의 용도가 있으면 3년을 유지해도 됩니다. 그러나 용도가 없으면서 집착 때문에 지키려고 하는 것은 수행의 관점에서 점검해보라는 겁니다. 만약 법당을 다른 용도로 쓰자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라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지 검토해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학대받는 아동을 보호하는 시설로 사용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죠.

 

온라인 전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

관점을 조금 크게 가지세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조금 어리둥절할지 모르지만, 방향을 바꿔서 막상 진행해보면 여러분들이 ‘그때 방향을 잘 바꿨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토회의 관건은 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진행할 사람을 얼마나 많이 양성할 수 있는가입니다. 다른 만 가지를 포기해도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연세가 드셨거나 해서 이 일을 맡을 수 없는 분들은 이 일을 지원하는 기능을 하면 돼요. 지역별 수련원에 가서 불사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나머지 지원하는 역할들을 맡아주면 됩니다. 정토회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했더라도 굳이 전법 활동가 모둠에 있을 이유가 있을까요? 활동가 모둠에 속하지 않더라도 정토회 회원으로서 아무 부족한 게 없습니다. 정토회 회원으로서 수련장에 와서 뭐든지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겠다는 거예요.

 

이제는 온라인으로 모든 불교대학과 경전반 수업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진행자가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전법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불교대학 진행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아서 실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인격과 자격을 갖추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그래서 연수원에서는 그 일을 할 사람들을 훈련시키려고 합니다.

 

많이 연로하신 분들은 굳이 불교대학 진행자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건강이나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이 따라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굳이 과거에 공로가 있다고 전법사만 모이는 활동가 그룹에 소속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2년만 더 지나면 1차 만일결사가 끝나고 2차 만일결사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데, 그때가 되면 결사행자들도 모든 지위가 해제됩니다. 그러면 재모집을 해서 2차 만일결사를 30년간 책임지고 가겠다는 사람들이 새로 결사행자가 되어야 해요.

 

이런 변화가 2년 앞당겨졌다 뿐이지 기본 계획에 다 있었던 것입니다. 2년이 당겨진 게 문제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2년을 당겨 시행하려니 준비가 조금 덜 돼서 혼란이 있는 거예요. 만약 2년 후라면 준비가 잘 돼서 바로 개편을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시간이 조금 당겨진 것뿐이지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의기투합해서 신나게 일할 수 있을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까요? 질문자가 제기했듯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면 진지하게 논의해보세요. 스님의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스님은 여러분들의 관념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고, 여러분들은 현실에 토대를 두고 이 문제를 살펴봐야 되겠죠. 그래서 모둠을 편성하는 문제는 다시 토론하거나 검토해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통을 하고 있는 겁니다. 결론이 안 나면 2월 한 달 내내 토론을 더 해도 됩니다. 그러니 서두르는 게 아닙니다. 죽었으면 장례를 치르는 것을 갖고 서두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이 났으면 집행을 빨리 하는 게 낫고, 결론이 안 났으면 토론을 더 하는 게 낫다’

 

이렇게 관점을 갖고 충분히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계되는 것은 스님이 마음공부의 관점에서 바르게 지도하겠지만, 어떻게 운영하면 효과적인지에 대한 문제는 세속적인 일이기 때문에 스님이 앞을 내다보고 의견을 내지만 스님이 결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의논해서 결정을 내릴 일입니다.

 

지금 제일 많이 제기되는 것이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같이 모둠에 편성하자는 것인데, 활동가와 비활동가를 함께 모둠에 편성하면 제가 생각하기에는 활동가들이 힘들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의기투합해서 해야 신이 나서 하고, 효과도 나고, 고생해도 재미가 있는데, 7명의 모둠원 중에 3명은 일하고, 4명은 아무것도 안 하면, 일하는 3명의 기운이 빠지게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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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이해하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편안한 것.

 

여기 컵과 뚜껑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물건은 크기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컵이 크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뚜껑과 비교했을 때 뚜껑보다 컵이 크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컵을 이 탁상과 비교하면 컵은 작잖아요. 그래서 존재 자체는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대로 다 소중해요. 그러나 비교를 하면 크다’, ‘작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크다’, ‘작다하는 것은 인식상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컵 자체가 크기 때문에 크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뚜껑과 비교할 때 크다고 인식되는 겁니다. 컵보다 큰 것과 비교할 때는 이 컵이 작다고 인식됩니다. 크다, 작다는 것은 객관의 문제가 아니고 주관의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게 진실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뚜껑을 기준으로 하면 뚜껑보다는 컵이 커요. 컵을 기준으로 하면 컵보다는 뚜껑이 작아요. 기준을 뭘로 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말이 생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이 말도 인식상의 오류에 해당합니다. 실제로는 둘이 서로 다르다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존중입니다. 존중은 상대를 받든다’, ‘네가 훌륭하다이런 뜻이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둘이 서로 다른데 기준을 나로 잡아버리면, 이것은 옳은 게 되고, 저것은 그른 게 되고, 이것은 맞는 게 되고, 저것은 틀린 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너가 틀렸다. 고쳐라이렇게 말하는데 상대는 안 고칩니다. ‘고쳐라하는 생각은 결국 내 식대로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상대가 안 고쳐지면 화가 나는 거예요. 화가 나면 내가 힘들어집니다. 상대를 미워해도 내가 힘들어요. 힘이 드니까 그래! 죽든지 살든지, 틀리든지 옳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이러면서 포기해 버리는 겁니다.

 

상대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다름을 인정하면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화가 나거나 미워지거나 이런 일이 안 생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서 같이 살려면 갈등이 생깁니다. 예를 들어, 한 방에서 사는데 나는 덥다그러고 상대는 춥다그래요. 나를 기준으로 하면 너의 몸이 문제다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 저 사람 입장에서는 덥구나하게 되지 누구를 탓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방에 둘이 같이 살려면 어쨌든 조정을 해야 됩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건 아니지만, 조정은 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대화가 필요합니다.

 

나는 약간 더운 것 같은데, 당신이 춥다니까 어떻게 할까?’

 

이럴 때 제일 쉬운 조정 방법이 상대를 기준으로 나를 맞추는 겁니다. 이 방법이 제일 쉽습니다. 나만 바꾸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운데 상대는 춥다고 하면 내가 옷 하나 더 벗으면 되고, 상대는 더운데 내가 추우면 내가 옷 하나 더 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나를 버리는 게 인생살이에서 제일 쉬워요. 그런데 우리는 이 쉬운 길을 안 갑니다. 어쨌든 힘든 길을 가려고 해요. (모두 웃음)

 

 

제일 힘든 길은 상대를 고치는 겁니다. 이 방법이 제일 힘듭니다. 상대가 내 마음대로 고쳐지나요? 그런데도 그 어려운 길을 선택하니까 인생살이가 피곤한 겁니다.

 

제일 어려운 길은 상대를 고쳐서 나한테 맞추는 거예요. 제일 쉬운 길은 나를 고쳐서 상대에게 맞추는 거예요. ‘나도 좀 고치고 너도 좀 고치자. 중간에서 타협하자이런 세 번째 길도 있습니다. 대부분은 제일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자기가 대단히 양보한 것처럼 반반씩 타협하자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제일 쉬운 길은 나를 버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조금 어려운 길은 중간을 선택하는 거예요. 그러나 상대가 쉽게 양보를 안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길도 쉽지는 않아요. 만약 내가 힘이 더 세든지, 키가 더 크든지, 아이와 상대하는 엄마라든지 이런 상황이라면, 힘으로 제압해서 그냥 밀고 나가면 돼요. 상대를 고치려면 자기가 힘이 더 세야 합니다. 물론 힘이 세도 상대를 고치는 건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저항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엄마한테 덤비고, 남편이 아내한테, 아내가 남편한테 덤빕니다. 이런 저항을 밀고 나가려면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고치는 걸 한번 시도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상대가 고쳐지면 다행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고치는 것을 나쁘다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첫째, 나를 기준으로 상대를 한번 조정해보는 겁니다. 그래서 밀어붙였더니 상대가 흔쾌히 받아들인다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쁜 것도 아니에요. 둘째, 내 의견을 밀어붙였는데 안 받아들여진다면 중간에서 타협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셋째, 그런데 그것도 안 되면 나를 버리면 해결이 돼요. 다른 방법은 나 혼자서 결정을 못 하지만, 나를 버리는 건 언제든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 언제든지 자기가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도 , 그거 내가 하지이렇게 자기가 결정을 내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고치는 건 내가 결정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늘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방법만 있는 건 아니에요. 세 가지 모두 하나의 방에서 잔다는 걸 전제로 할 때 조정하는 방법입니다. 만약 방이 두 개라면 조정 방법이 또 있어요. 나는 이 방에 자고 너는 저 방에 자고, 너는 에어컨 켜고, 나는 그냥 자고, 너는 보일러 틀고, 나는 그냥 자고, 이런 조정 방법도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를 뿐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해가면서 조금씩 조정해 가면 됩니다.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무조건 포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괴롭지가 않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요.

 

질문자가 자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너무 힘드니까 결국은 에이, 안 간다이렇게 되는 거예요. 욕심을 내서 너무 높은 산을 오른다고 정해놓고 가다가 힘드니까 에이, 산에 가면 뭐해? 집에서 자는 게 낫지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양 극단에 치우칩니다. 내 식대로 하는 것이면서 다 너를 위해서 그러지 누굴 위해서 그러겠어?’ 이렇게 말하고, 안 되면 그래, 네가 죽든지 살든지 모르겠다하면서 외면합니다.

 

 

집착과 외면은 같은 거예요. ‘사랑과 미움은 같다이렇게 말하듯이 내 식대로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니까 미움이 생기는 겁니다. 내 식대로 하려는 게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욕망입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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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결사중 9900일째 기도입제식이다

 

2019.6.16.제9-9차입제식

전남 광주화순 체육관에서 6천 여명이 참석한 입제식이으로 전국및세계각국 지역 정토회 법당에서 동시에 생중계로 진행하게됐다

사회에는 코미디언 김병조거사님의 소개로시작이 되여 인사와 사업보고 결과보고등으로진행 되였다

과거에 비하면 우리 나라의 정세가 전쟁의 위험에서 조금이나마 평화적으로 바꾸어져 가는데 우리의 기도가 다소나마 영향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정토회는 제벌이나 정부로부터 지원이나 도움을 일체 받지않고 회원들의 자발저인 봉사와 보시로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좋은 법을 우리가 주인이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수행과 보시 봉사 로서 만들어가고 있다는것을 알아야한다

우리가 내는 삼보 결사비 불전등으로 운영되며 해외 빈곤층을 돕고 북한에 옥수수를 보내고 하는 사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소견이 좁게 결사금이나 수호비불전등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낼때마다 망서리고 주저했던 것이다

오늘 스님께서 정토회의 운영과 이번에 북한에 옥수수보내는 과정을 우리가 알기쉽게 법문을

통하여 설명해 주셔서 이해하고 감동을 했다

이세상에 그 어떤것도 누구의 것이라고 할수가 없으며 누구의 것도 될수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내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하고 있었는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당장 결사금을 이체했다.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쓰여지고 해외 난민들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을 확연히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좋은 가르침을 들으며 괴로웠했던 나를 알고 왜 괴로워 했는지 원인을 알고 행복해 질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보시와 봉사로서 나를 실천하는 수행자가 되여야 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모든것은 연기로서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 온다는 것을알고 어리석음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라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야된다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내 것이라 할수있는 것도 없으므로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한 생각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즉 집착을 놓아버리고 현실을 사실 그데로

볼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곧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될것이다

금강경에 모든것은 허망한것이니 일체의 모든것이 꿈인줄알면 그것이 곧 부처다

그러므로 일체 상을 떠나야 그이름이 부처다

어떤상도 취하지 안하고 여여부동하라 어디에도 머무리지 없이 마음을 내라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불과 같으니 모양이나 소리로

부처를 찿는다면 이것은 사도라고 하셨던 것이다

선사들은 ''부처란 곧 마음이다'' 라고 했다

마음은 모양도 소리도 없다 즉 실체가 없다

버릴수도없고 취할수도없지만 인연따라 이루어질뿐이다 그래서 정해진법이 없지만

다만 인연에 따라서 정해질수도 있다 무유정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

여래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즉비 아뇩다라 삼약삼보리시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런 법은 참으로 희유한 것이며 법을만난 인연 또한 소중하지 앓을수 없다고 생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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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마음이 들뜨거나 흥분될 때는 항상 자기를 봐야 합니다.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살 때 어떤 사람의 꼬라지가 보기 싫다면 정신질환일 가능성이 절반 정도 됩니다. 이 정도는 가능성이 반반입니다. (모두 웃음) 그런데 같은 부서에 있는 사람이 두 명이나 세 명 이상 보기 싫다는 정도면 거의 100퍼센트 정신질환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평가 기준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 (침묵)

 

“인정을 안 하나 봐요. (모두 웃음) 그렇게 자기 점검을 빨리 해야 합니다. 여러 명이 같이 있을 때 어떤 한 사람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건 분별심이에요. 그건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보기 싫고, 저것도 보기 싫다’라고 할 정도가 되면 그건 분별심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질환에 속해요. 여러분들이 이런 기준을 딱 갖고 있으면 자기 치료가 굉장히 쉬워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하죠. ‘어떻게 내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다 이럴까?’ 자꾸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동시에 2~3명이 보기 싫다는 마음이 딱 일어나면 ‘어, 내가 지금 분별심을 넘어서 정신질환에 속하는 수준이구나’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거나, 아니면 정진과 마음 관찰에 몰두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감정 기복이 심하고 우울증이 있어도 자기 컨트롤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어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에 빠져버리죠. 자기 생각에 빠져서 시비를 하니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미쳐 날뛰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걸 오늘 꼭 명심하셔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태어나기를 키가 작도록 태어난 사람이 있어요. 신체가 약한 사람도 있고,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도 있죠. 그런 것처럼 정신적으로 차분한 사람도 있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도 있고, 민감한 사람도 있고,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도 있고, 분열증이 있는 사람도 있고, 우울증이 있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열등한 게 아닌 것처럼, 그 상태를 자기가 알고 인정하면 괜찮아요. 여러분들이 우울증이 있든, 감정 기복이 심하든, 흥분을 잘하든,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에요. 그걸 자기가 알아차리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중요한 거죠.

 

몸이 약하거나 아프다고 해서 공동체에 못 사는 건 아니에요. 건강한 사람과 똑같이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게 힘들어지는 거예요. 몸이 약하더라도 자기가 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기에 맞춰서 조금 힘이 덜 드는 일을 하면 돼요. 다른 사람은 땅을 팔 때 자기는 풀을 뽑는다든지, 다른 사람이 바깥에서 힘쓰는 일을 할 때 자기는 안에서 청소를 한다든지, 이렇게 맞춰서 일하면 되거든요.

 

이것은 게으른 것과는 성격이 달라요. 자기를 잘 알면 회의를 할 때 자기 역량에 맞게 일을 하겠다고 건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가 있어서 부엌에서 일을 하겠습니다’라든지, ‘저는 이런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는 이런 일을 좀 맡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내놓고 얘기하면 함께 생활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이런 얘기를 내놓는 것이 자유로워야 합니다. 자기를 열등하게 생각 안 해야 편안하게 내놓을 수 있어요. 게으르거나 혹은 그 일을 하기 싫으면 그런 제안을 하기가 부담이 됩니다. 눈치가 보이니까요. 그런데 본인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처지가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일을 찾아 한다는 자세를 가지면, 몸이 약해도, 병이 있어도, 장애가 있어도, 심리가 불안해도, 우리는 함께 살 수 있고 서로 조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점검을 늘 해야 합니다. 자꾸 남을 탓하기만 하면 자기 점검을 못해요. 아니면 자꾸 억제하거나 자학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한 존재예요. 자학할 필요가 없어요. 억지로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를 필요도 없습니다.

 

‘아, 내가 지금 흥분하고 있구나’

‘아, 내가 지금 병이 발병하고 있구나’

‘아, 내가 지금 감정 기복이 심하구나’

 

이렇게 그냥 알아차릴 뿐이지, 그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걸 당연시하지도 마세요.

 

‘아, 이런 상태구나. 이런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대중과 함께 더불어 살 수 있을까?’

 

이렇게 관점을 가져야 자기에게 긍정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좋은 봄날에 정작 마음에는 봄이 안 오는 삶을 살지 말고, 이렇게 정진을 하셔서 계절의 봄과 함께 마음에도 봄날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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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이 트기까지 기다려주세요

 

봄에 농사를 지어보면, 지금 씨앗을 심어도 싹이 터서 나오기까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립니다. 지금처럼 날씨가 조금 쌀쌀할 때는 열흘이 지나도 싹이 안 나오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한 보름이 지나야 겨우 싹이 나옵니다. 물론 날씨가 아주 따뜻하면 씨앗을 뿌리고 난 뒤 일주일 이내에 싹이 트지만, 대부분 첫 씨앗을 뿌린 후 보름이 지나야 싹이 터서 나옵니다. 긴 것은 20일이 넘어야 하고요. 그 후 한 뼘 정도 자라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립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런 걸 보고 있으면 ‘이게 언제 다 자라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답답해져요.

 

그런데 7,8월이 넘어가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빨리 자라기 시작합니다. 고추도 옮겨 심어놓고 한 달이 지나도 그냥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7,8월이 되면 사람 키보다 더 자랍니다. 호박도 넝쿨이 어마어마하게 자라요.

 

 

수행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수행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관리할 수 있을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업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습관을 알아차리는 데까지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려요. 이것을 변화시키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3년 공부했는데’, ‘5년 공부했는데’, 10년 공부했는데’ 하다가 결국 아무런 진척이 없는 것 같으니까 대부분 공부를 그만둡니다. 처음 출가를 했을 때는 스님만 되면 도를 이룰 것 같았고, 강원만 졸업하면 도를 이룰 것 같았고, 선방에서 세 철만 나면 깨달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무런 뜻대로 안 되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고, ‘까짓것 이럴 바에야 밖에 나가서 사는 게 낫겠다’, ‘세월만 낭비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 포기하게 돼요. 그래서 5년에서 10년 안에 속퇴하는 사람이 거의 70% 이상입니다. 이것은 마치 곡식을 심었는데 싹이 안 난다고 다시 땅을 갈아엎는 것과 같아요.

 

 

과학에서는 ‘임계점’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임계점을 넘어야 급속도로 자랍니다. 경제 성장에서는 비상한다고 표현하죠. 비행기도 활주로를 달리다가 일정 속도 이상이 되어야 날아오릅니다. 성냥불도 살살 켜면 만 번을 켜도 불이 안 붙지만 300도 이상 마찰력이 생기면 인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일정한 임계점을 넘어야 공부에도 속도가 붙습니다. 그런데 대다수가 그전에 공부를 포기해요.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씨앗을 심으면 땅속에 머무는 시간이 많습니다. 땅 위로 올라와도 어릴 때 자라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일단 자라게 되면, 그다음에는 특별히 손을 안 봐도 아주 빠른 속도로 쑥쑥 자랍니다.

그리고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쑥쑥 자란다고만 되는 게 아니잖아요. 뭔가 열매가 열리려면, 마무리 단계에서 관리가 필요합니다. 많은 고추와 오이가 달려도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게 되면 다 썩혀 버리게 돼요. 수행도 마무리가 잘 안 되고 넘쳐버리면, ‘내가 부처다’, ‘나는 깨달았다’ 이러면서 허황된 쪽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수행을 하면 마음이 늘 고요해야 되는데, 마무리를 제대로 못해서 흥분이 되거나 정신이상자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급속도로 성장한 종교들이 대부분이 나중에 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욕망의 충족으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가 급격하게 성장했다가 1,2대를 못 가서 주저앉게 됩니다.

 

 

부처님의 법이 좋은 이유는 우리들의 마음을 살피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첫째, 우리가 부지런히 일하더라도 그 가운데 마음은 늘 안정되어 있어야 해요. 둘째, 꾸준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어보면 그런 교훈들을 얻을 수가 있어요. 혼자 앉아서 명상을 하는 것도 수행이지만, 농사일도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농사일도 우리의 마음 작용과 거의 동일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따로 있고 마음공부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일 속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면 일할 때 괴롭거나 지루하지 않아요. 그래서 차분하고 꾸준히 일하게 됩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그런 것도 앞으로 함께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정토회가 마지막으로 개발하려는 게 선농일치(禪農一致)예요. 일을 하기 전에 마음 나누기를 하고, 일을 하면서 평정심을 가지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일이 끝나고 나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다시 점검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앉아서 명상하는 것과 밭에서 일하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선농일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전에 농사짓고 오후에 참선하는 게 선농일치가 아니라, 농사짓고 일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 관리가 되는 것이 선농일치예요. 이것이 바로 ‘일과 수행의 통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명상을 오랫동안 하면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일상 속에서 자기 마음을 관리할 수 있어야 ‘평상심이 도’ 혹은 ‘일상이 곧 수행’이라고 하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앞으로 연습해 나가야 합니다.

수행은 어떤 특정한 모양이나 형식이 아니에요. 잠을 자든 일어나든, 병이 나든 건강하든, 쉬든 일하든, 명상을 하든 노동을 하든, 늘 그 속에 수행이라고 하는 바탕이 안정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 대상이나 방식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요. 한가할 수도 있고, 바쁠 수도 있겠죠. 이런 공부를 해나가야 진정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과 문경으로 돌아가면 일상 속에서도 그런 공부를 꾸준히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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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회는 지난 14일 부처님 출가일을 시작으로 내일 열반일까지 전국 법당에서 8일 동안 용맹정진 기간입니다. 매일 300배 정진을 하고 영상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습니다. 오늘은 출가열반재일 일곱째 날이자 정기 수행법회일입니다. 스님은 오전과 저녁 두 차례 전국 생방송으로 법문을 했습니다. 오전 10시, 수행 법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출가열반재일 기간 동안 우리는 부처님의 일생을 공부하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자기 스스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면서 한평생 많은 사람의 고뇌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부처님은 숨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의 고뇌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부처님은 대중과 만났을 때 철학의 논리를 알려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학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에요. 그렇다고 감정에 호소하는 어떤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그 생각과 믿음의 뿌리가 되는 마음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어두운 마음을 밝게, 탁한 마음을 맑게 만드는 가르침을 펴셨습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통해서 고뇌와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을 제시하신 분이에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도 필요하고, 지위도 필요한 건 이해해요. 돈을 벌던지, 출세를 하던지 그건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러나 수행자라면 돈을 벌든 출세를 하던 뭘 하던 그런 걸 할 때 고뇌가 없어야 해요. 이게 핵심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정토행자는 수행자들의 모임인 수행 법회를 꼭 참석해야 하는 겁니다.

 

 

 

적어도 수행자라면 그 사람이 무슨 직업을 가졌든, 혼자든, 결혼을 했든, 한국에 살든, 외국에 살든 이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실패했냐, 성공했냐’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고뇌 없이 사느냐’ 예요. 수행자는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는 거예요. 내일까지 출가열반재일 정진을 열심히 하셔서 자기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까 질문을 몇 분에게 받겠습니다. 정진하면서 생긴 의문이 있거든 물어보세요. 수행자들이라서 물을게 없는 경지에 이르렀습니까?”(모두 웃음)

 

 

 

오늘 수행 법회는 즉문즉설 방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갑자기 질문할 기회가 주어진 대중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유투브로 즉문즉설을 듣다가 어제 불교대학에 입학한 분이었습니다. 유투브로 법문을 들을 때는 다 아는 것 같았는데 마음공부도 환경실천도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했는데요. 스님은 먼저 좋은 생각을 했다며 대중들과 함께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도 욕심내서 하면 괴로우니 꾸준히 정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자는 ‘명상’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오늘은 이 즉문즉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매일 아침 30분씩 명상을 하는데, 숨을 고르는데 몇 년이 걸렸어요. 호흡을 할 때마다 ‘내가 숨 쉬는 게 고르지 않구나’ 하는 걸 인식하게 됩니다. 처음엔 호흡이 잘 안 되니까 10분씩만 명상을 했어요. 차차 5분씩 늘려서 지금은 30분씩 명상을 합니다. 혼미한 상태는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호흡은 지금도 중구난방으로 들쭉날쭉해요. 계속 이렇게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것만 알아차려야 하는지, 아니면 그다음에 좀 더 발전적인 단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명상의 목적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금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어떤지 살펴봅시다. 어떤 소리를 듣거나, 어떤 모양을 보면, 감정이 일어납니다. 기분이 나쁘거나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게 감정이 일어나면 그에 따라 말을 세게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게 돼요. 그런데 감정에 따라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했을 때는 반드시 과보가 따릅니다. 내가 기분이 나빠서 욕을 했다면 상대편에게서 비난이 돌아오겠죠. 내가 한 것은 작지만 돌아오는 손실은 매우 커요. 이것은 나에게 손해입니다.

 

 

 

나쁜 말과 행동을 멈추지 않았을 때 생기는 손실

 

이 손해를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아무리 감정이 올라와도 남을 때리거나 죽이는 건 멈춰야 하고,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는 건 멈춰야 하고, 성추행이나 성폭행하는 것은 멈춰야 하고, 욕설이나 거짓말하는 것은 멈춰야 하고, 술 먹고 주정하는 것은 멈춰야 해요. 그렇게 나쁜 행동을 하면 손실이 너무 많이 따르기 때문이에요. 말이나 행동을 멈추려면, 감정이 올라오더라도 그 감정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계율이에요. 그래서 먼저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계율만 지키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계율은 나를 이익되게 하고 손실을 방지해 줍니다. 그러나 감정이 올라왔을 때 말하거나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마음속에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감정을 억제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남한테 손해는 안 끼치니까 과보는 안 받아요. 그러나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내가 괴로워지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에요. 감정대로 행동하면 속은 조금 시원하겠죠. 성질이 날 때 욕을 해버리거나 그냥 때려버리면 속은 조금 시원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돌아오는 과보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런 큰 손실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러나 계율만 지킨다고 해서 고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율을 어겼다가, 지켰다가, 또 어기는 것을 자꾸 반복하게 돼요. 감정을 터뜨리면 손실이 따르니까 후회를 하게 되고, 감정을 억제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세 번 이상 못 참는다고 하잖아요. 계율을 지키느라 감정을 억압하면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문제가 생깁니다.

 

 

 

계율도 지키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 방법

 

두 번째 단계는 이 스트레스를 안 받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감정이 왜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해요.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삶의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인도 말로 ‘까르마’라고 해요. 외부에서 자극이 탁 오면 이 까르마가 자동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그때 내가 깨어있지 못하면 휩쓸리게 됩니다. 감정이 확 올라오면 뭐라고들 표현합니까? ‘아이고, 나도 모르게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습관적으로 그랬다’, 이렇게 세 가지 표현을 많이 쓰죠. 나도 모르게 그랬다는 건 ‘무지(無知)’를 뜻합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다거나 습관적으로 그랬다는 건 깨어있지 못했다는 것을 뜻해요. 그래서 이런 감정이 안 일어나려면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이 깨어있기가 두 번째 단계예요.

 

 

 

 

 

자극이 와서 기분이 팍 일어날 때 ‘알아차림’이 있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그냥 뭘 보고 알아차리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에요. 의식의 작용이 아니라 무의식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려면 찰나 찰나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놓칠 때 ‘아, 놓쳤구나’ 하는 것이라도 금방 알아차려야 해요. 이것을 ‘선정(禪定)’이라고 합니다. 첫째, 계율을 지켜야 하고, 둘째, 선정을 닦아야 합니다. 선정의 핵심은 ‘알아차림’이에요.

 

 

 

원래 알아차림의 주된 대상은 감정입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전 단계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호흡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서 호흡이 여실히 알아차려지면,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매우 쉬워집니다. 물론 호흡에 비해 감정은 알아차리기가 훨씬 더 어렵죠. 그래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게 감정을 알아차리는 전 단계가 되는 겁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을 ‘아나빠나(Anapana)’라고 하고,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을 ‘위빠사나(vipassana)’라고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만 열심히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감정이 일어날 때 감정은 못 알아차려도 호흡만 여실히 알아차리면 마음이 들뜨지 않아요. 감정이 일어나면 호흡이 가빠지기 때문에 감정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감정은 일어나는데 호흡은 그대로인 경우는 없어요. 감정이 일어나면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호흡이 미세하게 가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감정을 따라가지도 말고, 억누르지도 말고

 

그래서 감정이 일어날 때 호흡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려야 해요. 호흡이 거칠 때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평정심을 갖는데 별다른 영향을 못 줍니다. 호흡의 변화가 미세할 때 알아차려야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하루에 밥을 세 끼 다 챙겨 먹을 때는 링거를 맞아도 맞았는지 표도 안 나지만, 일주일 정도 단식을 하거나 굶고 있을 때 링거를 한 대 탁 맞으면 맞기 전과 맞은 후에 표가 많이 나요. 누워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질 정도로 표가 납니다. 그것처럼 이미 일상적인 거친 호흡을 하고 있는 중에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가 없어요. 반면, 호흡을 고요히 하고 있을 때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목표는 감정에 있지, 호흡에 있는 것은 아니에요. 호흡을 통해서 감정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호흡이 가쁘냐, 호흡이 불규칙하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불규칙하면 불규칙한 대로 알아차리면 되고, 가쁘면 가쁜 대로 알아차리면 됩니다. ‘호흡은 고요해야 한다’, ‘호흡은 순조로워야 한다’, 이렇게 목적을 정하면 안 돼요. 그건 내가 의도하는 거잖아요.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감정 또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몸을 움직이면 호흡이 가빠지는 것처럼, 외부의 자극이 오면 그냥 내 까르마에 의해서 감정이 자동으로 일어나요. 그걸 알아차리면 이 감정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있어요. 감정에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선정을 닦는 거예요.

 

 

 

명상을 하는 목적은 호흡의 고요함이 아니라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결과적으로 호흡도 고요해집니다. 물론 말하고 행동하면 마음이 약간 들뜨기 마련이지만, 이런 고요함을 비교적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욕설을 해도 어느 정도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으면, 계율을 지키기가 아주 쉬워져요. 감정이 이미 들떠 버렸을 때 계율을 지키려면 엄청나게 억센 힘으로 눌러야 하니까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게 돼요. 그런데 선정을 닦으면, 남이 볼 때는 ‘아, 저 사람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구나’라고 하지만, 본인은 감정을 억제하는 데 힘이 전혀 안 들어요. 평정심을 딱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선정을 닦는 거예요.”

 

 

 

법문이 끝난 후 대중들은 300배 절을 하며 법문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7시 30분에는 직장인, 저녁반을 위한 수행 법회가 열렸습니다. 저녁에도 전국 법당에 생중계로 법회가 방송되었습니다.

 

 

 

“수행자는 매일 수행을 해야 합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찰나도 놓치지 말고 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하루에 한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며 점검을 해야 합니다.

 

 

 

또, 정초에는 한 해를 시작하며 3일간 정진을 하고, 출가열반재일을 맞아서 일주일간 정진을 해야 합니다. 여름 방학 때는 일주일이든 보름이든 휴가를 내서 명상을 하면서 자기를 정화해야 합니다. 연말에도 들뜨기보다는 차분하게 정진을 하면 좋습니다. 일상적으로도 정진을 해야 하지만 일 년 중에 몇 차례 기간을 정해서 꾸준히 정진을 해 나가면 굳이 출가 수행자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을 오롯이 지켜나갈 수가 있어요. 정토회는 출가자 중심의 수행자 모임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수행자로 살아갈 수 있는 재가자 중심의 수행 공동체입니다. 대중이 주인이 돼서 대중을 위하는 수행 공동체예요.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나는 수행자다’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꾸준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 후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고치려고 하면 피곤하다는 생각이 있어서, 인간관계든 일이든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남자 어른 앞에서는 긴장하고 할 말을 다 못 해요.

 

원래 할 말을 잘 못하고 참는 성격이었는데, 정진을 시작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기 시작했는데 다른 사람들과 부딪칠 것이 걱정돼요.

 

정토회 내에 왜 사모임을 만들면 안 되나요?

 

명상수련을 다녀온 후 일주일간 매일 새벽에 명상을 하는데 너무 졸려요. 잠에 대한 업식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님은 5명의 질문을 받은 후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정진을 부지런히 할 것을 당부하며 법회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자기감정을 합리화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무시하면 안 돼요. 지금 가지고 있는 업식은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해요. 화가 나면 화가 나는 자기를, 잔소리하면 잔소리하는 자기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합리화해도 안 되고, 자신을 외면해도 안 돼요.

 

 

 

 

 

우리는 첫째, 자신을 알고 이해해야 하고 둘째, 업식에 놀아나지 않도록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연습은 안 하고 자꾸 저절로 좋아지기만을 바라고 욕심을 부리니까 자신에게 좌절하는 거예요. 업식을 바꾸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너무 손쉽게 하려 드니까 자꾸 자기한테 자기가 실망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다 괜찮아요. 성질 좀 내고 이런저런 부족함이 있긴 해도 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모두 웃음)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하는 게 어디예요? 그래도 여기 나와서 법문이라도 듣고 수행해보겠다고 하는 것만 해도 사실은 가상한 거예요.(모두 웃음)

 

 

 

 

 

그러나 자기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감정을 살피고 알아차려야 해요. ‘자기감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거예요. 누가 이런 말을 하든 저런 행동을 하든, 이런 사건이 생기든 저런 사건이 생기든 거기에 내 감정이 널뛰기를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운전으로 비유해보면, 나만 잘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운전을 못해서 사고를 낼 수도 있어요. 그러니 첫째, 자기가 운전을 잘해야 해요. 그런데 두 번째,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사고가 나요. 앞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있고, 끼어들어올 수도 있고, 뒤차가 들이받을 수도 있잖아요. 내가 실수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주위 사람들이 잘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전거리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다니는 거예요.

 

 

 

주위에서 이런 말을 하든 저런 말을 하든, 이런 행동을 하든 저런 행동을 하든, 이런 사람을 만나든 저런 사람을 만나든, 이런 일이 생기든 저런 일이 생기든, 거기로부터 자기가 조금 자유로워져야 해요. 감정이 널뛰더라도 금방 가라앉히고, 기분이 조금 상하더라도 금방 회복을 하고, 안되더라도 다시 도전해보고요.

 

 

 

여러분은 완전히 미쳐 날뛰잖아요.(모두 웃음) 어떤 사건이 생기고 나서 이틀, 사흘이 지났는데도 ‘그놈의 자식!’ 이러면서 화를 내고 있어요. 몇 분 정도 미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됩니다만, 어떤 사람은 10년씩 독심을 품기도 해요.(모두 웃음)

 

 

 

 

 

그러니까 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변화를 시도할 때는 반드시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것도 꾸준히 힘이 가해져야 변화가 일어나요. 내 업식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노력은 안 하고 저절로 변하기만을 원해요. 잘 안 되면 방법을 찾아서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안 된다고 괴로워하기만 하는 건 욕심이에요.

 

 

 

힘을 가해서 변화를 시도해도 안 될 수가 있어요. 세상이 어떻게 다 내가 바라는 대로 다 되겠어요? 안 되면 연구를 해서 다시 하면 돼요. 또 안 되면 또 연구를 해서 하고, 또 안 되면 또 연구를 해서 하고요.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겠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만둬도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만두면 미련이 생기고, 안 되면 괴로워요. 온갖 게 다 괴로움의 원인이 돼요. 사람이 태어나서 시간이 흐르면 자라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안 자랐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죠. 나이가 들면 눈이 잘 안 보이고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게 당연해요. 그런데 ‘안 늙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니까 괴롭죠. 늙는 게 괴로움이 아니라, 안 늙으려고 하니까 괴로운 거예요.

 

 

 

순리대로 살면 별로 애쓰지 않아도 되는데, 안 늙으려고 애를 얼마나 많이 씁니까? 젊을 땐 노란 게 좋다고 까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더니, 이제는 또 하얀 머리를 검게 물들여요.(모두 웃음) 그게 다 껄떡거리는 거예요. 검은 게 뭐가 좋아요? 유럽 사람들은 원래 머리가 노란데요.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면 편다고 난리고, 머리카락이 펴져 있으면 또 곱슬머리를 만든다고 난리예요. 검으면 노랗게 칠하고, 희면 또 검게 칠하고요. 늘 이러니까 바쁘기는 바쁘죠.(모두 웃음)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노력은 잠깐 먹혀들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는 먹혀들 수가 없어요. 그런 노력은 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은 그런 데 이리저리 신경을 많이 쓰니까 인생이 피곤한 거예요.

 

 

 

 

 

조금만 자기를 알아차리고 자기를 관찰하면 내가 얼마나 독선적인지 알 수 있어요. 남이 이런 말 하면 ‘그런 말 하면 안 돼, 이런 말 해라’라고 하고, 그렇게 행동하면 ‘저렇게 행동해라’라고 하면서 온갖 세상일에 다 간섭하잖아요. 그게 바로 자기감정에 놀아난다는 거예요. 내가 간섭한다지만 ‘나’라고 할 게 없습니다. 내 업식이 그렇게 작동을 하는 거예요. 그것을 알아차려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사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여러분들 다 괜찮은 사람들이어서 같이 살면 참 재미있어요.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문제가 있다고 보니까 살기가 힘든 거예요.(모두 웃음)

 

 

 

여러분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의 그 많은 남자, 그 많은 여자 중에 고르고 골라서 연애를 하거나 결혼했잖아요. 그런데 그 인간 하고도 안 맞춰지잖아요.(모두 웃음) 그러니 얼마나 까다로워요? 내 마음에 딱 드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도망 안 가고 한 집에 살아주는 것만 해도 고맙다’, ‘남자면 됐다’, ‘여자면 됐다’, 이런 정도로 요구를 낮추면 아무 하고나 살 수 있어요. 요구가 높아지면 누구 하고도 못 살아요.

 

 

 

조금만 자기를 알아차려 보세요. 거창하게 단식을 하거나 고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기감정이나 성질대로 하려 들지 말고 조금만 이렇게 자기 조절을 하면 주위 사람들이 다 좋아해요. 자기한테도 남에게도 나쁠 게 없어요.

 

 

 

조금만 정진을 하시면 부처님 법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과학과 문명이 발달해도 삶의 기본 원리와 이치를 터득하지 않고는 인간의 고뇌가 끝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법문은 따뜻했지만, 무엇보다 수행이 중요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도 법문이 끝난 후 300배 정진이 이어졌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절을 하려니 몸은 피곤했지만, 고단한 일상에 묻힌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날입니다. 스님은 열반일을 기념하여 법문을 할 예정입니다

 

○자기를 아름답게 소중하게

 

오늘(2019.3.10)은 제9-7회향및9-8차 입제식이 각지역 법당에서 생방송으로 하게되였다. 

멀리가지않으니 편한점도있지만 비좁은 법당에서 갇혀있으니 답답하기도 하다 

전에 김천까지 새벽부터 나드리가듯 다닐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은 이렇게 변덕이 심해서 실체가없어 정한바가 없다고 했나보다

 

아침부터 나도 새로운 각오로 목욕제게까지 하고 부지런을 떨면서 법당에 도착하니 벌써 방석도 깔려있고 준비가 다 되여있였다

좀 일찍와서 바라지 봉사라도 할까 했는데 나보다 더 부지런한 도반님들이 이미 다 준비를 해놨으니 미안 할뿐이었다.

오랜만에 옷장에서 동방(법복)을 꺼내여 입었더니 조금은 어색하면서 한편 수행자 다운 자태에 은근히 자부심이 생겼다

 

10시부터 정토회 김병조 거사님의 사회로 행사가 시작됐다

 

 

 

 

○참석현황

중랑법당에서 42명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제주지부 1,286명을 비롯하여 전국109개법당 6000여명이 입제식에 참석했다고한다

정토회는 국내 8개 지부 해외 4개 지부가와 청년지부 1개가 있다고한다.

 

 

○스님의법문

지난100일 수행정진 잘 하셨으면 오늘은 다시 새로운100일을 정진 하기위한 입제 식이다.

겨울에 얼마나 준비가 되여 있느냐에 따라서 봄을 맞는게 남 다르듯이 시작을 하기위해서 준비가 필요하며 

준비에 따라 성과와 결과가 다른것이다

그래서 지난 수행기간동안 얼마나 잘 정진을 했는지 뒤 회광반조 돌아보며 점검을 할 필요가있다

즉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며 남을 괴롭게하지는 않았는지 나도좋고 남도 좋게하는 자리이타 수행을 했는지~혹시나 

물고기가 낚시 밥에 눈이 멀어 쥐가 쥐약을 먹듯이 어리석은 짓은 하지않았는지 살펴 보라는것이다

점검을 해보고 잘못 했으면 참회하고 다시 새로운100일을 수행정진 해야 할것이다

어리석기 때문에 순간적인 좋음에 사로잡혀 나를 괴롭게 하는것이되므로 어떠한 상도

취하지말고 깨여있으란 말씀을 하신다

 

어리석음이란 내가 나를 모르는 무지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고 있는데 남 때문에 내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무지를 깨버리기

위해서는 이치와 원인을알고 잘못된 생각을 버리면 될것인데 나를 고집하고 남을 고치려 하기 때문에 벗어나질 못하는것이다

 

나를 고친다는것은 쉽지가 않다

그런데 남을 고친다는것이 절대 쉬운일이 아닌데도 남을 고치겠다는 고집이 되려 더 큰 불행을 만들어 내는것이다

내 괴로움은 남 때문에 생기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를 고치려고 수행을 해야 하는것이다

 

내 앞에 일어나는 모든일은 자업자득으로 내가 원인의 씨앗을 뿌렸기 때문에 결과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한다

추상적인 나의 본질 참나를 찿으려 하지말고 지금여기 화가 나는 나를 알아차리고 지켜봐야 고쳐 질수 있는것이다

결사의 목표는 내가 나를 소중히알고 행복하게 하는것 이것이 수행의 목표가 되여야한다

나 밖에 그 어떤(상) 것 보다도 지금 나라는 소중함을 알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상징적 묘사로 가르침을 說 하신것이다

 

출렁는 파도에 괴로워 하지말고 파도를타고 즐길 수있는 지혜를 터득 하기위해서 수행을해야한다 말씀이시다

기도를 하기 위해선 간절한 믿음이 필요하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각오에 간절하게 정진을 해야 변화가 있게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여여할수 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세속적인 돈과 명예 직위 권력 부귀에 가치관 을 두지말고 자신의 소중함을 자각하라는것이다

 

생각해보니 난 지난날 어설프게 기도를 해 왔었다

부처를 놓고 부쳐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생각 날때마다 한점한점 어설프게 그려 왔기 때문에 오늘날 내가 이 꼴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정성껏 그려 가다보면 언젠가 완전한 부처를 그리게 되리라고 믿고 부처님 가르침 데로 낙수물이 바위를 뚫듯시 꾸준히 하리라

내스스로 새로히 다짐을 해 본다

 

 

 

 

 

 

○입제식 법문

 

맑은마음

좋은 벗

깨끗한땅

매일 새벽5시에 일어나서 수행정진하고 나누기를 하며 1000원이상 보시하며 봉사 할것을 약속하는것이다

입제식에 총516명이 참석해서 이땅에 정토를 실현하고자 동참하게됐다.

나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나를 고집하고 나를 괴롭히며 살아 왔음을 알고 아상에서 벗어

나서 행복하게 서로가 좋을수 있도록 다짐 하는 바이다.

 

따뜻한 봄이 오듯이 이땅에도 따뜻한 봄이 오기를 기원한다는 스님의 축원기도가 있었다

 

입제하는 입제자는 많은데 실천하는 수행자가 많지 않아서 염려가 되는데 작심3일보다는

100일을하고 더 나아가서 3년은 해야한다며 매일 아침 하루 한번만 하면 되고 그러다보면 쌓이고 쌓여서 

100일이되고 천일이 되는 것 이다 라는 스님의 당부말씀 이시다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고구정정 하시는 말씀일까요 우리 정토회 수행자를 위해서 하시는

법문인데 과연 얼마나 실천행자가 남게될련지 모르겠다

 

수행이란 내가 어리석어서 나를 알지 못하고 남을 탓하면서 괴로워 하지만 

그러지 말고 내 탓으로 돌려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되라는 말씀이시다

모든 괴로움은 남 때문에 일어나는것이 아니고 내가 일으키는 것이므로

나를알고 나를 사랑 할줄알아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것이다

라는 말씀이시다

내가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것이다

한마음 한생각 바르게 실천하므로 행복 할수 있는것이다

 

만일결사는 만일로서 약 30년의 결사이다

지금까지 8000일이 되는데 처음 출발때는 몇명이서 시작을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수만명이되는 정토회가 굴러가고 있다

한사람한사람이 이렇게 일체가되여 하나의 정토회가 되여가고 있는것이다

 

우리는 점심을 각자가 각기 가져온 반찬과 밥으로 양푼에 한꺼번에 비핌밥을 만들어

모둠별로 나누어 함께 먹었다

온갖 나물과 밥과 정성과 마음과 생각이 함께 비벼져 함께 먹었 다는것이 우리 정토와

일치하는 의미가 있기도 한듯했다

모든것은 하나다 일체는 둘이아니고 다르지 않다 .(색즉시공 색불이공)

 

그래서 법성원융무이상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잉불잡란격별성 불수자성수연성 이법성게 구절에

모든 이치가 포함되여 있다

정토는 이렇게 한사람의 수행자들이 모여서 곧 하나의 정토회가 되여 간다는것이다

정토는 모든것이 서로의 보시봉사로서 함께 만들어가는 수행공동체로 이뤄져가고 있다

정토회는 우리나라에서 수행공동체로서는 최초이며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않는 수행처를

만들어 가며 보다 많은사람들이 참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데로 수행을 할수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것이 목적이다

 

수행자 한사람 한사람이 행복하면 정토회 전체가 행복하게된다 

그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토회에 관심을갖게되고 그러다보면 온 나라 더 나아 가서 

온 세계가 정토가 될수있는것이다. 

아니 이미 정토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꿈인줄 알아차리고 깨여서 정토로 살아가면 될것이다

 

살다보면 뜻하지 안는일이 일어나게 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말고 수행과 전법을 해나가

야한다 . 뜻이 이루어지지 안는다고 괴로워 하지않고 왜 이루어지지 안는가 알고 

다시 시작 하던지 아니면 조금 바꿔 보던지 하면서 수행을 하는것이다

 

수행처란 정해져있는것 만은아니다

청정한 사랑들이 모여 있으면 그곳이 수행처가 되는것이다.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아니다

수행자은 믿음과 관점이 뚜렸하면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다

 

우리가 1000원 보시하면 인도 빈민촌에서는 두끼의 밥을 먹을수 있으므로 

서로서로가 같이하면 큰 돈이 모아지므로 불쌍한 아이들이 먹고 배우고 치료받으며 

살아 갈수 있도록 보시와 봉사하는데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시며

가슴에 손을대고 아래와 같이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자고 하시며 마무리 했다

 

나는 괜찬한사람이다

불쌍한 이웃을 돕고,

지구와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한반도의 평화를지키는 지킴이며

나를 행복하게하는 수행자 라는것을

다짐하면서 이번 입제식을 마쳤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오늘은 어릴 때부터 열등감에 쌓여 살았는데 나이 오십이 되어도 열등감에 위축되고 소심한 성격이 고민이라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청중들도 큰 감동을 느끼고 질문자를 위해 격려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열등감으로 살고 있는 저를 항상 봅니다.”

 “무엇 때문에 열등감이 들어요? 못 생겼어요? 키가 너무 작아요? 공부를 못 했어요?”

 “예. (질문자 웃음) 50세가 됐는데 아직도 그런 마음이 안 지워지고 있습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됩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위축되고 소심해지고 자신감도 부족한 걸 느끼거든요. 제가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청중 격려의 박수)

 “뒤로 한 번 돌아서보세요.” (모두 웃음)

 “질문자는 이제 저를 보세요. 

"여러분들 보시기에 첫째, 얼굴이 못생겼어요?”

(청중 크게 대답) “아뇨!”

 “두 번째, 신체가 저 정도면 왜소해요, 건강해요?”

 (청중 크게 대답) “건강해요.”

 “질문자한테 물어볼게요. 학교는 어때요? 초등학교 다니다 말았어요?”

 “고등학교 나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다니다가 말았어요.” (모두 웃음) 결혼은 했어요, 못 했어요?”

 “했습니다.”

 “자식은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셋방에 살아요, 자기 집에 살아요?”

 “제 집이 있습니다.” (질문자 웃음)

 “그러면 여러분이 보기에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청중 크게 대답) “괜찮아요.”

 “그래요, 괜찮아요. 질문자는 저보다 늙었어요, 젊어요?”

 “젊습니다.” (모두 웃음)

 “앞에 있는 스님과 비교했을 때 어때요? 질문자는 스님보다 인물도 괜찮고, 학벌도 괜찮고,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고, 집도 있고, 나이도 젊잖아요. 질문자보다 못한 저도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사는데, 질문자가 열등감 때문에 못 살겠다면 저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해요? (모두 웃음)

 그런데 두 가지 생각을 하셔야 해요.

첫째, 질문자가 어릴 때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충격받은 일이 있어서 그럴 수 있어요. 이건 심리 상담을 해보면 알아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든지, 공부 못한다고 야단을 맞았다든지, 인물에 대해서 악평을 들었다든지 예를 들면 뚱뚱하다든지, 얼굴이 넓적하다든지, 코가 낮다든지, 이렇게 누가 얘기한 게 있어서 질문자에게 충격이 됐을 거예요. 질문자는 기억도 못할지 모르겠지만 어린 시절에 신체적인 문제나 학업에 관계되는 것이나 집안의 문제와 관계되는 것이나 혹은 일을 하다가 잘 못했다고 핀잔을 듣거나 해서 상처가 된 게 뭔가 있습니다. 이런 상처를 ‘트라우마(trauma)’라고 합니다. 이런 상처가 있는데 계속 치유가 안 되면 늘 열등의식을 갖게 돼요. 트라우마는 치유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에 병이 난 건 치유를 하는데 마음의 병은 치유를 잘 안 해요. 이런 게 있어서 열등의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자가 약간 과대망상증이 있어서 그럴 수 있어요. 자기가 굉장히 잘난 사람이라고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나는 키가 170인데, 나는 180 이 되고 싶은 거예요. 현실에 있는 나는 이런데 다른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지나치게 되면 상상하는 내가 현실에 있는 나를 볼 때 현실의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이는 거예요. 키가 작다, 코가 낮다, 눈이 어떻다, 턱이 어떻다, 그래서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이럴 때 우리는 두 가지 길을 가게 됩니다. 성형을 하든 뭘 하든 현실에 있는 자기를 상상의 자기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간극이 너무 크면 아무리 노력해도 거기에 다다를 수가 없어요. 이게 심해지면 열등감이 심해져서 자학이 되고, 자학이 심해지면 자살로 가는 거예요.

이럴 때는 상상의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현실의 자기를 그냥 받아들여요.

지금 이대로 괜찮아요. 몸도 지금 이대로 괜찮아요.

눈은 어떤 모양으로 얼마나 찢어지느냐가 중요해요, 보이는 게 중요해요?

코는 냄새 맡는 게 중요해요,

콧대가 높은지 낮은지가 중요해요?

이는 가지런한 게 중요해요, 튼튼한 게 중요해요?

몸의 기능을 중심으로 해서 사물을 봐야 하는데 우리는 눈은 동그랗게 찢어져야 하고, 코는 콧대가 높아야 한다고 해요.

그렇게 상상으로 자기를 너무 좋게 생각하는 게 우월의식입니다. 열등의식은 우월의식 때문에 생깁니다. 다람쥐가 자신이 너무 작다고 열등의식을 갖고 자살하는 거 봤어요? 토끼가 자신이 너무 연약하다고 자학해서 자살하는 거 못 봤잖아요. (모두 웃음)

사람만 이러는 거예요. 사람은 너무 잘나고 싶어서 결국은 멀쩡한 자기를 죽입니다. 멀쩡한 자기를 자꾸 못난이 취급을 합니다. 특히 엄마들이 아이들을 자꾸 나무라면 그래요. ‘너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자립을 못 하냐, 너는 왜 그렇게 늦잠을 자냐’ 이런 식으로 자꾸 잔소리하면 자기 엄마로부터도 인정을 못 받으니까 이것도 열등의식의 한 요소가 됩니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계속 잔소리와 나무람을 들으면 애들이 대부분 밖에 나가서 기를 못 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첫째, 만약 마음에 상처가 있다면 치유의 과정이 필요해요. 둘째, 자기를 지나치게 높게 생각했다면 이 지나치게 높게 생각한 허상을 버려야 해요. 그래서 질문자가 이대로 괜찮다는 걸 자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게 어떤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 컵이 있고, 컵 뚜껑이 있어요. 

여기에는 받침이 있고요. 

컵을 기준으로 해서 물어볼게요. 

 이 컵 뚜껑보다 컵은 커요, 작아요?”

 “큽니다.”

 “이 받침보다는요?”

 “작습니다.”

 “그러면 컵 뚜껑보다는요?”

 “큽니다.”

 “받침보다는요?”

 “작습니다.”

 “그러면 이 컵은 커요, 작아요?”

 “큽니다... 아니...” (질문자 망설임, 모두 웃음)

 “이 컵은 커요, 작아요?”

 “모르겠습니다.” (모두 웃음)

 “우리는 ‘이 컵이 크다, 작다’고 말하지만 ‘크다, 작다’는 이 컵에서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 컵이라고 하는 존재에 크고 작은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우리의 착각이라는 거예요.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이 컵이 크다, 작다는 것은 컵에서 오는 게 아니고 인식 상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이 컵을 컵 뚜껑과 비교해서 인식을 할 때는 컵이 크다고 인식하고, 받침하고 비교해서 인식을 할 때는 컵이 작다고 인식하는 거예요. 컵 자체가 크고 작은 건 없어요. 우리는 ‘컵이 큰 거니까 크고, 작은 거니까 작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게 착각이라는 거예요.

크다 작다고 하는 건 존재에 있는 게 아니고 인식 상에서 생겨나는 정신작용이에요. 이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합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내가 임금이다’ 하면 임금이 되고 내가 ‘금이다’ 하면 금이 되는 식의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크다 작다’ 하는 것이 객관적 물질에 있는 게 아니고 이 인식 상에서 생긴다는 말이에요. 이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요.

그러면 이건 무거운가, 가벼운가? 무거운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도 아니에요. 이건 새것인가, 헌것인가?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에요. 이건 비싼가, 싼가? 이건 비싼 것도 아니고 값싼 것도 아니에요. 이건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다만 그것일 뿐이다. 이걸 철학적인 용어로 ‘공(空)’이라고 해요. ‘모든 존재는 다 공하다’ 할 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런 걸 ‘공’이라고 해요. 선(禪)의 용어로는 ‘다만 그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대승불교적인 용어로는 ‘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질문자는 열등한 것도 아니고 우월한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고, 뚱뚱한 것도 아니고 홀쭉한 것도 아니에요. 다만 나는 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보다 키 큰 사람하고 비교하면 나는 작다고 인식이 돼요. 나보다 작은 사람하고 있으면 크다고 인식이 되고, 나이가 적은 사람하고 있으면 내가 늙었다고 인식이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하고 있으면 젊다고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나보다 키 큰 사람하고 오래 있다 보면 내가 작다는 인식이 계속되다 보니 그대로 굳어버려요. 그래서 자기 존재 자체가 작은 걸로 착각하게 됩니다. 이걸 철학적 용어로 ‘상을 짓는다’라고 해요. 작다는 건 주관인데, 작다는 게 객관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걸 ‘상을 짓는다’라고 합니다. 객관이라고 생각하니까 작다는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예요. 질문자는 지금 열등한 것이 아니에요. 열등한 것도 아닐 뿐더러 우등한 것도 아니에요. 이해하셨어요?”

“네.”

 “그러니 질문자는 이제 다만 그것으로서 살아가세요. 모든 존재는 다만 그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옮기면 모든 존재는 다 완전한 거예요. 부족함이 없어요. 다만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다 그래요. 늙었든 젊든, 남자든 여자든, 지위가 높든 낮든, 부자든 가난하든, 다 완전한 존재입니다.

누가 낫다, 못하다 하는 것도 누구와 비교하느냐의 문제예요. 제가 얼마 전에 남북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 갔어요. 전직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같은 국가 원로들이 참석했는데 대부분 80세가 넘어요. 그분들이 저를 보고 그래요.

‘법륜 스님은 올해 나이가 얼마나 돼요?’

‘66세입니다.’

‘아이고, 아직 한창이네!’ (모두 웃음)

 그 사람들이 볼 때는 66세면 한창인 거예요. 여러분들도 80세가 돼보면 그럴 거예요. 50세일 때는 50세가 늦다고 하지만 60세가 되어보면 50세가 한창이고, 자기가 70세가 되면 60세가 한창이고, 80세가 돼보면 또 70세도 한창이에요. 이게 전부 다 상대적인 거예요.

질문자는 지금까지 허상에 집착하고 있었어요.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아, 별 거 아니네’ 하면 됩니다. 질문자가 어디 가서 잘난 체하고 목에 힘 줄 것도 없고, 못난 척하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수행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목에 힘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비굴할 것도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는 당당하되 겸손해야 합니다. 질문자도 어디 가서든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세요. 질문자가 뭐가 부족한데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는 풀보다 나아요, 안 나아요?”

 “낫습니다.” (질문자 웃음)

 “그래요, 다람쥐하고 비교해도 다람쥐보다 나아요. 풀보다도 낫고, 다람쥐보다도 낫고, 나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관점을 가지고 앞으로는 당당하게 사세요. 또 겸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목에 힘줄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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